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하기의 스크린샷은 리사이즈 과정을 거친 이미지로 원본과 상이함을 미리 밝힙니다-편집자 주

지난해를 돌이켜보면, 크리스토퍼 놀란의 <오펜하이머>(2023)를 올해의 영화 중 하나로 꼽는데 이의를 제기할 분은 그리 많지 않으리라 짐작해봅니다. 비평의 입장에서 전 항상 놀란이 구조와 논리, 어트랙션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나 좀 더 감정적인 접근법으로 영화를 만든다면 보다 멋진 결과를 내지 않을까 내심 기대해왔는데, 놀란의 작품 중 처음으로 이 영화를 눈물을 흘리며 봤습니다. 형식적인 엄격함과 기교의 정밀함이 마침내 감정의 뿌리를 뒤흔드는 숭고의 경지에 도달한 영화였습니다.
다른 데에 빗대자면 <오펜하이머>는 천재를 시기하는 범재를 그린 <아마데우스>(1984)의 구도에 정치적인 긴장감을 깔고 벌어지는 <아라비아의 로렌스>(1962)의 과학자 주인공 버전처럼 보입니다. ‘메타(meta)의 영역을 보는 자가 왜 끝내 현실의 영역에서 패배할 수밖에 없는가?’라는 역사의 근원적이고 비극적인 아이러니, 시선의 엇갈림과 어긋남에 관한 영화이고, 스스로 세상의 주인공이라 여겼던 영웅이 자신의 성취로 인해 도리어 고통받고, 그마저 실은 운명의 부속품에 지나지 않았음을 깨달아가는 고색창연한 그리스 희곡의 현대판입니다. 놀란의 다음 영화가 얼마나 좋을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전 단언컨대 <오펜하이머>는 놀란의 필모그래피 전체를 통틀어 가장 인간적인 비전이자 위대한 영화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언젠가 <오펜하이머>의 고화질 물리매체가 발매되어 소장할 수 있게 되기를 바라왔고, 여러 달의 기다림 끝에 드디어 <오펜하이머> 4K UHD 블루레이가 선을 보였습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이 영화의 UHD는 작품의 품위에 걸맞은 특급의 레퍼런스 타이틀로, 스탠리 큐브릭 이래 영화계 최후의 군주와 같은 반열에 오른 놀란의 위상을 한껏 뽐내는 듯한 만듦새로 나왔습니다.

화질
<오펜하이머>는 <다크 나이트>(2008) 이래 극영화에 IMAX 촬영을 도입한 놀란의 작품 기조대로 IMAX 65mm 필름을 최대한 활용하되, 그 이외의 분량은 <덩케르크>(2017)와 <테넷>(2020)처럼 표준 65mm 필름을 사용했습니다. 이전 작품과 구별되는 특이점을 꼽자면 사상 처음으로 IMAX 65mm와 65mm 필름의 ‘흑백’ 촬영을 도입해 컬러와 혼용했다는 점. 70mm 촬영의 대형서사극 영화나 IMAX 포맷이 본격적으로 대두될 즈음에 흑백 필름 자체가 도태되어 생산된 역사가 없었기 때문에 제작진은 오로지 이 영화만을 위해 코닥(Kodak)과 포토켐(FotoKem)에서 개발한 IMAX 65mm와 65mm 흑백 필름을 특별 주문 생산했습니다. 때문에 <오펜하이머> 4K UHD 블루레이는 현용 최고의 필름 포맷으로 구현한 흑백영상이 어떠한 룩과 질감으로 다가오는지를 관찰할 수 있는 ‘유일’한 작품이라는 점에서 시청각적으로 매우 진귀한 경험을 선사합니다.


일단 <오펜하이머>는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IMAX 65mm와 표준 65mm 필름으로 촬영했고 시각효과 또한 아날로그 시절의 기술로 완성한 아날로그 작품입니다.(유학시절의 오펜하이머를 묘사하는 장면 극히 일부분의 CG 합성을 제외. 이 부분은 과거의 광학합성으로 처리하면 필연적으로 영상의 선예도가 떨어지는 부작용이 수반됨) 극장용 DCP와 4K UHD Blu-ray를 위한 디지털 마스터는 모든 아날로그 공정을 거친 마스터 인터포지티브(오리지널 네거티브에서 파생해 만들어진 고화질 포지티브) 필름을 8K 스캐닝하고, 그로부터 얻어진 데이터를 최종 4K DI로 마감해서 만들어졌습니다. 각 포맷의 차이(IMAX는 15퍼포레이션, 표준 65mm는 5퍼포레이션)에 따라 화면비가 1.78:1(= 현재 일반적인 텔레비전 화면의 전체를 꽉 채우는 16:9 비율)과 상하로 블랙바의 여백이 생기지만 2.35:1보다는 덜 잘리는 2.20:1(<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1968)나 <아라비아의 로렌스>(1962)와 같은 슈퍼 파나비전 70 비율)로 장면별 화면비가 변하는 점은 <덩케르크>와 <테넷>이 그랬던 바와 마찬가지입니다.


물리매체에 관한 리뷰를 작성하다보면 필름작의 경우는 (특히 고전영화일 때) ‘원본 소스의 상태를 감안했을 때 최선의 재현’이라는 식의 조건부 단서를 달면서 변명하듯 억지로 애써 긍정해야 하는 난감한 경우를 만나곤 하는데 <오펜하이머> UHD에 대해선 그와 같은 구차한 수사를 달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이 타이틀은 필름 촬영인가 디지털 촬영인가를 막론하고 현존하는 모든 물리매체 중 최상의 타이틀 왕좌를 차지해 마땅한 궁극의 레퍼런스 타이틀입니다. 원본 필름부터 현용 디지털 스캐너의 스캔 해상도 구현 한계인 8K마저 아득히 넘어간다는 IMAX 65mm와 표준 65mm 판형인데다, 연식을 먹고 열화와 손상을 입을 틈조차 주지 않은 싱싱한 상태에서 필름을 스캔한 (더군다나 아날로그 작업 방식에 대한 고집이 대단한 크리스토퍼 놀란의 작품답게 샤프니스 강조나 DNR 같은 인위적인 후처리가 철저히 배제된) 결과이다보니 필름 특유의 그레인도 35mm작의 거친 입자감과는 달리 파스텔 분말처럼 매우 조밀하고 세밀하게 펼쳐져, (클로즈업이 아닌, 카메라와 어느 정도 거리가 벌어진 숏에서도 피사체의 세부, 예를 들면 옷감의 결까지 식별될 정도의) 충격적인 수준으로 생동감 있는 디테일과 질감의 선명함이 필름 영상 특유의 자연스러움과 어우러지는 이상적인 영화적 룩을 완성해냅니다.


사용한 필름 판형의 거대함에 금방 스캐닝해서 디지털 마스터를 떠낸 최신작이라는 유리한 조건은 이 타이틀의 HDR 그레이딩이 갖는 특성과 맞물리며 그 장점이 극대화됩니다. 돌비비전이 수록되지 않았다는 걸 아쉬워할 유저분들도 있을지 모르지만 <오펜하이머> UHD의 HDR10은 평균 휘도 147니트, 최대 휘도는 186니트에 지나지 않습니다. 대부분 UHD 타이틀의 HDR 그레이딩이 구현휘도의 최대치를 1000니트로 잡고 평균을 낮게 가져가면서 광원의 밝기가 쨍한 부분은 톤매핑의 도움을 받아야 하는데 비해, 이 타이틀은 돌비비전이 지원되지 않는 보급형 모델의 디스플레이에서도 감독과 제작진의 의도에 충실한 화면의 대비감을 톤매핑의 도움 없이 기기의 순전한 성능만으로도 표현해낼 수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낮은 요구사양의 HDR 휘도는 바다에서 막 잡은 횟감 마냥 싱싱한 필름의 명암 다이나믹스가 거의 손상되지 않은 상태와도 맞물려 (필름 작품에 과도한 HDR 휘도를 먹일 시 발생하는) 일부 필름그레인의 컬러노이즈화라는 고질적 문제 또한 일체 보이지 않는 긍정적인 시너지를 일으킵니다.


인물의 행적에 집중하는 전기영화의 특성상 얻어지는 또 다른 장점도 있습니다. <덩케르크>는 비행기 기체에 설치한 카메라의 항공촬영, <테넷>은 역동적인 피사체의 액션에 따라 구사되는 핸드헬드의 특성상, 미세하게나마 촬영 방식에 따른 선예도의 차이가 드러나곤 했는데, <오펜하이머>의 경우는 전반적으로 정적인 앵글과 흔들림이 극도로 통제된 카메라 움직임이 대다수이다보니 그런 여지조차 주지도 않는다는 것. 또한 색감에 있어서도 칙칙하게 가라앉아있다는 평을 자주 듣는 놀란의 다른 작품들과 달리 컬러 분량에서 (옷감의 색상에서 트리니티 실험의 폭발이 일으킨 화염에 이르기까지) 원색의 강렬한 발색감을 꽤나 어필한데다가 흑백과의 교차편집으로 대비를 이루다보니 색의 선명한 표현에 있어서도 UHD 매체 특유의 광색역화 그레이딩이 제 역할을 발휘하는 편입니다. 그래서인가 이제까지 IMAX 촬영분이 포함된 놀란 작품의 UHD들은 대체로 레퍼런스급이라는 찬사를 받아왔지만, 그중에서도 <오펜하이머> UHD는 프레임 전체의 디테일한 요소들을 보다 세세히 감상하기 용이하다는 점에서 체감상 퀄리티가 이전 작들보다 반발 더 앞서나가는 느낌까지 줍니다.


180분의 긴 상영시간이 주는 부담감이 적지 않았을 것임에도 100기가 트리플 레이어 디스크의 용량을 가능한 본편에 최대로 할애해 준 덕분에 할리우드 영화 UHD 평균인 50mbps대를 훨씬 상회하는 평균 비트레이트 61.41mbps로, 그 풍부함에 힘입은 빈틈없는 계조 표현이 앞서 언급한 화질상의 뛰어난 점들을 탄탄히 뒷받침하는 점까지 보면, 물리매체를 준비하면서 최선의 경험이 되도록 열과 성을 다하고 있다는 놀란 감독의 발언이 진심이었음을 실감케 됩니다. 굳이 애써서 흠을 잡자면 <인터스텔라>(2014) 이래 쭉 유지되고 있는 (심지어 다른 동네인 조던 필의 <놉>(2022)에서마저 기어이 관철하고야 만) 호이트 반 호이테마 촬영감독 특유의 화면 전반에 감도는 은근한 옐로우 톤, 그리고 낮은 휘도로 인해 화려함이 억제된 HDR 효과 정도일 텐데, 그 역시 차분히 절제되면서 발전감 있는 진한 영상을 추구한 제작진의 의도를 충실히 반영했다는 명분 앞에선 그저 무색할 따름. 한 마디로 정리하자면 <오펜하이머> UHD는 필름작과 디지털작의 구분을 막론하고 물리매체가 구현해낼 수 있는 화질의 정점을 이룩한 궁극의 타이틀입니다. 이토록 칭찬 일색으로 일관할 수밖에 없는 물리매체를 만나는 건 실로 드뭅니다.
음질
크리스토퍼 놀란 작품의 사운드 포맷은 돌비 애트모스나 DTS:X와 같은 차세대 이머시브 사운드의 시대가 도래했음에도 여전히 5.1채널에 머물러있었고, <오펜하이머> UHD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여기에는 놀란 감독 나름의 이유가 있는데, 대부분의 극장 사운드 설비가 여전히 5.1채널 서라운드에 머물러있는 현실에서 가급적 환경의 차이를 타지 않고 균등한 퀄리티의 음향을 관객에게 들려줄 수 있어야 한다는 의도 때문입니다. 이는 마치 <아이즈 와이드 셧>(1999) 이전까지 스탠리 큐브릭이 체계적인 조사를 통해 각지의 극장 환경을 체크해보고, 태반이 모노 아니면 2채널인 점을 감안해 보급이 더디던 5.1 서라운드보다는 완성도 높은 모노 음향을 만드는 데 주력했던 것과 발상이 통하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섣부른 얼리어답터가 되기보다는 기존의 틀 안에서 최선의 퀄리티를 추구하는, 다소 보수적이지만 안정적인 방향성의 사운드 설계라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런데 막상 들어보면 <오펜하이머> UHD의 DTS-HD MA 5.1채널은 이머시브 사운드가 아니라는 그런 아쉬움 따위는 잊게 할 만큼 무서운 박력을 발휘합니다. 놀란 영화에서 자주 기술적 결함으로 지적되곤 하던 음향의 강렬함 때문에 묻혀 다소 퇴색하는 대사의 전달력도 대사 중심으로 풀어져나가는 전기 영화의 특성을 고려해 잘 살려낸데다, 비록 천정에 할당되는 사운드는 없지만 그걸 상쇄하고도 남을 다층적인 소리의 디테일한 면면과 방향감, 시종일관 울리는 서브우퍼에서의 중저음이 주는 포위감이 5.1채널 서라운드의 숙달된 핸들링으로 공간감을 형성하며 감상자의 사방을 포위합니다. 특히 인상적인 대목을 꼽으라면 트리니티 실험 장면에서 신경을 긁어대듯 위협적으로 울리는 현악기의 음이 폭발의 순간 완전히 멎어버리고 정적에 휩싸이다 이윽고 충격파와 함께 폭발음의 묵직함이 몰아치는 세 단계의 음향 변화, 성공 이후 청중 앞에 선 오펜하이머의 연설에서 나무 발판 위에 발을 굴리는 청충들의 환호성과 발소리가 편집 리듬에 발맞춰 점점 빨라지며 조여드는 듯 압박해오는 걸 꼽겠습니다. 영상 못지않은 분명한 레퍼런스급 사운드입니다.
서플먼트
<오펜하이머> UHD의 주요 서플먼트는 크게 네 가지로 나뉩니다. 제작 과정에 대해 감독을 비롯한 제작진과 배우들의 이야기를 현장의 모습에 곁들여 보여주는 ‘The Story of Our Time: The Making of OPPENHEIMER’(1시간 12분 25초), 호이트 반 호이테마 촬영감독을 중심으로 영상 기술에 관련한 내용을 풀어나가는 (특히 70mm 포맷에서 처음인 흑백필름의 제작과 현상에 관한 부분이 인상적인) ‘Innovations in Film: 65mm Black and White Film in OPPENHEIMER’(8분 21초), 영화의 원작인 ‘아메리칸 프로메테우스’의 공동저자 중 한 사람인 카이버드, <인터스텔라>의 과학 자문역이기도 했던 킵손 교수 등, 관련 분야 게스트를 모셔와 감독과 함께 오펜하이머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는 ‘MEET THE PRESS Q&A Panel: OPPENHEIMER’(34분 46초), 카이 버드와 그 외 역사학자, 과학자들이 참여해 오펜하이머의 삶과 원자폭탄 발명 전후의 사정을 다루는 다큐멘터리 ‘To End All War: Oppenheimer & the Atomic Bomb’(1시간 27분 18초)입니다.


<메멘토>(2000) Blu-ray를 제외하면 단 한 번도 본편 코멘터리를 넣은 적이 없는 놀란 특유의 고집은 여전하지만, 별도의 Blu-ray 디스크를 오직 부가영상에만 할애한 것이 낭비가 아니라는 걸 입증하듯 그 양부터 엄청납니다. 형식적으로라도 들어가기 마련인 예고편을 제외해도 3시간 반 가까이 육박하는 분량에 영화제작 과정 전반과 실존인물에 관한 흥미진진한 내용을 충실하게 수록해서, 이 서플먼트 디스크야말로 또 다른 본편이 아닐까 싶을 정도. 과거 3~4시간 넘기는 건 기본처럼 하던 리들리 스콧과 데이빗 핀처, 피터 잭슨의 Blu-ray 서플먼트를 연상케 할 만큼 양과 질 모두를 만족시키는 이 풍성한 구성은 요식행위처럼 짧은 현장 스케치 영상과 삭제 장면 몇몇을 싣는 정도에 그치는 요즘 물리매체의 경향과는 매우 대조적입니다. 그런 만큼 영화제작 단계에서부터 차후에 있을 물리매체까지 고려한 제작진의 준비성과 열의를 실감케 하는 대목이 아닐 수 없습니다.


맺으며
<오펜하이머> UHD를 끝으로 유니버설은 한국을 포함한 아시아 국가의 물리매체 시장에서 철수할 것을 선언했습니다. 이제 한국에서 물리매체를 발매하는 할리우드 메이저 스튜디오는 워너브라더스와 파라마운트, 그리고 소니 픽처스(컬럼비아) 정도만 남은 셈이어서, 물리매체의 황혼이 한 걸음 더 성큼 다가왔음을 실감케 합니다. 그럼에도 유종(有終)의 미(美)라고나 할까, 화질과 음질, 그리고 서플먼트 구성 모두 완벽에 가까운 ‘트리플 크라운’(Triple Crown) 타이틀을 남기고 간다는 것만큼은 그나마 다행인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 작품을 열렬히 사랑하는 관객, 그리고 온전히 영화를 소장하기 바라는 물리매체 유저라면 책장에 하나쯤 구비해두고, 스트리밍 서비스와 격을 달리하는 물리매체의 면면을 손님에게 선보일 시연용 타이틀로 <오펜하이머> UHD를 써먹어도 괜찮겠다고 생각해봅니다. 그럼 여러분, 진정한 물리매체의 왕을 맞이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