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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할 때 더 강하다!” 낸 골딘을 보고 떠올린 연대와 저항으로 세상을 바꾸는 얼굴들

씨네플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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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낸 골딘, 모든 아름다움과 유혈사태〉

 

예술가들의 예술가이자 현존하는 가장 영향력 있는 예술가 중 하나인 사진작가 낸 골딘이 오늘 손에 쥔 건 카메라가 아니라 빈 약병이다. 낸은 몇몇 사람들과 미국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 조용히 들어선다. 관람객에게 인기 있는 덴두르 신전이 위치한 새클러관에 도착하자 무리는 신호에 맞춰 일제히 소리치기 시작한다. "10만 명이 죽었다!", "새클러는 거짓말쟁이!". “돈의 사원, 탐욕의 사원, 옥시콘틴의 사원!”. 시위대는 항의의 뜻으로 주황색 약병을 건물 안 인공 연못에 던지기 시작하고, 멈추지 않겠다는 의지로 미술관 바닥에 드러눕는다. 2022년 베니스국제영화제 대상을 수상한 다큐멘터리 <낸 골딘, 모든 아름다움과 유혈사태>의 첫 장면이다.

성 소수자, 약물중독 문화, 뉴욕 길거리에 날 것으로 놓인 언더그라운드 문화의 초상을 사진으로 포착해 기존 사진 예술계를 뒤흔든 낸 골딘은 열혈 사회 운동가로 다시 한번 세상에 나선다. 계기는 옥시콘틴 오남용으로 인해 심각한 중독을 겪은 개인적 경험이었다. 옥시콘틴은 이제는 한국인들에게도 익숙한 이름인 ‘펜타닐’이 세계적인 사회문제가 되는 데 길을 닦은 마약성 진통제다. 퍼듀파마사가 1996년 옥시콘틴을 출시해 20년 만에 350억 달러(약 45조 9500억 원)를 벌어들이는 사이 2009년 이후 지금까지 옥시콘틴 중독으로 최소 64만 명의 미국인이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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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낸 골딘, 모든 아름다움과 유혈사태〉

낸 골딘은 60대 중반에 접어든 2017년부터 옥시콘틴 처방으로 중독자가 된 사람들, 중독으로 가족을 잃은 이들과 연대해 '처방중독즉각개입'(P.A.I.N:Prescription Addiction Intervention Now)을 만들어 미국 전역에 오피오이드 위기를 확산한 옥시콘틴 제약사 퍼듀 파마(Purdue Pharma)의 실소유주 새클러 가문을 압박한다. 메트로폴리탄, 루브르, 테이트, 구겐하임, 하버드대학교 등 새클러 가문의 기부금으로 운영 자금을 마련하는 곳들을 겨냥해 기습 시위와 저항을 이어갔다.

무응답으로 일관하던 예술계도 커져가는 비판의 목소리들을 외면할 수 없었다. 유수의 미술관과 대학에서 새클러가의 기부금을 거부하겠다는 선언이 잇따랐고, 전시관 곳곳에 붙어있던 새클러의 이름은 마침내 지워졌다. 수천 건의 피해자 소송을 회피하기 위해 퍼듀 파마사는 파산을 신청했지만, 지난해 8월 법무부가 항소하며 파산 결정은 연방 대법원의 판결까지 유예됐다. "자신의 권력을 제대로 쓸 줄 알았던" 미술계의 거물이 카메라를 넘어 삶과 투쟁으로 작업을 확장하자 변화는 시작됐고, 그것은 역사가 됐다.

폭력의 위험과 전통의 관성에도 연대와 저항으로 문제를 제기하는 이들이 있다. 공동체 구성원의 의무를 저버리지 않는 이들 덕분에 우리는 어제보다 나은 삶을 영위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오늘은 <낸 골딘, 모든 아름다움과 유혈사태>을 보고 떠오른 활동가들의 얼굴을 담은 영화를 소개한다.


<어쩌다 활동가>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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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다 활동가〉 이윤정​

 

30년 넘는 세월 동안 교회와 집을 오가며 독실한 기독교인으로 살아온 윤정은 2014년 세월호 참사에 보인 교회의 태도에 상처를 받고 돌연 사회 활동가가 된다. 교회를 관두면서 다니게 된 곳은 일산의 어느 이주민 인권단체 사무실. 지역사회의 이주민들을 조력하는 일과 함께 화성외국인보호소(강제출국 대상자를 구금하는 국가보안 시설)를 방문하기 시작한 윤정은 눈코 뜰 새 없이 바쁘다. 난생처음 해보는 컴퓨터 작업과 각종 사무일은 아직도 어렵고, 외국인 응대는 여전히 버겁다. 설상가상으로 2020년부터 시작된 코로나 바이러스 유행으로 외국인 보호소에 구금되는 외국인 숫자는 늘어만 가고, '공공재'가 된 윤정의 휴대폰은 쉼 없이 억울한 사연들을 길어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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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다 활동가〉

 

윤정의 딸이자 이 영화의 감독인 박마리솔은 어머니를 경외의 시선으로 바라보다가도 어떤 순간에는 '메추리알로 바위를 치는 것 같'은 그녀의 활동들이 무력해서 화가 난다. 양가적인 갈등의 시선 속에서 속내를 정확히 알기 어려웠던 어머니의 삶을 카메라로 담으며 윤정의 삶은 감독에게로 흘러든다. 이내 감독은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고민하며 "엄마를 따라 작지만, 단단한 메추리알을 던"져보며 나란히 함께 걷는 관계가 된다.

영화 속 윤정은 어쩌면 당신이 예상하고 기대했던 활동가의 모습은 아닐지도 모른다. 그는 신념으로 무장한 열혈 활동가도, 능수능란한 전략가도, 사회적 자원을 동원할 수 있는 '거물'도 아니다. 하지만 활동가가 될 결심을 하고 주저 없이 부딪히는 실행력과 도움이 필요한 이들을 지나치지 못하는 연대와 공감의 감정이야말로 활동가에게 요구되는 제1덕목이다. 그는 '어쩌다' 활동가가 됐지만 그 변화는 필연이었다.


<피리오드: 더 패드 프로젝트> (2019)

 

〈피리오드: 더 패드 프로젝트〉
〈피리오드: 더 패드 프로젝트〉

 

인도 뉴델리에서 60km 떨어진 농촌마을 하푸르. 이곳 사람들은 월경에 무지하다. 월경에 대해 알고 있냐는 간단한 질문에 여자아이들은 눈알을 굴리며 어쩔 줄을 몰라하거나 친구와 얼굴을 맞대고 부끄러운 웃음만 터트린다. 같은 질문에 남성들은 ‘여자들이 걸리는 질병’이 아니냐고 반문한다. “생리를 왜 하는지 알고 계세요?” 나이 든 여성에게 찾아든 이 질문에 “그건 신만이 알죠. 더러운 피가 빠져나오는 거예요”라는 답이 돌아온다.

여성들은 월경 기간 중 사원 출입 금지다. 생리대가 없어서 학교를 그만둔 학생의 이야기는 이제 놀랍지도 않다. 인도의 생리대 사용 비율은 10% 안팎. 일회용 생리대의 존재를 모르는 이 지역 많은 여성들은 패드 대신 비위생적인 천을 사용한다. 남들의 눈을 피해 다 쓴 천을 처리하는 것도 쉽지 않다. 때론 거리의 개들이 쓰레기장에 묻힌 천을 헤집어 놓는다.

〈피리오드: 더 패드 프로젝트〉
〈피리오드: 더 패드 프로젝트〉

혁명적 구호를 내지르진 않지만, '더 패드 프로젝트'는 그 어떤 혁명보다 급진적으로 여성의 삶을 바꾼다. 뿌리 깊은 생리의 오명에 맞서기 위해 지역 NGO의 도움으로 마을 여성들은 기계를 구입해 직접 생리대를 만들기 시작한다. 직접 만든 생리대는 마을 여성들이 사용하기도 하지만 판매도 한다. 상품을 만들어 판매한 수익은 마을 여성들에게 돌아온다. 경찰을 꿈꾸는 ‘스네하’는 생리대 판매 수익으로 경찰 준비 비용을 충당한다. 생리대 제작으로 돈을 번 한 여성은 이제 남편에게 존중받고 있다 말하며, 다른 여성은 남동생에게 옷을 사주는 누나가 되었다며 함박웃음을 짓는다.

2013년 캘리포니아의 일군의 고등학생들과 교육가들이 모금행사, 빵 판매 등으로 마련한 기금을 생리대 기계 구입 비용으로 기부하며 '더 패드 프로젝트'는 시작됐다. 인도 현지 풀뿌리 단체인 Action India와의 협업으로 현지에서 여성을 고용하여 생리대를 만들고 판매하는 사업 모델을 개발한 이들은 2019년 <피리오드: 더 패드 프로젝트>가 아카데미 단편 다큐멘터리 영화상을 수상하며 명실상부 NGO 단체로 발돋움했다. 이후 단체는 인도를 넘어 네팔, 케냐 등지로 활동 반경을 넓히고, 다회용 생리대 보급, 보건교육 등으로 활동 영역을 확장해 월경에 대한 오해와 낙인에 맞서 싸우는 활동을 계속하고 있다. 대륙을 넘나드는 여성들 간의 연대는 넷플릭스에서 확인 가능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