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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한국 대표 사진작가 구본창의 영화 포스터

씨네플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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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본창의 항해〉

얼마 전 서울시립미술관에서 사진작가 구본창의 전시 <구본창의 항해>가 성황리에 막을 내렸다. 공립 미술관에서 처음 선보이는 한국 사진작가의 개인전이라는 의미에 걸맞게 구본창의 작업들을 총망라한 전시에 수많은 관객이 다녀갔다. 전시를 맞아 구본창 작가를 만나 과거 진행한 영화 포스터 작업을 두고 긴 이야기를 나눴다.


〈깊고 푸른 밤〉 사운드트랙
〈깊고 푸른 밤〉 사운드트랙

개인적으로 영화 관련 작업에서 작가님의 이름을 처음 인식한 게 <깊고 푸른 밤>(1985) 사운드트랙이었습니다. 당시로선 이례적으로 디자이너도 크레딧에 이름이 표기돼 있었죠. <깊고 푸른 밤> 사운드트랙 디자인은 어떻게 맡게 되신 건가요? 배창호 감독님 고등학교 대학교 동창이라는 건 잘 알려진 사실이고, 한 인터뷰에서는 그의 입봉작 <꼬방동네 사람들>(1982) 현장에도 갔다는 언급도 하셨던데.

독일 유학하던 중 1982년에 한 번 서울에 왔습니다. 배창호 감독이 때마침 동대문시장 근처에서 <꼬방동네 사람들> 촬영한다고 해서 구경 삼아 따라갔어요. 스틸 사진을 찍어야겠다 생각하고 간 게 아니라, 잠깐 쉴 때 안성기 씨 얼굴만 하나 찍었어요. 1985년 3월 한국에 돌아왔는데, 5월에 배창호 감독이 <깊고 푸른 밤> 사운드트랙이 나오는데 디자인해 줄 수 있겠냐고 해서 하게 된 거예요. 이미 영화 스틸은 미국에서 다 찍어왔고 포스터도 다 나온 상황이어서, 제가 찍지 않은 배우들 사진으로 아이디어를 내서 우울한 분위기에 맞춰 디자인해 본 거죠.

〈꼬방동네 사람들〉 촬영 중 안성기
〈꼬방동네 사람들〉 촬영 중 안성기
〈꼬방동네 사람들〉 촬영 중 안성기
〈꼬방동네 사람들〉 촬영 중 안성기

장미희 안성기 두 배우를 배치한 구도나 눈을 가린 그래픽 요소가 그야말로 쇼크였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온전히 사람을 보여주려고 했지, 현대적으로 콜라주 해서 음반 커버를 만든 경우는 전무했을 거예요. 난 독일에서 콜라주 같은 기법을 많이 봤으니 자연스럽게 자르게 됐죠. 뒷면은 주제가를 부른 방미 씨와 풍경 사진이 있는데 이건 다 내가 찍은 걸 잘라서 연결해서 재미있게 만들어본 거예요. <깊고 푸른 밤> 사운드트랙을 인연으로 음반 프로듀서인 서판석 씨를 알게 돼서 당시 전속가수였던 '방미 씨와 주사위'라는 그룹 등의 LP를 디자인하기도 했습니다.

〈기쁜 우리 젊은 날〉 포스터
〈기쁜 우리 젊은 날〉 포스터

 

처음 작업한 영화 포스터는 배창호 감독님의 <기쁜 우리 젊은 날>(1987)입니다. <기쁜 우리 젊은 날>이 첫 영화였던 황신혜 배우의 아름다움이 시선을 사로잡죠.

당시만 해도 스틸 사진 기사라고 해서 영화사 소속으로 촬영 현장에 따라가서 찍는 분이 있었고, 다른 작가를 기용하는 일은 거의 없었어요. 스틸 사진을 골라서 포스터 만드는 게 일반적인 경우였죠. 배 감독은 아무래도 내가 스틸 기사와는 뭔가 다르게 찍을 거라고 상상한 것 같고, 나도 경제적으로 어려우니까 내 작업하면서 돈도 좀 벌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서 하게 됐습니다. 스튜디오 없이 여의도 단칸방에 살았던 시절이고 아무래도 자연광이 편하니 연세대학교 교정에서 황신혜 씨와 안성기 씨가 걸어가는 걸 찍어봤어요. 그 필름 보면 재미있어요. 걸어다니기엔 바깥이 꽤 추워서 실내로 들어가서 찍어보자 하고 그때도 홍대 앞은 유명했는지 그 근처 카페로 갔어요. 황신혜 씨 단독샷을 거기서 찍은 거예요. 어떻게 부드럽게 연출할 수 있나 고민하다가 맨 얼굴을 그냥 찍는 것보다는 스카프를 하면 어떨까 싶어서 독일에서 촬영할 때 썼던 스카프를 챙겨서 그걸 썼어요. 아무래도 뻣뻣이 카메라 쳐다보는 것보다 스카프를 살짝 두르고 그러다 보면 본인도 좀 릴렉스가 되잖아요.

〈기쁜 우리 젊은 날〉 황신혜
〈기쁜 우리 젊은 날〉 황신혜

 

워낙 이목구비가 뚜렷한 배우라 오히려 스카프로 살짝 가려진 모습이 더 임팩트가 컸달까요.

난 항상 사람을 부드럽게 찍는 편이에요. 내 앞에서는 모델이 순하고 착해 보인다고 이야기합니다. 황신혜 씨도 아름답게 나왔지요? 세피아를 좋아해서 그 톤으로 했고요. 그날만 찍은 게 아니라 나중에 덕수궁 가서 석조전 난간에서 찍기도 했어요. 이명세 감독이 조연출로 따라와서 같이 찍은 사진도 있고. (구본창 작가는 1989년 이명세 감독이 태흥영화사에서 입봉한 <개그맨>의 포스터 사진도 작업한 바 있다) 끝에 커브 들어간 폰트도 내가 디자인 한 겁니다.

<기쁜 우리 젊은 날>로 이태원 대표의 태흥영화사(이하 태흥)와 처음 연을 맺기도 했죠.

이태원 회장님이 황신혜 씨 사진을 보더니 너무 이쁘게 나왔다면서 “앞으로 우리 영화는 구 작가가 다 해라” 하신 거예요. 한국영화 포스터는 항상 글씨도 커야 하고 벗는 장면이 나와야 한다고 강조하던 시기였는데 그 포스터가 나온 다음부터 내 사진에 대한 신임이 많이 생겼어요. 이태원 회장님은 “구 선생이 감독 하면 내가 언제든지 입봉시켜준다”면서 나한테 굉장히 호의적이셨고요. 본인의 삶을 회상하는 기사에 영화 포스터의 중요성을 나를 통해서 처음 깨달았다고 쓰셔서 감사했죠.

〈업〉 포스터
〈업〉 포스터

 

<구본창의 항해> 전시에서도 선보인 이두용 감독님의 <업>(1988) 포스터도 아주 인상적입니다. 결과물도 결과물인데, 흥행이 잘 된 작품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전시에 비중 있게 내놓은 걸 봐도 제대로 각 잡고 만든 작업이라는 걸 알 수 있습니다.

신경 많이 썼죠. 아직 개인 스튜디오도 없었고 빌려주는 스튜디오도 없었을 때라 그때 살던 여의도의 작은 아파트에서 그 유명한 배우들(강수연 남궁원 김영철)이 와서 찍은 거예요. 안 그래도 얼마 전에 남궁원 씨 돌아가셨는데 그때 생각이 났습니다. 정말 좁은 공간에서 옹기종기 앉아서 찍었어요. 내가 거의 감독 하듯이 남궁원 씨 상의를 벗겨서 저런 연출을 시켰죠. 강수연 씨는 <미미와 철수의 청춘 스케치>(1987) 때 처음 봤는데, 한겨울에 <업> 촬영 중에 얼음 깬 데 들어가는 장면을 이를 악물고 해내는 걸 보면서 깊은 인상을 받았습니다. 그 독한 오기를 봐서 포스터를 잘 찍어줘야겠다는 생각이 있었어요. 나는 또 개인 작업을 많이 하고 있을 때인데도 시나리오 다 읽어보고 캐릭터 3명의 관계는 어떤가, 여배우의 표정을 어떻게 잡아낼까, 이런 걸 많이 고민했습니다.

〈업〉 포스터
〈업〉 포스터
〈업〉 포스터
〈업〉 포스터

 

메인 포스터 외에도 여러 버전이 있는데 각각 다른 색깔 배경의 ‘업業’자 안에 배우들의 얼굴을 담은 게 특히 놀라워요.

원래 태흥에 디자이너가 따로 있었는데 나한테 혼자 하고 싶은 대로 해봐라 기회를 줘서 디자인도 전부 직접 했습니다. ‘업’자는 담배로 종이를 태워서 만든 거예요. 영화 제목인 ‘업’에 어울리게 배경 컬러도 전통적인 한국 색을 하고 싶어서 분홍 노랑 파랑으로 했고. 이번 전시도 시간의 흔적 같은 게 많잖아요. 시계를 태운 작품도 있는데, 그건 90년대 넘어서 하긴 했지만 저 때부터 태우는 작업에 관심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담뱃재, 과거와 현재… 타서 없어지는 느낌이 좋아서 글자도 저렇게 하게 됐어요. 영화의 주제가 특히 나한테 잘 와닿았던 것 같아요.

〈경마장 가는 길〉 포스터
〈경마장 가는 길〉 포스터

개인적으로 장선우 감독의 <경마장 가는 길>(1991)을 좋아해요. 강수연 배우 부고를 들었을 때 가장 먼저 떠오른 게 <경마장 가는 길> 포스터 속 얼굴이었습니다.

<경마장 가는 길>은 지금도 센세이션이었다고 많이들 얘기해요. 포즈나 구도는 내가 연출해서 사진 자체는 마음에 들지만 포스터에 손을 넣어서 망쳤어요. 손 사진은 내 작품인데 그걸 보더니 태흥 디자이너가 그걸 꼭 넣고 싶다고 주장하는 바람에 넣게 된 거예요. 포스터 사진은 남산 드라마센터 세트장과 내 작업실에서 촬영했습니다. 패션지 「바자」에서 ‘타임리스 뷰티(Timeless Beauty)’ 화보 요청이 왔고, 그때 강수연 씨를 찍게 되었습니다. 강수연 씨 돌아가시고 동생분이 언니가 그 옷 입고 찍은 사진을 너무 좋아했다며 그때 찍은 걸 찾아달라고 해서 급하게 보는데 마침 슬픈 얼굴이 딱 하나 있어서 그걸 영정 사진을 쓰게 됐어요. 나이 차이가 있어서 개인적으로 많이 만나지는 않았어도 친근감이 있어서 내 앞에서는 얼굴 표정을 솔직하게 보여줄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재작년 1월에 김수철 씨, 강수연 씨 해서 서너 명 같이 임권택 감독님을 찾아뵌 적이 있는데, 그해 5월에 그렇게 됐어요. 너무 안타깝죠.

〈장군의 아들〉 시리즈 포스터
〈장군의 아들〉 시리즈 포스터

임권택 감독님의 작품은 <아제 아제 바라아제>(1989)부터 맡으신 거죠? <장군의 아들> 3부작, <서편제>(1993), <태백산맥>(1994), <축제>(1996), <노는 계집 창>(1997), <춘향뎐>(2000), 그리고 <취화선>(2002)까지 열 작품이나 함께 하셨어요.

<아제 아제 바라아제>부터 시작은 했어도 그때는 제대로 실력 발휘를 못했어요. 처음이라 뭐 정말 푸대접이었죠. 스태프들이 산으로 장비 들고 올라가는 걸 보면서 촬영 현장에 따라갔는데, 거기 셔터 소리 내는 게 누구냐고 조감독한테 지적받은 적도 있습니다. 임권택 감독님도 포스터의 중요성 같은 건 전혀 신경 안 쓰고 그냥 누가 따라왔나 보다 하셨을 겁니다. 결국 <아제 아제 바라아제> 포스터는 스틸 사진가가 찍은 걸 썼고, 감독님이 <장군의 아들> 시리즈부터 현장에서 배우들과 반나절 정도 찍으라고 시간을 주셨습니다. 그렇게 점점 신임을 얻으면서 잘하게 됐죠. <태백산맥>은 스토리를 읽어보니 불이 나는 장면이 있으면 좋겠다 싶었어요. 그래서 촬영 현장에서 불을 피워놓고 찍었는데, 감독님이 영화도 그렇게 설정을 바꾸시더라고요. 정작 본 포스터에는 불 피운 건 안 쓰였지만. <축제> 포스터는 원래 슬픈 얼굴들을 담으려고 했는데 거기서 배우 한 분이 갑자기 웃기는 농담을 해서 활짝 웃는 순간이 찍혔어요. 나중에 어떤 컷으로 고를까 하다가 슬픈 분위기의 장례식이지만 역설적으로 웃는 모습이 좋겠다 싶어서 그 이미지를 쓰게 되었습니다.

〈축제〉 포스터
〈축제〉 포스터
〈태백산맥〉 포스터
〈태백산맥〉 포스터

<태백산맥> 포스터는 흑백으로 찍은 건가요? 여기서도 인물들이 온전히 프레임에 담겨 있지 않은데, 우선 다 나오게 찍어놓고 나중에 자른 건가요?

카메라는 항상 컬러와 흑백 2대 들고 다녔어요. 풀로 찍은 것도 있고, 저렇게 잘린 채로 찍은 것도 있었을 거예요. 클로즈업하듯이 서서히 들어가면서 찍은 것들 중에서 마지막에 저걸 고른 거죠. 전체를 다 안 보여줬을 때 신비스러운 맛도 나고 화면이 더 확대돼 보이는 장점이 있어요. <태백산맥> 포스터는 안성기 씨가 부각돼 보이기도 하고.

〈태백산맥〉 포스터
〈태백산맥〉 포스터
〈서편제〉 포스터
〈서편제〉 포스터

 

영화 포스터는 배우를 제대로 보여줘야 하기 마련인데 오히려 그 얼굴을 가린다는 게 그 자체로 결단이라 더 재미있게 느껴져요.

<서편제>의 포스터를 찍을 때도 마음대로 하라고 따로 시간을 주셔서 그 당시 드라마센터 초가집에서 촬영했습니다. 그런데 오정해 씨가 너무 이쁘게 꾸미고 왔어요. <서편제>와는 어울리지 않는 이미지였습니다. 안되겠다 싶어서 머리 풀고 화장 지우고 창 중에서 가장 슬픈 대목을 불러보라고 시켜서 창을 부르는 상황을 촬영했습니다. 그래서 옷매무새를 어떻게 하냐, 무슨 색깔로 옷을 입히냐, 하는 상황 판단이 굉장히 중요하죠.

〈젊은 남자〉 포스터
〈젊은 남자〉 포스터

 

어릴 적 본 <젊은 남자>(1994) 포스터 때문에 30년이 지난 지금도 이정재 씨를 보면 ‘젊은 남자’라는 수식이 떠올라요. 

배창호 감독이 이정재를 제임스 딘처럼 찍어달라고 했어요. 당시 이정재 씨는 신인 배우니까 20대 같은 랄랄라 하는 기분뿐이니 솔직히 제임스 딘 같은 깊은 맛은 나지 않았지만, 웃통을 벗고 찍은 컷들은 위에서 조명이 떨어지고 입체감이 생겨 근사하게 나왔습니다. <젊은 남자> 포스터는 ‘킴벌리안’이라는 디자인팀이 따로 있었어요. 서은석 아트디렉터였는데, 현장에 도착해서 어떻게 찍어야 하나같이 고민하다가 이정재 씨 웃통을 벗겨야 한다고 맞장구를 쳤어요. 당시만 해도 남자 배우가 벗고 자기 몸 자랑하는 시기가 아니었죠. 남자 배우가 벗은 것도 거의 최초일 거예요. 그 후로 서서히 남자 배우들의 바디에 대한 관심이 많이 커졌잖아요. 비디오 가게 앞에 붙어 있던 포스터 다 뜯어가서 없다는 농담도 하고 그랬어요.

〈젊은 남자〉 2022년 재개봉  포스터
〈젊은 남자〉 2022년 재개봉 포스터
〈미지왕〉 포스터
〈미지왕〉 포스터

 

<미지왕>(1996)도 작가님이 하신 줄은 몰랐어요. 영화도 영화고, 우선 주연배우인 조상구 씨 얼굴이 작가님이 선호하는 스타일이 아닌 것 같아요.

 

내 스타일의 영화는 아니죠. 코믹한 영화는 잘 안 어울립니다. 나를 두고 “사람을 백자처럼 찍고, 백자를 사람처럼 찍는다”고 평론한 게 있습니다. 그게 맞아요. 어딘가 슬프고 애환이 어린 얼굴, 담백하고 서서히 읽히는 얼굴을 좋아합니다. <미지왕>은 영화 자체가 가관인데, 그래도 일이니까 얼떨결에 찍긴 했어요. 아무래도 이야기가 나와 잘 어울려야 더 몰입을 하는 것 같아요. <업>, <서편제>, <태백산맥>은 스토리를 읽어보면 이걸 이렇게 표현하면 좋겠다 떠오르고 배우에 대한 내 상상이 더 발휘된 작품입니다. 그렇게 몰입하면 그 사람의 표정, 상황 연출도 더 잘 풀려요.

보통 포스터 촬영은 영화 최종본을 보기 전에 진행하는 건가요? 

항상 영화 촬영 중간쯤이었습니다. 나도 시간이 없지만 가능하면 촬영 현장에 나갔다가 상황 봐서 찍고. 아무래도 하얀 스튜디오 와서 배경지 내리고 찍는 것보다는 촬영장 한 귀퉁이더라도 바로 그날 찍었을 때가 배우들도 몰입이 잘 돼서 제일 자연스럽기는 해요. 오형근 작가는 완전히 반대로 세트에서 만들어내는 걸 좋아할 거고.

〈인터뷰〉 심은하
〈인터뷰〉 심은하

 

태흥 작품이나 배창호 감독님 영화가 아닌데 포스터 작업한 건 심은하·이정재 주연의 <인터뷰>(2000)가 처음이죠?

나도 너무 바빠져서 지방 촬영까지 따라다니기 어렵게 됐고 슬슬 태흥 작품을 거의 안 할 때라서 한번 받아준 것 같아요. 그런데 <인터뷰>는 처음엔 몰랐는데 영화사에서 나하고 강영호 씨 두 사람한테 포스터 사진을 맡긴 겁니다. 강영호 씨는 의자를 수십 개 놓고 연출을 많이 해서 찍었고, 나는 전혀 모른 채 단출하게 얼굴로만 승부했어요. 결국 포스터는 강영호 씨 것이 채택되고, 강영호 씨도 본인 포스터가 채택되었다고 한동안 좋아했지요. 얼굴만 부각시킨 내 사진은 포스터로 사용되지는 않았지만 개인적으로 아주 좋아하는 작업입니다.

〈인터뷰〉 이정재
〈인터뷰〉 이정재
〈밀애〉 포스터
〈밀애〉 포스터

 

<밀애>(2002)도 에로틱한 무드가 잘 표현됐습니다. 김윤진 배우의 살결의 톤이 적당히 끈적하고, 얼굴이 거의 가려진 이종원 배우의 직각으로 떨어진 팔도 독특해요.

김윤진 씨가 은근히 끈적하게 표정도 리얼하게 잡았죠. 이종원 씨는 티피컬한 이미지가 있어서 대신 김윤진 씨를 부각시키고 싶었습니다. 사실 벗은 게 그리 많지도 않은데 서로의 깊은 맛이 나죠. 프레임을 잡을 때 화면에 정리가 되도록 팔도 그렇게 했어요. 당시엔 한국영화도 포스터 디자인 수준이 좋아져서 글씨와 화면 구성을 잘한 것 같습니다.

〈죽어도 좋아〉 포스터
〈죽어도 좋아〉 포스터

<밀애>와 같은 해에 개봉한 <죽어도 좋아>(2002)는 어떤가요? 비전문 배우랑 작업한 건 처음이었을 텐데.

직업배우도 아닌 분들이라 고민이 많았어요. 원래는 스튜디오 근처 공원에서 찍으려고 했어요. 벤치에 두 분을 앉혀 놓고 분위기 연출해보는데 한 바퀴를 돌아도 마음에 안 드는 겁니다. 그래서 우선 스튜디오로 들어와서 또 고민하다가 불현듯 외국 분들 오시면 깔아주려고 뒀던 아주 옛날 스타일의 이불이 떠올라서 시도를 해보았죠. 이불이 주는 느낌이 재미있잖아요. 처음엔 뻣뻣하던 그분들도 옛날 이불을 두르고 있으니 자연스러워진 거예요. 나도 굉장히 좋아하는 사진 중 하나예요. 코믹한 영화는 잘 안 맞아도 <죽어도 좋아>는 잘 풀렸어요. 이불이 없었다면 어떻게 해결했을까. 그래서 순발력이 있어야 합니다..

〈취화선〉 최민식
〈취화선〉 최민식

 

<취화선>(2002)이 태흥과의 마지막 작품입니다. 

<취화선>도 원래 시나리오에는 지붕에 올라간 장면이 없었어요. 내가 읽어보니까 이렇게 술 먹고 망나니짓을 한다면 달밤에 지붕 위에 올라가서 막걸리라도 한잔해야 하는 거 아니냐며 최민식 배우에게 지붕에 올라가 달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실제 영화에도 그런 설정이 나오게 됐죠. 아쉬운 건 내가 몇 커트 촬영하다가 갑자기 맹장염으로 서울로 급히 이송됐어요. 지붕에 최민식 씨를 올라가게 한 것은 내 아이디어였지만 포스터 사진은 결국 태흥에서 당시 스틸 사진을 많이 찍던 작가의 사진을 사용하였습니다. 내 사진은 극장용 스틸로만 썼고.

〈취화선〉 최민식
〈취화선〉 최민식
〈시〉 포스터
〈시〉 포스터

 

2002년 이후 작업한 영화 포스터는 <댄서의 순정>(2005), <마이 파더>(2007), <시>(2010), <종이꽃>(2019) 이렇게 네 작품인데요. 아무래도 <시>가 가장 인상적입니다.

내 개인 작업을 워낙 많이 했으니 2002년 이후에는 영화 포스터는 잘 안 하게 됐어요. <시>는 제자인 다른 작가가 촬영했지만 영화사에서 다른 느낌의 사진을 원한다고 연락이 왔습니다. 당시에도 몸이 불편하셨는지는 모르겠지만, 남편 백건우 씨가 옆에서 계속 거들었어요. 그때도 급하게 잡힌 촬영이라 어떻게 찍을지 고민하다가 장미꽃을 들고 있는 포즈도 해봤는데… 내가 기준이 있어요. 이제까지 스스로 쌓아온 어떤 감각으로 이 정도면 사람들한테 호소력을 갖겠다 기준이 있고, 거기까지 내가 계속 여러 상황을 연출하는 거죠. 이 느낌을 뽑았구나 싶은 걸 찍어야 안심하고 그만하는데 그땐 성에 덜 차더라고요. 그래서 바깥에 나가 창가에서 얼굴만 찍어보자고 했고, 그게 딱 들어맞은 거예요. <시> 포스터 사진도 언젠가 다른 전시에서 꼭 보여주고 싶은 것 중 하나죠.

〈종이꽃〉 포스터
〈종이꽃〉 포스터

 

처음 영화와 연을 맺은 작품을 <꼬방동네 사람들>, <깊고 푸른 밤>, <기쁜 우리 젊은 날> 어느 것으로 놓아도 작가님의 영화 커리어 시작점엔 안성기 배우가 있고, 현재로선 <종이꽃>이 마지막 작업이니 그 끝에도 안성기 배우가 있는 셈입니다.

<종이꽃>은 당시 미로비전의 채희승 대표가 나와 포스터 작업을 하고 싶다고 부탁해와서 하게 됐습니다. 여러 작품을 함께 한 안성기 씨가 주연이고 지금 전시장에 있는 ‘지화(紙花)’ 연작도 했으니 꼭 해달라는 거예요. 영화에서도 안성기 씨가 관 속에 꽃을 장식하는 장의사로 나옵니다. 저희는 워낙 인연이 많죠. 인간적으로도 참 좋은 분이에요. 처음부터 끝까지 사람을 대하는 태도가 변치 않아요. 신인 사진작가가 와도 잘 대해주고. 비슷한 연배라 친근감도 있고, 내 전시에도 많이 찾아와서 서로 응원했는데 요즘 아프시다고 해서 전시 소식은 전하지 않았습니다.

〈취화선〉 포스터 촬영 현장에서 구본창 작가
〈취화선〉 포스터 촬영 현장에서 구본창 작가

 

영화 포스터는 작가님의 작업 가운데 어떤 의미로 남아 있나요?

 

무엇보다 내가 여러 사람과 작업한 게 대중이 즐겨 볼 수 있는 포스터가 되는 것이 재미있었습니다. 독일은 연극이나 영화 포스터가 너무 멋진데, 우리나라에서는 그렇게 멋진 포스터를 보고 자라지 않았기 때문에, 한국에도 이런 작업으로 대중이 즐거워하면 좋겠다 싶었어요. 그래서 돈을 버는 건 둘째 치고 그런 역할을 하면 좋겠다고 꿈꿨는데 배창호 감독 덕에 영화 쪽에 발을 딛게 된 거죠. 우리나라에 차가 많아지고 교통 체증이 심해지면서 지방에 다니는 걸 싫어했어요. 가면 보기 싫은 게 너무 많으니까 잘 안 다녔어요. 그런데 임권택 감독님 영화 작업으로 지방에 다니면서 한국의 풍광, 문화, 역사, 사회 이런 걸 익힐 수 있어서 참 좋았어요. 그 경험이 내 개인 작업 속 한국적인 것에 대해 다시 생각하는 기회가 분명 됐을 겁니다. 그래서 감사하게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