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시민 케인>을 안 볼 수 있죠?"
"그러는 당신은 <사운드 오브 뮤직> 봤어요?"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와 브래드 피트, 마고 로비가 나눈 대화다.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와 브래드 피트는 <사운드 오브 뮤직>을 본 적이 없고, 마고 로비도 <시민 케인>을 안 봤다며 놀림을 당했다. '고전'이나 '명작'이라는 수식을 단 채 오래도록 칭송되는 영화들은 많지만, "그 영화 봤어?"라는 질문에 이들처럼 우물쭈물해 본 경험은 누구에게나 있을 것이다. 영화를 사랑하는 당신에게 묻는다. 혹시 당신에게도 안 봤다기엔 너무 많은 걸 알고 있고, 봤냐고 물으면 고개를 끄덕일 수 없는 영화들이 있는가? '솔직히 아직 안 본' 고전 혹은 명작들을 소개하는 '솔아안 시네마'로 안내한다.
* 영화 <원초적 본능>의 내용이 포함돼 있습니다.
<원초적 본능>은 '섹스 심벌'로 기억되는 영화다. 제목을 고스란히 반영한 첫 장면은 이미 아랫배가 저릿해지는 자극으로 관객을 붙든다. 거칠게 흔들리는 침대 위, 여자는 남자를 내려다보며 그의 손을 프레임에 묶는다. 완벽히 지배당하는 감각이 최고의 쾌락으로 바뀌는 순간, 남자는 여자가 무자비하게 내리꽂은 얼음 송곳에 그대로 목숨을 잃는다. <원초적 본능>은 이 대목을 통해 보는 이들에게 세 가지 관람 방법을 제안한다. '에로틱'한 장면이 주는 쾌감을 즐길지, 기묘한 살인 사건을 따라가며 '스릴러'에 집중할 것인지, 아니면 영화를 '에로틱 스릴러'로서 온전히 느낄 것인지 말이다.
언급했듯 <원초적 본능>은 여전히 '섹시한 영화'로 회자된다. 파격적인 정사 장면, 그리고 주인공 캐서린 트러멜을 연기한 샤론 스톤의 관능은 작품의 에로틱한 부분만으로도 만족감을 주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이 영화의 가장 유명한 장면이자 패러디 소재로서 전 세계를 풍미한 취조실 시퀀스. 왕년의 록 스타를 살해한 용의자로 지목된 캐서린 트러멜(샤론 스톤)은 맨몸에 미니 드레스를 걸친 채 형사들 앞에 나타난다. 긴장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얼굴로 의자에 비스듬히 걸터앉은 트러멜이 다리를 꼴 때마다 남자 형사들의 눈동자는 어지럽게 흔들린다. 그건 스크린 바깥에서 이 모습을 보고 있는 관객의 상황도 마찬가지다. 일부러 느긋하게 다리를 움직이며 그 속을 보여 주는 트러멜의 행동을 얄미워 하면서도, 시선을 돌릴 재간은 없다.
이 장면을 비롯한 <원초적 본능>의 거의 모든 대목에서 트러멜의 행동과 육체는 객체화된 것처럼 보인다. 영화의 시점 자체도 그렇지만, 화면 안팎에서 트러멜은 그저 '보여지는' 존재다. 그러나 사실 이 이야기의 지배자는 의도적으로 객체의 늪으로 몸을 날려 결국 주체로 떠오른 트러멜이다. 자신을 바라보는 자들의 '원초적 본능'을 이용해 이성을 마비시키고, 끝내 관계의 주도권을 쥐고 마는 것이다. 그래서 취조실 시퀀스는 유혹보다 전복의 의미가 크지만, 일차적으로는 그 반대로 수용된다.
트러멜은 막대한 유산을 상속받은 인기 작가다. 남성과 여성을 모두 성적으로 유혹할 수 있는 매력과 지성의 소유자이며, 수많은 죽음의 중심에 있는 인물이기도 하다. 부모, 지도 교수, 권투선수였던 애인, 그리고 섹스 파트너였던 록 스타까지. 공교롭게도 그가 경험한 죽음의 내용은 거의 그대로 트러멜의 소설에 등장한다. 트러멜이 록 스타 살인 사건의 용의자로 지목된 건 죽은 자와 마지막으로 만난 사람인 탓도 있지만, 사건 이후 출간된 그의 소설이 '은퇴한 록스타가 애인에게 살해당한다'라는 내용이었기 때문이다. 누구라도 트러멜의 신작을 읽는다면, 작가가 실제 벌어진 사건을 차용했거나 사건의 진범이라고 의심할 것이다.
사건의 수사를 맡은 형사 닉 커렌(마이클 더글러스)과 거스 모란(조지 던자) 콤비는 도처에 널린 심증들로 트러멜을 붙잡으려 한다. 모든 정황이 트러멜을 범인이라고 외치는 듯하지만, 역으로 트러멜이 살인을 할 동기나 결정적 증거는 어디에도 없다. 커렌은 과거 총기 발사 실수로 무고한 시민을 죽게 한 적이 있는데, 트러멜은 커렌의 이 트라우마를 은근하게 파고들며 수사를 방해하는 심리전을 자행한다. 커렌은 끊임없이 말초신경을 자극하는 말과 행동으로 이성을 잃게 만드는 트러멜에게 놀아나며 오로지 감정적으로 움직이게 된다. 또, 이 과정에서 본능적으로 트러멜에게 이끌린다.
트러멜은 "나는 살인을 하지 않았다"라고 주장하면서도 "나쁜 여자에게 속다가 그로부터 죽임을 당하는 형사 이야기를 소설로 쓰겠다"라고 한다. 커렌은 이 같이 애매모호한 트러멜의 말에서 헤어 나올 수 없는 상태다. 혼란 속에서 커렌은 끊었던 담배를 다시 물고, 옛 애인을 찾아가 강간에 가까운 섹스를 하는 식으로 망가져 간다. 하지만 트러멜은 평온하게 새 소설을 집필한다. 트러멜이 범인임을 밝혀내지 못한다면 커렌의 사건은 끝나지 않을 테지만, 트러멜의 소설은 커렌을 죽임으로 간단히 끝난다. 커렌으로 하여금 이미 승자가 정해진 게임에 매달리게 하는 건 트러멜이 일깨운 '원초적 본능'이다. 트러멜을 향한 수사와 추적만큼 욕망과 사랑도 멈출 수 없었다.
그러는 사이 커렌과 사이가 좋지 않던 동료 마티 닐슨(다니엘 본 바겐), 트러멜의 동성 파트너 록시(레이라니 사렐)이 차례로 의문사를 당한다. 닐슨은 커렌의 심리 치료 기록을 트러멜에게 넘겼고, 이를 알게 된 커렌이 모두의 앞에서 닐슨과 다툰 직후 머리에 총을 맞아 사망한 채로 발견되자 커렌은 용의자 신분으로 전환되는 형국까지 치닫는다. 보는 이들의 입장에서는 이 모든 것을 트러멜이 꾸몄을 것이란 심증이 확실히 존재하지만, 실제로 트러멜이 그랬을 것이란 증거는 없다. 극 중에서 트러멜을 범인이라 믿는 모두와 관객들의 입장이 같은 것이다.
아직 사건을 포기하지 않은 커렌은 트러멜을 찾아가 그가 쓰고 있는 소설이 형사의 죽음으로 끝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한다. 그건 어떤 선포였다. 하지만 트러멜은 "누군가는 죽어야만 한다"라고 의미심장한 답변을 내놓는다. 그리고 소설을 완성한 트러멜은 이미 자신을 깊이 사랑하게 된 커렌에게 이별을 고한다. 커렌이 실의에 빠진 사이 혼자 사건을 조사하던 모란. 갑자기 살인 예고 같던 트러멜의 말을 떠올린 커렌은 본능적으로 모란이 위험해질 것을 감지한 듯 움직이지만, 이미 모란은 괴한에게 살해당한 상태였다. 콤비의 시체를 발견한 커렌 앞에 전 애인인 엘리자베스(진 트리플 혼)가 나타나자 커렌은 그를 모란의 살인범으로 오해한다. 잠깐의 대치 끝에 엘리자베스가 주머니에 손을 넣고, 그가 총을 꺼내려 한다고 생각한 커렌의 발포에 엘리자베스는 사망한다. 그리고 상황은 록 스타부터 닐슨, 모란의 죽음까지 전부 엘리자베스의 범행인 것처럼 꾸며져 있었다.
영화가 끝날 때까지 진범이 누구인지는 아무도 알 수 없다. 다만 마지막 장면, 커렌과 함께 누운 트러멜의 침대 밑에 뾰족하게 빛나는 얼음 송곳이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을 따름이다. 이 기묘한 해피엔딩을 바라보면서도 여전히 각자의 이성은 힘을 쓰지 못한다. 다만 모든 사건들이 누군가의 원초적 본능이 저지른 일임을 말초신경으로 짐작할 뿐이다. 끝까지 트러멜이 커렌에게 얼음 송곳을 쓰지 않았다면, 트러멜에게도 싹튼 사랑이 그의 원초적 본능을 억제했다면 그건 상상할 수 있는 가장 재미없는 결말이겠지만.
칼럼니스트 라효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