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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정의 씬드로잉] 인간은 ‘실재가 된 가짜’에 더 흥분한다! 〈크래시〉

성찬얼기자
〈크래시〉
〈크래시〉

 

영국의 소설가 제임스 G. 발라드는 기이하고 괴팍한 소설들로 유명하다. SF작가로도 알려졌지만, 우주선이나 외계인 등이 등장하고 로봇이나 AI가 활개치는 정통 SF와는 많이 다르다. 그는 ‘근미래’를 배경으로 인간과 테크놀로지, 그리고 자연의 변화에 따른 삶의 폭력적인 변형 등을 주로 다뤘다. 한국에선 일부 마니아 말고는 독자층이 적다. 그래도 2010년대 이후 웬만한 작품들은 다수 번역됐다.


휴대전화도 컴퓨터도 없는 과거의 미래

 

해외에서 제임스 발라드의 열혈 독자들은 ‘발라드리언’이라 불린다. 그중 대표적인 인물이 영화감독 데이비드 크로넨버그다. 그의 필모그래피 전체를 곰곰 따져 보면 제임스 발라드가 주로 다룬 주제들과 깊이 연관돼 있음을 금세 확인할 수 있다. 테크놀로지의 발전에 따른 인간의 몸과 의식의 변형, 세계에 대한 묵시록적이고 차가운 통찰, 인간과 자연이 맞이하게 될 어두운 미래 등이 요지라 할 수 있다. 그중, <크래시>(1996)는 크로넨버그가 제임스 발라드의 문제작을 그대로 영상에 옮긴 작품이다.

〈크래시〉
〈크래시〉

 

앞서 ‘근미래’라는 단어를 썼다. 말 그대로 ‘가까운 미래’다. 제임스 발라드가 원작 소설 『크래시』를 처음 발표한 건 1973년이었다. 50년이 막 넘었다. 소설이 쓰일 당시 ‘근미래’라 하면 1980~90년대 정도였을 것이나, 지금 시점으로는 2~30년 전 과거로 역전된다. 영화로 제작되어 개봉한 건 1996년이니 약 20년 전이다. 당시 기준으론 딱 지금 정도로 설정해도 큰 무리가 없다. 하지만 영화에선 스마트폰이나 컴퓨터 등이 등장하지 않는다. 주인공들은 휴대전화조차 들고 다니지 않는다. 소설이 쓰이던 시점을 ‘바로, 지금’으로 환원한 것이라 볼 수 있다. 이 영화가 어떤 기계적 첨단도 다루지 않는다는 반증일 수도 있다. 다만, 첨단을 넘어선 인간의 기기묘묘한 극점을 첨단적으로 묘파할 뿐이다.

 

방송국 PD인 제임스 발라드(소설과 영화 공히 원작자 이름을 그대로 따왔다. 제임스 스페이더)와 아내 캐서린(데보라 웅거)은 괴이한 부부다. 둘은 상대의 ‘외도’를 통해 성감을 자극받는다. 굳이 ‘외도’라 표현할 필요도 없을 정도로 제임스와 캐서린의 성생활은 전면적이고 적극적이다. 둘은 자신이 다른 파트너와 교합하던 상황을 속삭이며 서로를 애무한다. 초반부터 대놓고 드러나는 정황이 이러하다. 오프닝은 더 야릇하다. 비행기들이 들어찬 격납고에서 캐서린이 한 남자(이 인물이 ‘본’이라는 건 곧 드러난다)와 성교하는 장면. 육감적이고 아슬아슬하나, 어딘지 차갑고 매몰차다는 느낌을 준다. 몸에서 살짝 저릿한 전류가 흐르는 듯한 느낌을 받게 된다면 종국엔 이 영화에 말려(?)들 수도 있다.

〈크래시〉
〈크래시〉

 

발라드 부부의 또 다른 특징은 자동차, 특히 사고로 인해 파괴되고 망가진 자동차에 매혹된다는 사실이다. 그들에겐 그 ‘충돌’ 자체가 격한 오르가슴이고 찢기고 부서진 쇳덩어리들의 잔해와 파편들이 애무 대상이다. 그리고 본(엘리어스 코티어스)이라는 인물. 그는 속도와 파괴를 통해 인간의 성적 에너지를 극대화하려는 ‘실험’에 몰두하는 자다. 그는 자동차 사고로 사망했던 제임스 딘과 제인 맨스필드가 실제로 경험했던 속도와 죽음의 순간을 재현하는 퍼포먼스를 연출하기도 한다. 모두 죽음과 기계, 육체와 성적 에너지의 상관관계에 관한 연구다. 본과 발라드 부부가 만나게 되면서 영화는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나는 당신이 딴 사람과 자는 게 좋아

 

발라드 부부와 본이 만나게 되는 계기 역시 사고와 섹스다. 발라드는 영화 초반에 여의사 헬렌(홀리 헌터)이 몰던 자동차와 충돌해 병원에 입원하게 된다. 그리고 결국 헬렌과 친해지고 (두 말할 것도 없이?) 헬렌과 섹스한다. 헬렌은 본이 수장으로 있는 서클의 회원이다. 그 서클에서 본은 우두머리이자 교주이자 이론적 지주(?)나 다름없다. 발라드 부부는 본에게 강력하게 빨려든다. 그 서클은 파괴된 자동차뿐 아니라 그로 인해 다치거나 불구가 된 인간의 상처에도 민감하게 반응한다. 사고로 생긴 상대방의 흉터에 집착하는 것은 물론, 반신불수가 되어 온몸에 보형물을 두른 여인(로잔나 아퀘트가 연기한 가브리엘) 역시 전면적인 페티시의 대상이 된다. 가브리엘과 발라드의 정사 장면은 한국 개봉 당시 통편집됐었다.

 

소설이 발표됐을 때에도, 영화가 개봉됐을 때에도 극심한 논란이 일었다. 역겹고 비틀리고 왜곡된 성 관념으로 인간을 모욕하는 작품이라는 악평도 드셌다. 결국 엽기적인 포르노그래피에 불과하지 않겠냐는 비난인 것인데, 영화화되기 직전 제임스 발라드는 이런 발언을 했다.

 

"나는 『크래시』 도처에서 자동차를 하나의 성적 이미지로써 현대 사회의 삶에 대한 총체적 은유로 사용하였다. 따라서 이 소설은 성적 내용과는 별도로 꽤나 정치적 역할을 수행한다. 그래도 나는 여전히 『크래시』가 테크놀로지를 근간으로 한 최초의 포르노그래피 소설이라 여기고 싶다. 어떻게 보면, 포르노그래피는 가장 옥죄고 무자비한 방식으로 인간이 서로가 서로를 어떻게 이용하고 착취하는지를 다룬 가장 정치적 형태의 소설이기 때문이다.” 

- 『크래시』 (제임스 발라드, 김미정 옮김, 그책, 2011) ‘들어가는 말’에서


원작자 본인의 진술이 이 정도면 소설의 의도와 목적은 보다 확연하게 알 수 있다. 첫 출간 당시 『크래시』는 ‘영화화 불가능’이라는 평가가 내려질 만큼 난해하고 낯선 작품이었다. 글을 통해 읽는 것만으로도 종잡을 수 없는 상황과 행동들이 가득한데, 어떻게 그걸 영화라는 시각 매체로 옮겨올 수 있을 것이냐는 판단이었을 거다. 하지만, 데이비드 크로넨버그는 과연 그다운 방식으로 원작 자체가 지니고 있는 육중하고 첨예한 디테일들을 정밀하게 세공했다. 30년이 다 되어가는 작품이지만, 화면 어느 구석도 유치하거나 촌스럽다는 느낌을 주지 않는다. 특수효과나 과잉된 SF적인 표현 등이 제한되었기에 역설적으로 가능한 일이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무엇보다 신선(?)하고 여전히 문제적인 건 이 영화가 다루고 있는 주제이다.


‘현피’는 없다! 그리고 섹스도 없다!!

〈크래시〉
〈크래시〉

 

기계와 인간의 조합, 가상세계와 현실 세계의 분리 등은 이제 새삼스러울 것도 없는 내용들이다. 전 세계의 실상이 온 사방으로 실시간 전파를 타고 있는 상황에서 굳이 누군가를 직접 대면하거나 교감하는 것도 불필요한 일처럼 여겨지게 된 것도 사실이다. 예전엔 손발을 써야 했던 업무를 안방 침대에 드러누워 손가락만 까닥거려도 간단히 처리되는 게 요즘 일상이다. 그럴수록 사람의 직접적인 체온이나 개별적 특성들은 사회적으로든 개인적으로든 거치적거리는, 이를테면 쓸데없는 ‘충돌’ 요소로 여겨지게 된다.

 

어떤 이의 고통이나 상처도 그러하다. 커다란 사고나 전쟁 등도 이제는 실재이자 가상이다. 그렇기에 그것에 공감하거나 눈물을 흘리는 것조차 허구로 받아들여지게 된다. 실제적 접촉에 의한 거라면 타인의 상처가 내 것이 되거나 나로 인해 누군가가 (나도 모르게) 상처 입게 되는 경우도 허다하다. 그러면서 인간의 기본 본성에 내재되어 있는 고통에 대한 감응력마저 가상이 된다.

〈크래시〉
〈크래시〉

 

미리 누군가가 펼쳐놓은 허구의 스크린에 자신의 일정 부분을 떼어놓는 것만으로도 공감과 연대의 표식이 될 수 있다. 무엇인가에 대한 전면적인 투신이나 몸 사리지 않는 불굴의 정신 따윈 사장된 지 오래다. 나는 다른 이(것)의 상처를 가상으로 매만지며 스스로를 위안하고 달랠 뿐이다. 실재는 존재하나, 내가 실재를 마주하면 나는 다친다. ‘현피’는 없다. 손가락 하나의 짧은 지향뿐이다. 그리고 섹스도 없다. 더 많은 가상의 것들이 정신뿐 아니라 몸도 어루만져주니 쾌락은 오로지 나를 다치지 않는 선에서 나의 부속물에 의지할 뿐이다.


마침표를 찍는 순간, 세계는 멸망한다?!

 

50년 전에 쓰인 원작과, 30년 전에 만들어진 영화에 대한 거친 단상이 이 정도이다. 남녀가 대놓고 보란 듯이 벌거벗은 채 살을 섞는 영상은 이제 포르노그래피 축에도 못 낀다. 세계의 모든 사건과 사고를 산 사람들에게 전하면서 서로를 “이용”하고 “착취”하는 가상 시스템의 전파력 자체가 무엇보다 농밀한 포르노그래피의 전시장인 것이다. 정치가, 언론이, 그리고 그 모두를 아우른 테크놀로지의 이념이 현재 그러하다. <크래시>는 그렇게 벌어지고 깨진 ‘틈’을 훤히 들여다보라고 쓰이고 만들어진 작품이다.

 

 나는 다른 이(것)의 상처를 가상으로 매만지며 스스로를 위안하고 달랠 뿐이다. 실재는 존재하나, 내가 실재를 마주하면 나는 다친다. 〈크래시〉
 나는 다른 이(것)의 상처를 가상으로 매만지며 스스로를 위안하고 달랠 뿐이다. 실재는 존재하나, 내가 실재를 마주하면 나는 다친다. 〈크래시〉


​이미 50년 전, 아니 훨씬 이전부터 인간은 포르노그래피의 노예였다. 포르노그래피는 의외로 모든 걸 보여주지 않는다. 보지 말라고 눈 감게 하거나, 듣지 말라고 귀를 막는 게 포르노그래피의 진짜 목적이다. 내가 나임을, 그리고 당신이 당신 자신을 분명히 깨닫게 되는 순간, 망념의 쇼가 끝나고 진짜 인생이 시작될 테니까. 진짜 인생이 가득해지면 가짜로 꿀을 바르고 가짜로 피를 바른 것 앞에서 당신의 욕망은 세상의 ‘진짜’를 알려고 들 테니까. 그때, 세상은 멸망한다. 가치 판단은 없다. 멸망은 여전히 ‘근미래’다. 가깝지만, 아직 알 수 없는 미래. 이미 세상은 미래마저 잡아먹고 있다. 이 글의 마침표를 찍는 순간이 세계의 마지막일 수도 있다. 그래, 아니면 말고다. 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