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침이슬’과 ‘상록수’의 가수 김민기가 1991년 3월 15일 서울 대학로에 세운 ‘학전’은 당대 청년문화를 상징하는 라이브의 메카였다. 포크 싱어송라이터이자 공연연출가로서 학전 대표 김민기가 대학로에 남긴 발자취는 상상을 초월한다. 특히 4천 회 이상 공연될 정도로 학전을 대표하는 레전드 뮤지컬 <지하철 1호선>이 배출한, 여기서 유독 인상적인 연기를 펼치며 ‘독수리 5인방’이라 불렸던 설경구, 황정민, 김윤석, 장현성, 조승우는 이후 한국 영화계를 든든히 떠받치는 배우들이 됐다.
그런데 지난 연말 학전이 33년 만의 폐관을 예고해 큰 충격을 안겨줬다. 김민기 대표의 음반 계약금으로 시작돼 그의 저작권료까지 쏟아내 운영을 지속해왔지만, 계속되는 경영난과 개인적인 건강 문제까지 겹치면서 폐관에 이를 수밖에 없었던 것. 폐관 결정 소식에 가수 박학기를 비롯해 학전이 배출하고 학전을 아꼈던 수많은 문화예술인들이 발 벗고 나서, 서로 다른 게스트가 직접 무대에 오르는 ‘학전 어게인’ 프로젝트가 화려하게 꾸려졌다. 2월 28일부터 3월 14일까지 공연을 이어가는 프로젝트로, 이미 전 회차 매진된 상태다.
학전 어게인을 진두지휘하고 있는 공연 총감독, 가수 박학기를 만났다. 이른바 학전의 ‘개관 멤버’로 시작한 그는 ‘향기로운 추억’, ‘자꾸 서성이게 돼’, ‘비타민’ 등으로 한때 아이돌급 인기를 누린 가수였다. 최근에는 매주 목요일 밤 10시, 유튜브 ‘박학기 TV’에서 ‘박학기의 향기로운 추억’이라는 이름의 라이브를 150회 이상 진행해오고 있기도 하다. 오는 3월 방영되는 신작 TV 시리즈의 OST에도 참여했다. “무려 11년 만에 발표하는 신곡이라 떨린다”는 끝인사를 전한 그가 인터뷰 내내 강조한 것은, ‘포스트 학전’이라는 의미심장한 화두였다.

먼저 ‘학전 어게인 콘서트’ 프로젝트를 시작하게 된 소회에 대해 듣고 싶다.
지난해 가졌던 ‘학전 어게인 콘서트’프로젝트 기자회견에 정말 많은 관심을 가져주시고, 수많은 뮤지션들이 참여 의사를 밝혀 주시고, 더 나아가 바로 매진되는 것을 보면서 마음이 놓였다. 모두가 김민기라는 사람에 대해 ‘빚’을 지고 있다고 말했다. 인기 프로스포츠 선수가 은퇴식을 가지는 것처럼, 학전의 역사를 일단락하며 김민기 대표님에게도 그런 은퇴식을 열어드리고 박수쳐 드려야 하는 거 아니냐고 모두 공감한 것 같다. 그나저나 개인적으로는 엄청 허전할 것 같다. 예전처럼 자주 가는 건 아니라도 어쩌다 대학로 학전 극장에 가면, 마치 큰 나무 그늘 아래 있는 것처럼 왠지 마음이 편안했다. 그러다 보니 학전이 없어진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 역사적이고 사회적인 의미를 떠나 개인적으로는 그런 허전한 감정이 더 컸던 것 같다.
얘기하신 것처럼 이번 프로젝트를 준비하며 “우리는 김민기에게 마음의 빚이 있다”라는 얘기가 인상적이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듣고 싶다.
김민기는 ‘한국의 밥 딜런’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우리는 아카이빙이 약해서 그런지, 밥 딜런은 다 알아도 음악하는 친구들 중 김민기를 모르는 사람도 많다. 김민기의 ‘아침이슬’은 단순한 가요가 아니라 저항의 상징이었고, 우리 안의 진실과 진리에 대한 갈망을 깨운 청년문화의 좌표였다. 내 이야기와 감성을 표현하는 싱어송라이터의 표본과도 같은 사람이다. ‘태양은 묘지 위에 붉게 타오르고’라는 ‘아침이슬’ 가사는 지금 들어도 심장이 뛴다. 지금 젊은 세대는 이해 못 할 수도 있지만, 정치적 이유로 그런 노래가 금지곡이 되고 경찰에 끌려가 고초를 겪던 시절이었다. ‘상록수’라는 노래는 또 어떤가. 당시 일하시던 공장에서 결혼식을 제때 올릴 수도 없었던 노동자들의 합동결혼식을 위해 지은 노래다. 당시 이미 합법적 활동이 불가능해져 버린 시기였기에 김민기가 아닌 친구 김아영의 이름을 빌려 노랫말을 쓰고 작곡했다. 한때 유명했던 대한민국 공익광고에서 골프선수 박세리씨 영상에 겹치는 ‘깨치고 나아가 끝내 이기리라’라는 노랫말이, 노무현 전 대통령이 사랑한 노래로 유명한 그 ‘상록수’가 김민기의 ‘상록수’라는 걸 더 널리 알리고 싶은 거다. ‘봉우리’라는 노래도 떠오른다. 1984년 LA 올림픽 당시 메달을 딴 선수가 아닐, 예선 탈락해서 일찌감치 선수촌을 떠나야 하는 선수들을 위해 만든 위로와 희망의 노래였다. 음악가로는 최초로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밥 딜런만큼이나 문학적이고 역사적인 노래를 만드셨다. 우리는 지금보다 더 김민기를 추앙해야 한다.


당신은 이른바 ‘학전의 개관 멤버’였다. 학전 시절의 박학기가 궁금하다.
나의 전성기였다.(웃음) 그때는 앨범을 낸 가수도 TV에 나오는 가수와 언더그라운드 가수로 나뉘어 있었다. 난 둘 다이긴 했지만 아무래도 후자가 좋았다. 음반도 잘되고 라이브도 많이 했다. 아무튼 그때 김민기라는 사람이 학전을 개관한다고 했을 때, 거기 함께 한다는 것 자체가 말할 수 없는 영광이었다. 그전까지 먼발치에서 인사 정도만 드리는 사이였다가, 말씀하신 그 ‘개관 멤버’라는 뭔가 공식적으로 정해진 그런 건 아니었지만, 그와 더 가까워질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영광이었다. 당시 나 같은 싱어송라이터들에게 어떻게든 닮고 싶고 영향받고 싶고 뭐라도 흉내 내고 싶은 사람이 바로 그였다.
tvN <유 퀴즈 온 더 블럭>에 이정은, 장현성 배우와 함께 출연해 들려준 얘기가 흥미롭고 감동적이었다. 학전을 대표하는 뮤지컬 <지하철 1호선>으로 돈을 많이 벌어서 <개똥이>라는 큰 공연을 제작했는데 망해버렸고, 당시 김민기 대표가 배우 개런티를 주기 위해 자신의 전 재산이나 다름없는 아파트 한 채를 팔려고 했다는 얘기였다. 집을 팔아서라도 개런티를 주겠다는 대표와 못 받겠다는 배우들의 실랑이에 대해 들으며, 김민기라는 사람에 대해 궁금해졌다.
당시 대학로에서 ‘계약서’라는 개념 자체가 없던 시절, 김민기 형은 모든 출연자와 계약서를 작성하고 권리를 보장해주셨다. 무대에 올리는 공연의 메시지나 의미만큼, 그렇게 운영됐던 곳이다. 사실 김민기 형은 학전이 문 닫는다는 사실 자체도 알리고 싶어하지 않았다. 뭐든 편하게 하는 것도 싫어하시고 주목받는 것도 싫어하신다. 대신 자신이 다 책임져야 한다고 생각하신다. 작년에 “학기야, 문 닫아야 할 거 같다”고 연락하셨다. 어떻게든 몇 푼 안 되는 저작권료로 버텨서 막고 끌어오려고 했는데, 건강상 문제로 도저히 안 될 것 같다고 하셨다. 얘기하신 그 프로그램에서도 언급됐던 아파트, 이번에도 일산에 있는 그 아파트를 팔아서 직원들 퇴직금을 주려고 하시는 거다. 그렇게 남은 돈으로 시골에 가시겠다는 얘기였다. 그래서 내가 “형, 그건 형 빚이 아니에요”라고 말씀드렸다. 지난 몇 년간 코로나19 팬데믹도 있었지만, 민기 형이 무슨 방만한 운영과 경영을 해서 그런 게 아니고 손실 볼 걸 알면서 꾸준히 어린이 연극과 뮤지컬을 해오셨다. 돈 안 되는 일이지만 해야 할 일이라고 하셨다. 솔직히 <지하철 1호선>만 계속했으면 건물 몇 채 올리셨을 거다. 하지만 그걸 어느 시점에 그만두고 어린이 연극에 몰두하셨다. 그 이후 학전을 함께 했던 동료들의 목표는 ‘김민기 형이 절대 집 못 팔게 하는 것’이 됐다.(웃음) 다행히 그렇게 모인 돈으로 직원들의 퇴직금을 비롯해 다른 비용을 충당하면서, 그 집을 팔지 않으셔도 될 것 같다.

동료들의 그런 도움이 정말 고마웠을 것 같다.
감사하게도 「한겨레」 서정민 기자가 학전 폐관에 관한 첫 기사를 작성했고, 소식이 순식간에 퍼져나갔다. 나도 여기저기 퍼날랐다. 싱어송라이터들이 모인 ‘싱송생송’이라는 톡방이 있는데 내가 기사를 공유하자마자 최백호 선배님부터 윤종신, 강산에, 윤도현, 한경록 등 ‘무조건 돕겠다’는 분위기가 형성됐다. 오히려 그 요청을 다 받아들일 수 없는 수준으로 뜻이 모였다. 특히 ‘시인과 촌장’은 하덕규, 함춘호 씨가 했던 팀인데 지난 24년 동안 한 번도 함께하지 않았다가, 이번을 계기로 완전체 모습으로 공연을 하게 됐으니 정말 감동적인 일이다.
학전 어게인 콘서트가 바로 매진되어버리면서 팬들의 아쉬움이 컸다. 개인적으로 문의도 많을 것 같다. 혹시 내부적으로 연장공연이라든지, 공연장에 올 수 없는 팬들을 위한 계획은 없나.
가장 아쉽지만 어쩔 수 없는 부분이 그거다. 모 멀티플렉스 체인에서 공연을 실시간으로 현장 중계하고 싶다는 제안도 했고 연장 공연 논의도 있었지만, 현재 정해진 그대로 가려고 한다. 이미 150석 소극장의 치열한 티케팅이 끝났고, 그렇게 모여서 서로의 시선과 숨소리를 느끼면서 보는 것이 학전의 정신이기도 하다. 언론과 방송에서 프레스석 문의도 하고 다큐멘터리로 기록하고 싶다는 요청도 많다. 물론 정말 정말 감사한 일이지만, 우리가 자체적으로도 다 기록할 예정이다. 공연에 방해될 수 있기에 다른 촬영 인원이 들어가기도 힘들다. 다시 한번 말씀드리지만, 현재 정해진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하지 않을 예정이고 운영진 모두 심사숙고 끝에 내린 결정이니, 이해해주셨으면 좋겠다. 다시 한번 진심으로 감사드린다.
주성철 씨네플레이 편집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