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는 영원하다고 하지만, 그래도 극장에서 개봉했을 때 많은 관객을 만난 영화들이 보통 오래 살아남는다. 특히 '천만 관객 돌파' 타이틀이 붙는 순간 영화의 생명력은 곱절이 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데 영화관 이후에도 영화 생명 연장의 꿈은 이어진다. 몇몇 영화들은 극장이 아닌, TV나 인터넷으로 여타 영화보다 길게 사랑받기도 한다. 인터넷에서 이른바 '비공식 천만영화'라고 일컫는 한국영화들의 실제 성적을 살펴보겠다.
해바라기 (2006)

이 '비공식 천만영화'라는 타이틀의 상징, 어쩌면 이런 단어를 탄생시킨 원조 중 하나인 <해바라기>. 제목 '해바라기'보다 "오태식이 돌아왔구나", "나다 이 **꺄" 같은 특정 장면의 대사로 더 유명하다. 사실 유명한 것에 비해 대다수는 영화의 스토리도 잘 모르지 않을까 싶긴 하다. 그래도 <해바라기>는 명장면 하나로 유행을 타면서 몇 년째 끊임없이 대중의 입에 오르내렸고 '비공식 천만영화'라는 귀한 타이틀을 얻었다. 최근 한 영화 채널에서 무료 공개를 했는데 영상 제목 또한 '유튜브 비공식 천만 영화'라고 명시했다.

<해바라기>는 살인으로 수감됐다가 막 출소한 한 남자와 그를 가족으로 받아들여준 여성의 이야기를 그린다. 오태식(김래원)은 출소 후 양덕자(김해숙)의 집으로 향한다. 덕자는 태식이 죽인 도필의 어머니인데, 자신의 아들을 죽게 만든 태식을 여러 차례 면회해 따듯하게 대해준다. 내일이 없던 것처럼 살던 태식도 덕자의 마음에 출소 후엔 제대로 살겠다고 마음 먹는다. 덕자의 딸 희주(허이재)는 태식이 영 못마땅하지만 그와 티격태격하며 친남매처럼 의지하게 된다. 그러나 덕자와 그의 식당 '해바라기'를 재개발의 걸림돌로 여긴 조판수(김병옥)와 지역 깡패들은 덕자 가족을 괴롭히기 시작한다.


오래된 영화이고, 클라이맥스가 가장 유명한 작품이니 '스포일러'가 무슨 소용일까 싶지만 스토리는 여기까지만 전 한다. 이 영화를 이렇게 유명하게 만든 건 이 스토리 뒤에 나오는 오라클 나이트클럽 장면이다. 분노한 오태식이 조판수 일행을 (글자 그대로) 때려잡는 이 장면에서 김래원의 감정연기("꼭 그렇게 다 가져가야만↘ 속이 후련했냐↗")와 오태식의 성격을 보여주는 대사("병진이 형, 형은 나가⋯ 나가, 뒤지기 싫으면"), 그리고 악한들의 치졸함("이건 기회야, 형님들한테 깊은 인상을 남겨주는 거야")까지 희대의 시너지를 낸다. 이 장면의 파급력은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는데, 정작 개봉 당시 150만 관객을 돌파하는 데 그쳤다. 구체적인 제작비를 공개하지 않았지만 당시 기사에서 "깊은 불황"이라고 언급한 것을 보면 그렇게 좋은 성적은 아니었던 듯하다. 그래도 당시 손익분기점을 달성했다고 하고 이 영화를 기점으로 '병진이형' 지대한 배우의 인생이 꽃 피었으니 여러 모로 이상적인 발자취를 남긴 건 사실이다.



바람 (2009)

<해바라기>에 이은 '비공식 천만영화' no.2 <바람>. <해바라기>처럼 어느 순간 유행을 타 유명해진 케이스다. 2009년 개봉한 <바람>은 개봉 당시 그렇게 화제작은 아녔다. 화제작이라고 할 수 없는 게 제작비 8억짜리 독립영화였기 때문이다. 주연배우 중 황정음이 그나마 인지도가 있었으나 그 또한 스크린 데뷔나 다름 없어서 영화제 소식을 찾아보는 관객들이나 눈여겨보는 작품에 가까웠다.

<바람>은 고등학생 시절 '서클'에 열중했던 짱구(정우)의 이야기다. 부산상업고등학교를 다니는 짱구는 '간지나는' 학창 시절을 위해 불법써클 '몬스터'에 가입하게 된다. 학교 안의 약육강식, 짱구는 그것에 이끌려 여러 사건사고를 치고 만다. 형 누나와 달리 자꾸만 엇나가는 짱구. 자신이 상상한 학창시절이 아니라고 스스로 느끼면서도 짱구는 계속 서클 생활을 이어간다. 그러다 아버지와 갈등을 빚게 돼 아버지가 쓰러지며 짱구는 회의감에 생활을 고쳐나간다.


요즘 말로 하면 '일진물'인 <바람>이 유독 인기를 끈 이유는 현실적인 묘사와 차진 사투리 연기 때문이다. 정우가 연기한 짱구의 연기도 기막히지만 누리꾼의 눈길을 사로잡은 건 "그라믄 안 돼~"라고 훈계하는 허씨(양기원). 살짝 겉늙은 외형과 어른처럼 훈계하는 말투, 실은 고등학생이란 갭모에(?)가 부산 사투리와 만나 최고의 시너지를 냈다. 당시 한참 붐이었던 SNS 플랫폼 '페이스북'에서 <바람> 명장면은 인기 있는 콘텐츠였고, 유튜브에도 '영화 바람'을 치면 100만뷰를 넘은 13년 전 영상이 존재하니 인터넷 커뮤니티가 단단해지는 시점에 힘을 받은 영화라 할 수 있다. 개봉 당시 10만 관객을 돌파했는데 손익분기점은 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그렇지만 이후 재평가 받으며 지금도 쏠쏠하게 인기를 모으는 콘텐츠가 됐으니 영화의 운명도 인생처럼 참 알 수 없구나 생각한다.

박화영 (2018)

앞선 두 영화가 '체감상' 비공식 천만영화라면, <박화영>은 나름의 근거가 있는 비공식 천만영화다. 모 유튜버가 공개한 영화 소개 영상이 1천만뷰를 넘었기 때문(2024년 4월 기준 1311만뷰). 그래서 두 작품에 비하면 그렇게 오래된 영화가 아니고 호불호가 굉장히 갈리는 영화임에도 빠르게 비공식 천만영화 타이틀을 획득했다.

2018년 7월 개봉한 <박화영>은 가출 청소년을 돌보는 박화영(김가희)이 주인공이다. 스스로를 '엄마'라고 칭하며 가출 청소년들에게 숙식까지 다 내주고 있지만, 사실은 그 또한 보호자 없는 미성년자이다. 그렇게 애들을 돌보며 스스로를 치켜세우고 있지만 그의 주변 아이들은 그를 호구 취급한다. 기획사 연습생이자 화영의 친구 은미정(강민아)은 화영을 엄마라고 부르며 따르는 척 교묘하게 이용한다. 화영은 미정을 위해 미정의 남자친구 강영재(이재균)에게서 도망치게 도와준다. 하지만 영재는 화영과 미정을 어떻게든 찾아내기 위해 안간힘을 쓰면서도 또 다른 가출 청소년 윤세진(이유미)과 관계를 맺는다.


비공식 천만영화라는 명성에도 <박화영>은 누구에게 쉽게 추천할 수 있는 분류의 영화가 아니다. 가출청소년들을 그린 영화가 더러 있지만, 이 영화만큼 극사실적인 묘사로 반향을 일으킨 영화는 드물다. 대부분의 영화들이 힘든 현실에서 빠져나오려는 당사자의 노력이나, 반대로 그런 상황에 남은 사람 간의 유대 등을 그리는 것에 비해 <박화영>은 안전장치가 없기에 누구보다 자신의 생존만을 우선시하는 가출 청소년들의 서바이벌을 노골적으로 그렸다. 거기에 남에게 인정받는 데서 위안을 얻는, 그렇기에 스스로마저 속이는 기만적인 박화영과 주변 인물 모두 그렇게 호감상은 아니어서 '가출 청소년'이란 소재를 동정이나 감화를 유발하는 드라마로 소비하지 않는다. 현실적으로 구성한 탓에 호불호가 갈릴 수밖에 없었지만, 이를 감안한 영화의 뚝심이 빛났다. 개봉 당시 관객 수는 5,981명. 굉장히 적은 수 같지만 스크린수가 최고 16개였다는 점을 고려하면 5천 명을 넘은 것부터 상당히 주목받았다는 증거이다. 독립영화에 청소년 관람불가, 거기에 16개 스크린이라는 조건에서 5천 명이라니, 비공식 천만영화라는 타이틀만큼 엄청난 성과다. 이후 세진을 주인공으로 한 <어른들은 몰라요>로 가출 청소년들의 이야기는 이어졌지만, 아쉽게도 <박화영>만큼의 파급력은 내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