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본 전국시대 무사도 관련 고서 중 이런 구절이 있다.
‘강개부사이 종용취사난慷槪赴死易 從容就死難’
해석하면 “의기에 북받쳐 죽는 것은 쉬우나, 차분하고 침착하게 죽는 것은 어렵다”는 뜻. 삶과 죽음을 대하는 사무라이의 태도를 한 마디로 요약한 문장이라 할 수 있다. 사무라이가 어떤 존재인지는 굳이 설명하지 않겠다. 주군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자. 그러기 위해 주군의 그림자가 되어 유령처럼 존재하는 자. 짐 자무시 감독의 <고스트 독 – 사무라이의 길>(1999, 이하 <고스트 독>)은 그러한 사무라이 정신을 뉴욕 한복판에 다소 엉뚱하게 옮겨온 작품이다.
이 뚱뚱한 흑인이 사무라이라고?

25년 전 영화인만큼 짐 자무시의 중기작이자 컬트적 고전이라고도 할 만한 작품이다. 짐 자무시 특유의 기발한 발상과 고전영화에 대한 오마주가 대놓고 드러나는데, 가장 먼저 떠오르는 영화가 장 피에르 멜빌의 <사무라이>(1967, 한국 개봉 제목 <한밤의 살인자>)다. 알랭 들랭이 냉정하고 잔혹한 킬러로 출연한 그 영화는 서양에서 막 사무라이 열풍이 불 때 히트 친 영화다. 말끔하게 잘 만들어진 수작이지만, 일종의 오리엔탈리즘이라는 혐의 또한 지우기 힘들다.
<고스트 독>은 장 피에르 멜빌의 작품에서 기본 설정을 따왔다. 말 없고 정체를 알 수 없는 킬러. 그런데 그가 레게머리를 한 흑인이다. 게다가 ‘무사’와는 잘 연결이 안 되는 뚱보다. 포레스트 휘태커가 분한 킬러, 즉 ‘고스트 독’이 약간 우스꽝스럽게 여겨진다면 그 탓일 거다. 어딘가 어색하고 우스운데, 표정이나 몸짓은 워낙 진중하고 자못 위협적이기까지 하다. 말 한 마디 잘못 걸었다간 바로 엎어치기라도 감행할 기세다.
그는 왜 삼류 양아치를 주군으로 모시는가

고스트 독은 한 폐건물의 옥상에서 비둘기들을 키우며 산다. 고독하고 쓸쓸해 보이나, 그에게선 어떤 감정도 안 느껴진다. 홀로 검술 훈련을 하고, 총기를 여럿 소지하고 있다. 자주 진동하는 힙합 리듬이 경쾌하기도 불길하기도 하다. 그런 그가 유일하게 접선(?)하는 사람은 마피아 졸개 루이(존 토미)다. 루이는 어느 날 집단 구타를 당하고 있는 고스트 독을 구해준 이후, 그의 주군이 되었다. 알고 보면 싸구려 양아치에 불과하지만, 『사무라이의 길』을 성서처럼 탐독하는 고스트 독에겐 삶의 길을 터주는 영도자(?)나 마찬가지. 이 영화가 짐짓 우스꽝스럽게 여겨지는 또 하나의 지점이다.
온갖 근엄한 표정으로 냉혹하게 일을 처리하는 킬러가 어떻게 그런 삼류 건달을 주군으로 모시는지 의아하다. 아무리 자신을 도와줬다 하더라도 인간의 본색이란 건 금세 들통나기 마련이다. 고스트 독이 루이의 지시를 받고 처치하는 대상들 역시 루이와 다를 바 없는 양아치들이다. 그런 점에서 고스트 독은 사무라이의 기본 원리에만 충실할 뿐, 인간과 사회에 대한 전체적인 윤리적 맥락과 선악 관념, 그리고 명철한 이성이 부재하는 인물처럼 보인다. 정말 그렇다면 무사로선 결격이다.
그런데 정말 그렇기만 할까. 결론은 물론, 영화를 다 보고 나서 판단할 일이다. 이 영화는 정통 스릴러나 누아르와는 거리가 먼 작품이다. 비장하기보다 경쾌하고, 암울하다기보다 차분하고 유머러스하다. 어째 좌충우돌 얼렁뚱땅 같은 느낌도 있다. 어떤 영화적 콜라주나 풍자가 전체 맥락을 꿰어낸다고도 할 수 있는데, 영화광 출신 짐 자무시의 특장이 개성적으로 드러나는 측면이라 볼 수도 있다.
뭐가 이렇게 얼렁뚱땅 뒤죽박죽이야!?

영화 초반, 마피아 보스 바고(헨리 실바)의 딸 루이스 바고(트리시아 베시)와 눈이 맞은 조직원을 살해한 고스트 독이 루이스에게 책을 건네는 장면이 있다. 아쿠타가와 류노스케의 『라쇼몽』이다.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의 <라쇼몽>의 원작이지만, 사실, 구로사와 아키라가 참조한 작품은 류노스케의 다른 단편 「덤불 속」이다. 주제에서부터 소재까지 일본 문화에 대한 참조가 드러나는 셈인데, 바고와 루이가 애니메이션을 즐겨보는 것도 그 맥락에서 이해해볼 만도 하다. 만화를 즐기는 마피아라니. 통념과 상식을 깨는 언밸런스의 귀재 짐 자무시의 짓궂은(?) 센스가 발휘됐다고나 할까.
그런 식으로 이 영화엔 영화 자체의 전형적인 긴장감과 밀도를 젖히고 드러나는 레퍼런스와 위트가 가득하다. 그렇다고 마냥 웃긴 것만도 아니고, 마냥 진지한 영화적 성찰을 궁구하는 것도 아니다. 그저 영화라는 것 자체가 가지고 있는 기술적 특징과 전체 영화사에 걸쳐 활용되어온 여러 텍스트들을 인용해 감독 스스로가 즐기고 있다는 느낌마저 준다. 그렇기에 킬러와 마피아, 그리고 갱스터랩이라는 요소가 기본적으로 가지고 있는 속성들이 중화되고 침삭되어 독특한 아우라를 풍긴다. 웃기지도 진지하지도 않은데, 그게 외려 진지하고 웃기다고 말한다면 어불성설일 것이나, 그런 표현이 또 적실하게 여겨지니 약간은 괴랄하다고 말할 수도 있겠다.
영화는 ‘소동 아닌 소동’처럼 끝난다. 어딘가 요란하나 또 어딘가 싱겁다는 뜻이다. 검술을 수련하지만 고스트 독이 일을 처리할 땐 주로 총을 사용한다. 결국 미국식이다. 일본이나 미국뿐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도 검은 이제 실용성이 떨어진다. 사무라이를 상징하는 유물이거나 표식으로나 작용할 뿐인데, 쿠엔틴 타란티노는 <킬 빌>(2003)에서 그 시대착오적 유물을 아주 솜씨 좋게 활용했었다. 그 역시, 타란티노 특유의 영화적 기지의 소산이라 할 수 있다. 오토바이를 탄 채 검을 들고 다니는 현대인을 설득력 있게 그려내는 건 아무나 가능한 일이 아니다.
영화 보다 낯선 영화
<고스트 독> 역시 전체적으로 뜬금없고 어색한 면도 많다. 그럼에도 그 ‘어색함’ 자체가 이 영화의 매력이자 개성으로 작용한다. 20세기 말 뉴욕 한복판에 흑인 사무라이가 등장한다는 설정 자체가 만화스럽기는 하나, 할리우드에서 전형화된 여러 인물이나 플롯의 패턴을 비틀고 풍자함으로써 독보적으로 자리매김한 짐 자무시다운 영화라 할 만하다.
그는 대중에게 일반적 혹은 관성적으로 주입된 영화의 성격을 ‘천국보다’ 더 ‘낯선’ 방식으로 변화시키며 ‘천국이 존재하지 않음’을 환기한다. 그렇다고 그의 영화가 ‘지옥’을 다루고 있다는 뜻은 아니다. 그의 영화는 ‘천국’도 ‘지옥’도 존재하지 않고, 다만 ‘일상’적이지 않은 방식으로 ‘일상’의 빈틈, 그리하여 삶의 내밀한 속살과 본성들을 성찰하게 만드는 일종의 ‘음화’라 할 수 있다. 음화인 만큼 그것의 본질은 다채롭고 엉뚱한 사물들의 혼합으로 구성된 일상의 부속들이 널려있다. 마치 책상 위의 노트나 필기구 등이 특정한 세기와 각도의 빛에 따라 바닥에 전혀 알 수 없는 음영을 드러내는 것과 비슷하다고나 할까. 그것들은 늘 ‘이곳’보다 낯설고 ‘사실’보다 더 짙다. ‘고스트 독’이라. 짐 자무시는 결국 일상의 어떤 유령을 특정 사물 혹은 인물로 인유하여 삶의 배면을 찍어내는 자라 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그는 시인과도 같다. 그에겐 무사도마저도 무사도의 음화로 다가온 듯하다.
그의 총에 총알이 없는 이유

무사도는 늘 죽음을 운위하지만, 죽음을 두려워하거나 삶이 무의미하니 장렬하게 죽자고 꼬드기는 망상 체계가 아니다. 무사도의 기본 태도는 삶을 통해 죽음을 통과하고 죽음을 깨우쳐 삶의 근본을 자각하는 데 있다. 살면서 자신의 죽음을 깨닫는다는 건 삶과 자연, 그리고 사회를 구성하는 모든 요소들에 대한 전체적인 통찰과 모든 인연의 구속을 섬려하게 풀어헤치는 내면적 각성을 체화한다는 뜻이다. 죽음이 삶의 가장 확실하고 기본적인 전제인 것은 자연의 질서이자 엄명이다. 그런 의미에서 모든 이의 삶은 죽음으로부터 잠시 현현한 유령 같은 것일 수도 있다. 유령은 실존 차원에서는 허상이지만, 삶의 모든 조건이나 제도, 그리고 그로 인한 욕망 또한 잠시 동안 삶을 지배하다 사라지는 허상에 불과하다. 고스트 독이 자신의 주군이던 루이와 마지막 일전을 벌일 때, 그의 총엔 총알이 없다. 그럼에도 그는 태연하다. 행인가 불행인가. 혹은 삶의 끝인가 죽음의 시작인가. 얼렁뚱땅 피식거리며 보고 나서 드는 철리(哲理)가 자못 심상찮다. 비둘기 밥은 이제 누가 주나.
강정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