'영화의 한 장면'이라는 말은 지극히 아름답거나 인상적인 장면을 설명할 때 쓴다. 실제로 영화의 한 장면 속에는 빛과 색상, 세계관, 배우의 몸짓과 표정, 의상과 장신구, 배경 등 다양한 것이 존재한다. 영화의 장면이 선사하는 흘러 넘치는 정보 안에서 많은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서울의 모습 일곱을 골랐다.


수유리 호텔 아카데미 하우스
<! 수정>

영화는 보지 않았다. 다만 몇 사람이 나에게 <! 수정>의 촬영지 중 하나가 호텔 아카데미 하우스라고 말해주어 알고 있다. 나는 사람들에게 아카데미 하우스 이야기를 자주 했다. 어릴 때 이 호텔 앞에서 자란 나는 언젠가 가보겠다고 마음 먹었다. 잡지 일을 하면서 화보 촬영을 하러 기어코 가고 말았다. 그러고 나서 얼마 지나지 않아 문을 닫았다. 알아보니 한 목사가 사회 공헌을 위해 만들었고, 민주화운동의 거점일 때도 있었다고 한다. 나에게는 그저 매혹적인 변두리 호텔이었다. 입구에는 구름의 집이라는 우주선 모양의 라운지가 있었고, 본관 로비에는 등나무로 만든 오래된 응접세트가 놓인 카페가 있었다. 방의 벽지는 옛날 화장품 패키지와 비슷한 무늬였고, 호수를 알리는 팻말의 글씨체 또한 옛것 그대로였다. 영화 세트장보다 더 세트장 같은 곳. 이제 실체는 없고, <! 수정> 속에서 유일하게 흑백 영상으로 남아있다.

사진: 박의령
오! 수정

감독 홍상수

출연 이은주, 정보석, 문성근

개봉 2000 대한민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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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태원 게이힐
<꿈의 제인>

일본 버블 경제 시대의 마담처럼 차려입고 언덕을 내려오는 제인(구교환)의 모습은 이 영화 전체를 지배하는 이미지다. 영화 개봉 전부터 스틸 이미지로 화제를 모았고 포스터로도 제작되었다. 제인이 걸어 내려오는 길은 게이힐이다. 이태원 소방서 옆길을 그렇게 부른다. 게이바와 레즈비언바, 트랜스젠더클럽이 모여있다. 제인은 트랜스젠더이며 트랜스젠더 클럽에서 노래를 부른다. 이 거리에는 이태원에서 가장 오래된 트랜스젠더 클럽인 '트랜스'가 있다. 젊은 사람과 나이든 사람이 한껏 꾸미고 나와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춘다. 가끔 야유를 하는 술 취한 손님들에게 엄한 목소리로 욕을 날리고는 아무렇지도 않게 다시 노래를 부르는 멋쟁이들. 대략 15년 전, 처음으로 트랜스에 갔을 때 드래그 아티스트 모어가 기모노를 입고 카일리 미노그의 ‘GBI’ 립싱크쇼를 하고 있었다. 아름답다는 말로는 다 표현 못하는 무대였다. <꿈의 제인>에서 제인이 노래를 할 때처럼 게이힐의 무대는 많은 밤 폭발적이고 아름다우면서 애처롭기도 한 기운을 내뿜는다.

꿈의 제인

감독 조현훈

출연 이민지, 구교환, 이주영

개봉 2016 대한민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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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희동 야식포차
<당신자신과 당신의 것>

홍상수 감독이 관객에게 알려준 맛집이 도대체 몇 개나 될까. 영화가 끝나자마자 주인공들이 술을 마시던 곳에 찾아가 마시는 것이 나와 내 친구들의 홍상수 영화 보기. 원래 단골집이 나오면 반갑고 처음 보는 곳이 나오면 눈에 불을 켜고 보는 것이다. 홍상수 감독이 연남동 일대를 배경으로 영화를 찍는다는 소문이 났다. 소문은 눈 앞에서 실체로 바뀌었다. 연남동 한 술집 주인과 함께 촬영지를 물색하는 모습을 몇 번이나 보았다. 영화가 개봉하고 눈에 익은 술집과 카페가 하나 둘씩 나왔다. 알 만한 곳이었다. 그러다 야식포차가 나온다. 영수(김주혁)와 중행, 주현(서현정)이 파란 플라스틱 테이블에 앉아 막걸리와 해물파전을 시켜놓고 대화의 쳇바퀴를 돌린다. 중행 역을 맡은 김의성은 대사를 치면서도 참 맛있게 안주와 막걸리를 들이킨다. 이 장면은 6분간 계속된다. 어서 막걸리와 해물파전을 먹으라고 장려하는 것만 같다. 야식포차는 연희동 주민들도 잘 모르는 장소다. 대로변에 함정처럼 난 샛길의 막다른 곳에 있다. 아주머니 혼자 수십 가지 메뉴를 만들어 준다. 삼천 원짜리 국수는 아주 맛있지는 않지만 술을 다 마시고 꼭 한 그릇 먹게 된다. 홍상수 감독의 영화에서 인상 깊은 서울의 모습은 꼭 이렇게 어느 술집이 된다.     

당신자신과 당신의 것

감독 홍상수

출연 김주혁, 이유영, 김의성, 권해효, 유준상

개봉 2016 대한민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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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우리 용마랜드
<표적>

납치된 희주(조여정)는 폐놀이공원에 감금된다. 한참 손질하지 않은 것으로 보이는 낡은 회전목마는 불안함을 고조시킨다. 세트를 참 잘 만들었구나 싶지만, <표적>에 등장하는 장소는 실제로 운영을 멈춘 놀이공원 용마랜드다. 1983년 개장한 용마랜드는 2011년 완전히 문을 닫았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방치된 놀이기구들은 시간이 흘러 거대한 스튜디오로 변모했다. 잡지의 화보촬영이나 뮤직비디오 촬영지로 알려지면서 음악 팬이나 출사를 하는 개인이 기념 촬영을 한다. 입장료도 있다. 사람이 아무도 안 보여 우물쭈물하고 있으면 나이든 남성이 와 돈을 거둬간다. 은밀한 거래처럼 입장을 마치고 나면 멈춰버린 바이킹, 디스코 팡팡, 회전목마가 나타난다. 규모는 크지 않지만 있을 건 거의 있다. 막상 직접 보면 섬뜩한 느낌은 전혀 없다. 오히려 대담할 정도로 화려하게 꾸민 모습이 이제는 재현할 수 없는 귀한 감각처럼 보인다.

사진: 박의령
표적

감독 창감독

출연 류승룡, 유준상, 이진욱, 김성령, 조여정, 조은지

개봉 2014 대한민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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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현동 시범아파트
<친절한 금자씨>


<친절한 금자씨>는 장면 장면이 주옥 같은 영화지만, 끝날 무렵 제니(원예영)가 잠옷차림으로 눈 덮인 계단을 오르는 장면이 기억에 깊이 남아있다. 모든 일을 마치고 집으로 향하는 금자씨(이영애)를 마중하러 가는 제니는 무언가에 홀린 듯 맨발로 눈길을 걷는다. 회현동 시범아파트는 독특한 구조로 지어졌다. 중정이 있고 사방으로 아파트 건물이 서 있다. 그 공간들을 잇는 계단이 지그재그로 나 있다. 이 아파트는 많은 촬영의 배경이 되어왔다. 공포영화에 등장하는 스산한 집으로 나온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박찬욱 감독은 아주 짧지만 극적으로 이 공간을 활용했다. 낡은 구석구석을 활용하기보다 큰 그림으로 다뤘다. 회현동 시범아파트에는 여전히 사람이 살고 있으며 무단 촬영을 하지 말라는 경고문이 붙어 있다.

친절한 금자씨

감독 박찬욱

출연 이영애, 최민식

개봉 2005 대한민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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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산
<최악의 하루>


배우 지망생 은희(한예리)는 우연히 일본인 소설가 료헤이(이와세 료)를 만나고, 드라마에 출연 중인 남자친구 현오(권율)를 만나러 촬영지인 남산에 간다. 두 사람은 말다툼을 하고 은희는 혼자서 힘들게 산을 내려간다. 은희는 트위터에 한 마디를 중얼거리고 한 때 은희와 잠깐 만난 유부남 운철(이희준)은 그걸 보고 무작정 남산을 찾아온다. 남산 중턱에서 세 사람은 의도치 않은 삼자대면을 한다. <최악의 하루>의 촬영지는 8할이 남산이다. 여주인공 은희는 말그대로 남산에서 최악의 하루를 보낸다. 보고 있으면 내가 다 짜증이 나고 조마조마하다. 그런데도 남산은 푸르고 온화하다. 각자의 삶을 보내는 시민들의 모습이 조용히 흘러간다. 높은 굽을 신고 오르락 내리락 종종거리는 은희가 안쓰럽지만, 영화의 결말처럼 남산은 어쨌든 풍경으로 위안을 주는 곳임을 다시금 떠올리게 된다.

최악의 하루

감독 김종관

출연 한예리, 이와세 료, 권율

개봉 2016 대한민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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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현역 지하상가 다이소
<옥자>

봉준호는 서울을 장난스런 반어법으로 다룬다. <플란다스의 개>에서는 복도식 아파트, <괴물>에서는 한강처럼 가장 서울다운 곳을 배경으로 있을 수 없을 것 같은 일을 일으켰다. 이번에는 다이소를 골랐다. 시골에서 처음 서울로 올라온 미자(안서현)는 위협적인 고층빌딩과 부딪히고 겪은 적 없는 인파와 혼돈의 거리를 헤친다. 슈퍼돼지 옥자는 쫓기다 나지막한 지하상가로 뛰어든다. 육중한 몸집으로 행인들에게 피해를 입히려는 찰나 옥자는 몸을 틀어 다이소 매장을 시원하게 들이받는다. 소리와 움직임은 늘어지고 천천히 난투극이 벌어진다. 무지개색 우산은 훌륭한 방패가 되고, 값싼 식탁보는 나쁜 편의 시야를 방해하는 무기로 사용된다. 주방에 사무실 책상에 여행에 필요한 물건을 사려고 들락날락하던 곳, 살 게 없어도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시간을 죽이던 곳. 봉준호 감독은 많은 이의 생활권을 예쁜 전쟁터로 그렸다. 아이러니하게도 회현역 지하상가에는 다이소가 없다. '만든' 공간이다.

옥자

감독 봉준호

출연 틸다 스윈튼, 폴 다노, 안서현

개봉 2017 대한민국, 미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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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의령 / 에어서울 기내지 <유어서울>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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