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시민 케인>을 안 볼 수 있죠?"
"그러는 당신은 <사운드 오브 뮤직> 봤어요?"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와 브래드 피트, 마고 로비가 나눈 대화다.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와 브래드 피트는 <사운드 오브 뮤직>을 본 적이 없고, 마고 로비도 <시민 케인>을 안 봤다며 놀림을 당했다. '고전'이나 '명작'이라는 수식을 단 채 오래도록 칭송되는 영화들은 많지만, "그 영화 봤어?"라는 질문에 이들처럼 우물쭈물해 본 경험은 누구에게나 있을 것이다. 영화를 사랑하는 당신에게 묻는다. 혹시 당신에게도 안 봤다기엔 너무 많은 걸 알고 있고, 봤냐고 물으면 고개를 끄덕일 수 없는 영화들이 있는가? '솔직히 아직 안 본' 고전 혹은 명작들을 소개하는 '솔아안 시네마'로 안내한다.
* 영화 <개같은 날의 오후>의 내용이 포함돼 있습니다.
뉴스에선 '해방 이후 최고 가뭄', '폭염으로 인한 사망자 발생' 따위의 이야기가 흐르는 서울의 전경. 사람이 모인 곳마다 허용치를 넘는 땀과 열기에 주체할 수 없는 분노가 폭발하는 모습은 생리 현상에 가깝다. 얼음물에 발을 담그고 냉콩국수를 들이켜도 어림없는 더위다.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분명 대부분의 사람들에겐 '개 같은 날'들의 연속이었을 것이다.
욕설이 절로 뱉어지는 그런 날, 서울 변두리의 작은 아파트 단지에서는 예상치 못한 폭염처럼 갑작스러운 사건이 벌어진다. 선풍기며 에어컨을 '풀가동'하는 바람에 아파트 변압기가 터지고, 주민들은 정전 탓에 찜통으로 변한 집 밖으로 나와 아파트 광장의 평상에 모인다. 땀에 젖은 몸에 부채질을 하며 수박을 나눠 먹던 주민들은 충격적인 광경을 공유하게 된다. 멍투성이가 된 여자가 맨발로 아파트를 뛰쳐나오고 그 뒤를 따르는 남자가 여자를 마구잡이로 때리는 모습이었다.

영화 <개같은 날의 오후>는 동네 사람들을 아파트 광장에 모아 이 폭력 사건의 목격자로 삼기 전 각 가정들을 세밀히 비춘다. 날씨 특수에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냉콩국수집에서는 일을 놓아버린 남편(윤문식)과 어쩔 수 없이 배달에 나선 공주댁(임희숙)이 있다. 반면 술집 종업원 윤희(정선경)와 명화(이명희)는 숙취에 시달리다가 출근을 위해 집을 나서려 한다. 아파트 옥상에서는 이웃 에어컨 수리공과 불륜을 저지른 후 선베드를 깔아 놓고 태닝을 하던 여자와, 아들이 창문 밖으로 던져 버린 재봉틀을 끌어안고 슬퍼하는 여자가 마주친다. 좀처럼 입을 열지 않으며 이웃의 말에 그저 미소만 짓는 의문의 여성도 있다.
그리고 화장품 방문 판매 일을 하는 정희(하유미)는 사법고시 공부를 핑계로 도박을 일삼으며 한량 생활을 하는 남편의 의처증과 폭력에 시달리는 중이다. "사랑한다"라고 부르짖다가도 이불에 떨어진 짧은 머리카락을 보고는 다른 남자를 만난 게 아니냐며 혁대를 풀어 정희를 무자비하게 때린다. 제발 때리지 말라고 빌던 정희는 결국 엉망진창인 상태로 광장에 자신을 내던진다. 그건 일상에서 암묵적으로 용인되던 폭력이 방 안에서 밖으로 폭로당한 순간이자, 아파트 단지 내 여성 연대의 불꽃이 점화된 순간이었다.

도망쳐 나와서도 두들겨 맞는 정희를 본 주민들의 반응은 성별로 갈린다. 여성들은 일단 이 일방적 폭력을 말릴 의무를 남성들에게 넘긴다. 하지만 남성들은 남의 집 일에 상관하지 말라며 맞는 정희를 강 건너 불구경하듯 보고만 있을 따름이다. 결국 참지 못한 윤희가 때리는 남편에게 달려들고, 일격을 당한 그는 "걸레 같은 X"이라며 윤희에게까지 손을 댄다. 이에 분노 스위치가 켜진 그곳의 모든 여성들은 폭력 남편을 폭력으로 응징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의로운(?) 여성들의 남편은 윤희를 구하는 자신의 아내를 짐짝처럼 집으로 끌고 가려고 한다. 그들은 이 익숙한 형태의 폭력을 공유하는 공범이고, 더불어 방관자이자 용인자이기도 했던 탓이다. 싸움은 남성에게 분노한 여성과 여전히 그들을 소유물 정도로 취급하는 남성의 대결로 번진다. 머릿수가 한참 밀리는 남성들은 예상치 못한 여성들의 반발에 당황해 하릴없이 얻어맞는다. 이는 여성들이 자신의 아내가 되기 전부터 '사람'이며 '여성'으로 존재했다는 사실에 관심이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 사이 정희의 남편은 의식을 잃고 결국 병원에 이송되던 도중 사망한다. 가정 폭력이 패싸움으로, 끝내는 살인사건으로 커지자 경찰은 광장에 모인 여성 전원을 살인범으로 연행하려고 한다. 이에 여성들은 아파트 곳곳으로 흩어지고, 쫓기던 10명의 여성이 옥상에 몸을 숨긴다. 원체 이웃 간 왕래가 잦았던 덕에 서로 안면은 있었지만, 이제는 동지가 된 여성들이 자신의 이름과 직업을 소개하는 대목은 퍽 인상적이다. '양처' 혹은 '악처', '요조숙녀' 혹은 '걸레' 등 극단적인 몇 가지의 이미지로 분류되던 여성상은 이 작은 아파트의 옥상에서 부서진다. 대신에 착하지만 나쁜 여성, 피해자이면서 가해자인 여성, 투사이자 방관자인 여성들의 입체적 모습이 그려진다.
극 초반 아들에게 구박을 당하다가 부서진 재봉틀을 품고 갈 곳 없이 옥상에 올랐던 개성댁(김애라)이 별안간 여성 운동의 열사로 탈바꿈하는 장면 역시 그렇다. 설움을 이기지 못해 그만 투신을 하고 만 노인은 공교롭게도 옥상에서 남성 사회를 향한 최전선을 구축한 10명의 여성들의 서사를 입는다. 그리고 이 죽음을 통해 '개성댁'은 '김옥선 열사'라는 이름을 부여받고, 더 많은 지상의 여성들의 동력으로 화한다. <개같은 날의 오후>에서는 이전까지 남성 캐릭터만이 향유했던 입체성을 여성 캐릭터에게 허용함으로써 비로소 성 평등에 가까운 서사를 이룩한다. 그건 평등을 이야기할 때 종종 '여성' 앞에 붙곤 하는 '뭐든 될 수 있는', '뭐든 할 수 있는' 등의 희망적인 수식과 결을 같이 하지 않는다. 지금까지 남성이 자연스럽게 존재를 인정받아온 것처럼, 여성 역시 어떤 이미지가 아닌 그저 여성으로서 존재할 수 있음을 영화는 이야기한다. 그 다양한 여성 캐릭터는 '개같은 날의 오후'에 자신들을 뜨거운 옥상으로 끌어올린 사회를 향해 '때리지 말라'고 부르짖으며 연대하고, 반목하다가도 또다시 서로를 끌어안았다. 하지만 1994년 아파트 옥상에서 유독 여성들에게 쏟아졌던 폭염은 30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과하게 뜨겁다.
칼럼니스트 라효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