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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정의 씬드로잉] 영화는 침묵 속에서 울리는 장대한 꿈이야! 〈멀홀랜드 드라이브〉

씨네플레이

한때, 영화를 얘기하며 자크 라캉이나 슬라보예 지젝 같은 이들의 이론을 인용하는 경우가 많았다. 영화가 가지고 있는 철학적 의미나 구조에 대해 설명 또는 해석하는 방식이었다. 한 소설가는 “깡깡거리고 짹짹거린다”며 빈정댄 적도 있거니와, 다분히 현학적이고 과잉된 지적 편린을 영화에 끼얹는 방식이라 비판할 소지가 다분했다. 그럼에도 때론 일상 어법이나 논리로는 이해도 납득도 힘들어지는 영화를 만나게 될 때도 있는 건 분명하다.

 


잘 꿰맨 어둠과 침묵

데이비드 린치는 기존 스토리텔링이나 서사 구조로만 파악하기 힘든 영화를 줄곧 만들어 왔다. 영화사에서 가장 괴팍한 감독이라 할 수도 있다. 엉뚱하고 기괴한 이미지와 인물들, 느닷없는 시간 왜곡과 공간의 변이, 맥락을 알 수 없는 대사 등 그의 영화는 늘 관객을 당혹하게 만든다. 그리고 그게 그의 특장이자 매력이다. 라캉이나 지젝뿐 아니라, 선불교나 노장사상 따위를 들먹이게 될 수도 있는데, 모두 적확하기도 무용하기도 하다. 영화는 그저 영화일 뿐이다.

 

<멀홀랜드 드라이브>(2001)는 데이비드 린치의 최고 걸작으로 꼽히는 영화다. 일단, 대외적인 평가가 그렇다. 54회 칸영화제 감독상을 수상하고 프랑스의 저명한 영화비평지 「카이에 뒤 시네마」에서 선정한 21세기 최고 영화에서 맨 꼭대기에 자리 잡은 것 외 수상 이력도 화려하다. 주로 프랑스에서 극찬했다는 게 특이사항일 수 있는데 ‘Canal+’가 제작에 참여했다.

그러한 평가와 별개로 개인적으로도 데이비드 린치 영화 중 가장 좋아하는 작품이다. 전작 <로스트 하이웨이>(1997)에서 보여준 음침하고 뿌옇고 어두운(영화 색조뿐 아니라 전체적인 구조와 얼개도 그러하다) 분위기와 구멍이 뻥뻥 뚫린 듯 모호한 전개가 좀 더 구체적이고 다채로운 색감으로 치밀하게 꿰어져 잘 마름질된 느낌을 준다. 느닷없고 개연성이 희박해 보이는 세 개의 이야기 줄기가 중후반 즈음 하나의 궤로 아귀를 딱딱 맞춰가는 전개 또한 설득력 있다. 그렇다고 모든 게 명약관화해지는 건 아니다. 과연 ‘린치다운’(?) 모호함과 무의식의 심연을 들여다보는 듯 신비롭고 비밀스러운 여운은 외려 더 짙다고 할 수 있다.

 


매혹과 불안으로 문을 여는 ‘린치월드’

한 미모의 여인(로라 해링)이 정체불명의 남자들과 차를 타고 어두운 도로로 접어들면서 영화가 시작한다. 그전 오프닝엔 일군의 남녀들이 춤을 추는 장면이 있다. 영화의 전체적인 분위기나 맥락과는 동떨어진 분위기인데, ‘지금부터 쇼가 시작됩니다!’라는 걸 알리는 듯한 느낌을 준다. 무척 밝고 익살스러운 군무가 끝나면서 곧장 ‘린치월드’가 열린다. 여인은 어디로 가는지 알 수 없다. 불안이 고조된다. 결국 교통사고가 난다. 남자들은 현장에서 즉사하고 여인만 살아남아 현장을 탈출한다.

 

여인은 자신이 누구인지 모른다. 우연히 리타 헤이워드의 사진을 보곤 스스로 ‘리타’라 칭한다. 어둠 속에서 길을 헤매는 중, 어떤 집을 발견하곤 몰래 숨어든다. 여인은 검은 가방을 들고 있다. 그런데 가방을 열어 볼 엄두를 못 낸다. 이때, 영화 분위기는 대체로 어둡고 비밀스럽다. 누아르나 추리극 느낌이 나는데, 데이비드 린치의 영화라는 걸 감안하고 볼 때, 섣부른 추측은 금물이다. 또 무슨 해괴한 장면들이 이어질까 싶은 당혹감과 호기심이 동시에 생긴다. 여인의 미모는 매혹적이다. 스스로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고 자신이 누구인지조차 알 수 없다는 설정이 매혹을 증폭시키기도 한다. 미지는 공포이자 유혹이다. 데이비드 린치는 그 속성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감독이다. 항상 미녀가 등장하지만, 그들은 항상 수수께끼의 입구이고 어딘가 퇴폐적이다. 남성을 유혹하는 전형성 및 타인은 물론 자신마저 함정에 몰아넣는 몰개성적 심연을 동시에 표상한다.

 

그러다 또 다른 수수께끼가 등장한다. 상황 자체만 놓고 보면 수수께끼랄 것도 없지만, 다른 장면들과의 연계성을 따져 봤을 때, 선뜻 맥락 파악이 안 된다. 아담 캐셔(저스틴 서로)라는 젊은 영화감독이 제작사 임원들과 미팅하는 장면. 늙고 거만한 제작자들이 주연 여배우 후보의 사진을 돌려보며 “딱 이 여자야!”라고 못 박는다. 아담에겐 사진조차 보여주지 않는다. 아담이 발끈한다. 사무실을 뛰쳐나와 골프채를 휘두르며 난동을 부린다. 씩씩거리며 집에 갔더니 아내는 웬 덩치 큰 남자와 바람을 피우고 있다. 아내의 귀금속에 빨간 물감을 퍼붓는 등 소동을 피우다가 쫓겨난다. 영화의 두 번째 설정이다.

 


‘이’ 여인은 과연 ‘저’ 여인인가?

연이어 또 맥락을 알 수 없는 총기 살해 현장이 나타나는 등, 시작부터 뒤죽박죽이다. 그 사이에 진짜 주인공 베티(나오미 왓츠)가 잠깐씩 등장한다. 베티는 유명 배우를 꿈꾸며 시골에서 할리우드로 올라온다. 꿈과 희망으로 가득 차 있다. 자신을 후원하는 숙모 집에 거주하게 되는데, 숙모는 영화에서 통화 목소리만 몇 차례 들릴 뿐, 한 번도 등장하지 않는다. 집사인 코코(앤 밀러)가 베티를 환대한다. 숙모의 근사한 집에 짐을 부리는 베티. 그런데 그 집에 웬 낯선 여인이 벌거벗은 채 샤워실에 숨어 있다. 바로 ‘리타’라 자칭하는 그 여인이다.

 

크게 나눠 세 개의 이야기 줄기가 불쑥 던져지는데, 그 쪼개진 이야기와 인물의 조각들이 슬그머니 꿰어 맞춰지는 게 큰 맥락이라 할 수 있다. 일부러 짜인 복선이나 단서를 머리 써 추적할 필요는 없다. 그저 흘러가다 보니 잔 줄기들이 큰 흐름 안에 뒤섞여 전체 그림이 그려지는 정도다. 린치 특유의 소소한 듯 의미심장한 단서(가령, 푸른색 열쇠와 박스 등)들이 말 그대로 열쇠처럼 작동하지만, 기존 논리 체계를 따라 질서정연하게 정리되진 않는다. 그건 인물의 정체성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앞서 ‘리타’는 예전의 명배우 리타 헤이워드에서 따왔다고 했다. 이 영화는, 데이비드 린치의 영화 대부분이 그렇듯, 영화가 존재하는 방식, 또는 영화가 현실에 작용하는 방식, 나아가 사람이 영화를 보면서 작동하게 되는 의식적 무의식적 심리 기제들을 주제이자 목적으로 삼은 측면이 강하다. 여성 인물들은 모두 배우들이고, 남성들은 영화를 만드는 자들이다. 여성들은 배우인 만큼, 한 사람이자 여러 사람이고, 나라고 믿었던 게 타인이며 타인이 곧 나이다. 이 전제를 놓치고 보면 영화는 도통 이해할 수 없는 궤변처럼 여겨질지 모른다. 때문에 철학적 테마나 정신분석학, 심리학적 이론을 끌어들이게 만드는 불가피한 요소가 될 수도 있다.

 


내가 타인이고 타인이 내가 되는 꿈 속의 꿈

영화의 체계는 시각을 근본으로 한다는 점에서 관음적 속성이 강하다. 그만큼 남성적 기호 체계를 따르며 고압적이거나 일방향적인 시스템으로 흐르는 측면 또한 무시 못 한다. 할리우드는 그런 점에서 영화의 마초적 대부다. 아담을 제외시킨 채 자기들 입맛대로 주연배우를 낙점하는 제작자들은 할리우드의 본색이라 할 수 있다. 베티는 그곳에 편입되어 성공하길 꿈꾼다. 하지만 그 꿈은 그저 꿈에 불과하고, 그 허망한 꿈에 함몰된 자신의 초라함을 극복하려 또 다른 꿈을 꾼다. 그 이중 삼중의 꿈이 이 영화의 기본 얼개라 해도 무방하다. 영화상 베티의 실제 이름은 다이앤 셀윈이다. 리타의 곤경을 도우려고 애를 쓰는 ‘다이앤/베티’는 결국 스스로를 구하려는 자가 되고, 자기 자신과 직면하려는 인물이나 진배없다. 이야기가 알쏭달쏭한가. 영화를 봤어도 잘 모르겠는가. 혹은, 완전 다른 의견을 가지고 있는가. 정답은 없다. 그저 나는 그렇게 봤고, 그래서 이 영화가 사람이 기본적으로 가지고 있는 무의식과 꿈을 꿈과 무의식 자체로 영상화한 작품이라 여긴다.

개봉 당시, 여성끼리의 동성애 장면이 화제가 되기도 했었다. 두 배우 공히 가차 없을 정도의 밀도를 보여주는 장면이다. 그런데 에로틱한 설렘보다 뭔가 심원한 지점에서 알 수 없는 뭔가와 합일하고자 하는 욕망 같은 게 느껴져 슬퍼 보였다고나 말해야겠다. 호주 출신인 나오미 왓츠는 이 영화를 통해 비로소 이름을 알렸다. 당시 그녀는 서른을 넘긴 베테랑(?) 무명이었다. 출중한 연기력에 비해 그저그런 작품을 전전하던 참이었는데, 배우 보는 눈이 남다른 데이비드 린치에게 제대로 걸렸다는 느낌이다. 그래서인지 이 영화가 나오미 왓츠의 당시 내면을 훑어낸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물론 결과론이다. 하지만 다시 봐도 그녀의 연기는 저돌적이라는 느낌마저 들 정도다.

 


짓궂게 뭉갠 철학과 시?

다 보고 나니 뇌리에 남는 건 ‘복합적인 단일체’라 여겨지는 두 여성의 잔상이다.
다 보고 나니 뇌리에 남는 건 ‘복합적인 단일체’라 여겨지는 두 여성의 잔상이다.

다이앤이자 베티이자 나오미 왓츠 자신인 금발 머리 여성. 그리고 이 영화 이후 소식을 알 수 없는, 리타이자 다이앤이자 로라 해링 자신이었던 검은 머리 여성. 다 보고 나니 뇌리에 남는 건 ‘복합적인 단일체’라 여겨지는 두 여성의 잔상이다. 아울러 영화를 보면서 스쳐간 수많은 생각과 이미지와 기억들의 뒤섞임 그 자체의 소용돌이가 오래 맴돈다. 많은 걸 보여주지만, 결국 보는 이 자신 속으로 들어가 어두운 침묵 속에서 스스로 조명을 꺼버리게 만드는 영화. 결국, 또 하나의 “깡깡거리고 짹짹거리는” 변설에 불과하겠지만, 비트겐슈타인 생각이 난다. 딱 두 마디만 인용하겠다.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선 침묵해야 한다.” 그리고, “모든 철학적 행위는 오로지 시적 언어로만 가능하다.” 데이비드 린치는 철학자도 시인도 아니다. 그럼에도 그 모든 걸 영화로 보여줬다가 지운다. 다 읽고 나서 다시 맨 앞으로 돌아가야만 하는 책은 진귀하고 드물고 언제나 짓궂을 수밖에 없다.

 

강정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