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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조 ‘백발마녀’이자 한때 ‘양조위 엄마’였던 〈원더랜드〉의 '탕웨이 엄마', 배우 포기정을 아십니까

주성철편집장
〈원더랜드〉 배우 포기정과 탕웨이(오른쪽)

<원더랜드>에서 탕웨이의 엄마로 나오는 배우는 바로 홍콩영화계를 대표하는 대배우 중 한 명인 포기정(鲍起静, Paw Hee Ching, Nina Paw)이다. 죽은 사람을 인공지능으로 복원하는 ‘원더랜드’ 서비스가 일상이 된 미래, 어린 딸에게 자신의 죽음을 숨기기 위해 원더랜드 서비스를 의뢰한 바이리(탕웨이)와 사고로 누워있는 남자친구 태주(박보검)를 원더랜드에서 우주인으로 복원해 행복한 일상을 나누는 정인(수지)은, 물리적으로 만날 수 없게 된 이들을 더 이상 그리워하거나 슬퍼하지 않는 삶을 선택할 수 있게 된다. 특히 원더랜드에서 발굴 현장을 누비는 고고학자로 복원된 바이리는 딸과의 영상통화를 통해 친구 같은 엄마가 되기 위해 노력하는데, 포기정은 그런 바이리를 따뜻하게 지켜보는 엄마로 출연해 깊은 인상을 남긴다.

〈원더랜드〉 포기정(왼쪽 사진), 그리고 딸 바이리와 손녀까지 삼대의 이야기

1949년생인 포기정은 과거 홍콩영화계의 유명 배우이자 영화감독이기도 했던, 아버지 포방(鮑方) 감독의 영화 <아내야>(1966)로 10대 시절에 데뷔한 뒤 <호구발아>(1969), <아난적가기>(1973), <굴원>(1973), <만호천가>(1975) 등에 출연하며 전업배우의 길을 걷게 된다. 우리에게는 장국영과 임청하 주연, 우인태 감독의 영화로 먼저 알려진 양우생 원작의 <백발마녀전>(1993)은 그보다 앞서 (이후 이연걸의 출세작인 1982년작 <소림사>를 만들게 되는) 장흠염 감독이 동명의 <백발마녀전>(1980)으로 맨 처음 영화화한 바 있다. 1993년 <백발마녀전>에서 임청하가 연기한 독보적 ‘연예상’ 캐릭터를, 1980년작에서 먼저 백발을 휘날리며 연기한 배우가 바로 포기정이다.

 

1980년작 〈백발마녀전〉에서 연예상을 연기한 포기정

이후 톱스타의 길을 걸었다고는 할 수 없으나, 유덕화와 막소총 주연 <도시의 아이들>(1989)이나 왕가위의 <동사서독>(1994)을 완성할 수 있게 해준 <동성서취>(1993)를 비롯해 수많은 영화에 조단역을 가리지 않고 출연하며 자신의 입지를 넓혀 갔다. 특히 이제 막 마흔 살의 나이가 됐을 때 <첩혈가두>(1990)에서 양조위의 엄마로 출연한 뒤 홍콩을 대표하는 ‘엄마 배우’가 됐다. 이때부터 홍콩 대표 배우들치고 그의 자식으로 나오지 않은 이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사실 나이 차가 그리 크게 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도성대형>(1992)과 <용재변연>(1999)에서 유덕화의 엄마, <97가유희사>(1997)와 <탈사>(1997)에서 오천련의 엄마, 완세생의 <완전결혼수책>(1997)에서 원영의의 엄마, 허안화의 <천언만어>(1999)에서 이강생의 엄마, 원규의 <버추얼 웨폰>(2002)에서 서기의 엄마, 이동승의 <망불료>(2003)에서 장백지의 엄마, 우인태의 <무인 곽원갑>(2006)에서 ‘곽원갑’ 이연걸의 엄마, 엄호의 <부성>(2012)에서 곽부성의 엄마, <특수경찰: 스페셜 ID>(2014)와 <빙봉협: 시공행자>(2018)에서 견자단의 엄마로 나왔다. 한국 배우와의 인연이라면, <검우강호>(2010)에서 양자경과 정우성이 사는 동네 시장의 인심 좋은 아주머니로 나와 두 사람의 결혼을 응원한 바 있다.

 

〈동성서취〉(왼쪽 사진 가장 오른쪽)와〈검우강호〉(오른쪽 사진 왼쪽)

 

그랬던 포기정이 <원더랜드>에서는 탕웨이의 엄마로 나왔다. 두 사람은 허안화 감독 영화로 엮인다는 인연이 있다. 홍콩영화계를 대표하는 여성감독 허안화의 <천수위의 낮과 밤>(2008)에서, 홍콩의 재개발 구역인 천수위의 한 마트에서 일하며 아들을 홀로 키우면서 살아가는 주인공 역할로, 포기정은 2008년 홍콩영화비평가협회상과 2009년 홍콩금상장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을 수상하며 환갑의 나이에 새로운 전성기를 열었다. 탕웨이 또한 허안화의 <황금시대>(2014)에서 1930년대 격변의 중국 사회를 살았던 실존 천재작가 샤오홍을 연기한 바 있다. 2000년대 이후 현대와 과거, 현실과 역사, 홍콩과 중국, 그리고 여성 노동자와 여성 예술가 이야기를 통해 자신의 작가적 전환점을 맞이한 허안화 감독이 필요로 한 두 배우였다.

허안화의 두 영화 〈천수위의 낮과 밤〉의 포기정과 〈황금시대〉의 탕웨이

물론 탕웨이와 포기정은 <원더랜드> 이전에 한 영화에서 만난 적 있다. <첨밀밀>(1995)의 시나리오 작가로 유명한 안서 감독이 연출을 맡은 <크로싱 헤네시>(2010)에서, 탕웨이와 장학우가 홍콩 완차이의 헤네시 로드(Hennessy Road)에서 일하는 사람들로 나온 적 있는데, 포기정이 바로 장학우의 엄마는 아니고 이모로 나온 적 있다. <크로싱 헤네시>에서 탕웨이와 장학우는 거의 반강제적으로 맞선을 보게 되는데, 두 사람의 마음속에는 이미 다른 사람이 자리하고 있다. 이후 그들은 우연히 함께 한 차찬텡에서 서로의 연인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며 조금씩 가까워진다. 차찬텡(茶餐廳)은 홍콩에서 유래한 식당의 한 종류로 홍콩 요리와 홍콩식 서양 음식들을 포함한 적절한 메뉴로 구성된, 가볍게 식사와 음료를 해결할 수 있는 홍콩사람들의 지극히 일상적인 공간이라 할 수 있다. <크로싱 헤네시>에서 쾌활한 성격으로 극중 분위기 메이커였던 그는 과거 <첩혈쌍웅>(1989)으로 유명한 배우 이수현과 코믹한 호흡을 보여줬다. <크로싱 헤네시>는 왓챠에서 감상 가능하다.

 

〈크로싱 헤네시〉 포기정과 이수현(오른쪽 사진의 왼쪽)

 

당시 포기정은 탕웨이의 든든한 선배였다. 데뷔작 <색, 계>(2007) 이후 중국 정부의 제재로 사실상 활동을 중단할 수밖에 없었던 탕웨이가, 홍콩 시민권을 취득한 후 다시 배우 생활을 이어갈 수 있었던 영화가 바로 <크로싱 헤네시>였다. 포기정은 “이 영화로 탕웨이가 다시 빛을 볼 수 있게 되어 매우 기쁘다”며 아낌없는 응원을 보냈다. 그처럼 <크로싱 헤네시>로 조우하고, 이후 허안화 감독 영화에서 각기 다른 주인공을 연기했던 두 사람이 <원더랜드>에서는 드디어 엄마와 딸로 만났다. 자신의 엄마 역할로 포기정을 적극 추천한 것도 바로 탕웨이였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그 시기는 코로나 팬데믹과 겹쳤다. 그래서 포기정은 영화 출연을 위해 한국과 홍콩을 바삐 왔다 갔다 하는 가운데 2주 이상의 격리기간도 꼬박 준수해야 했기에, 여간 번거로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포기정은 <원더랜드>(仙境)와 <헤어질 결심>(分手的決心)을 동시에 준비하고 있던 후배 탕웨이에게 격려를 아끼지 않았다. 그에 대한 감사의 의미로 탕웨이가 어마어마한 선물을 했다고도 알려져 있다.

 


〈와호장룡〉으로 오스카 촬영상을 수상한 포덕희와 아버지 포방, 그리고 포기정(왼쪽부터)

한편, 포기정의 남동생도 영화인으로 유명하다. 바로 <첩혈쌍웅>(1989)으로 촬영감독 데뷔한 뒤 앞서 얘기한 <동성서취> <백발마녀전> 외에도 왕정의 <정전자>(1989), 서극의 <소오강호>(1990), 우인태의 <야반가성>(1996), 진가신의 <퍼햅스 러브>(2005), 첸 카이거의 <무극>(2005), 롭 민코프의 <포비든 킹덤-전설의 마스터를 찾아서>(2008) 등을 촬영한 포덕희(鲍德熹, Peter Pau)다. 홍콩을 대표하는 촬영감독이라 할 수 있는 그는 <와호장룡>(2000)으로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촬영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엄마라는 집〉

포기정의 최근작 중 추천할 만한 영화는, 넷플릭스 대만 영화 <엄마라는 집>(2022)이다. 여기서는 우리에게 드라마 <상견니>로 유명한 배우 가가연의 엄마로 나온다. 넷플릭스에 공개된 한국어 제목은 <엄마라는 집>이고 영어제목은 <Reclaim>이며, 원제는 ‘한 가족의 주인’이라는 뜻의 <일가지주>(一家之主)다. 가족의 주인은 바로 포기정이 연기하는 주인공인 ‘예란신’이라는 엄마로, 많은 이들이 공감할 법한 한 엄마의 고된 가정사를 그리고 있다. 친정엄마는 치매에 걸려 요양병원에 입원해 있고, 남편(구세훈)은 퇴직 후 집안에 틀어박혀 아무런 일도 하지 않는다. 과거 예란신은 화가를 꿈꾸며 프랑스 파리 유학을 계획했다가 결혼과 동시에 아이가 생기며 그냥 눌러앉게 됐고, 생계를 위해 시작한 미술학원을 현재까지 운영 중이다. 그런 가운데 친정엄마를 직접 집으로 데려와 보살피려는 계획을 세우고 있는 와중에, 하는 일이 잘 풀리지 않는 딸(가가연)은 퇴사하여 집으로 들어오겠다고 하고, 아들마저 해외 유학과 결혼까지 시켜놓았더니 느닷없이 대만으로 돌아와 살겠다고 선언한다. 이처럼 친정엄마를 위해 마련해 둔 방에 딸이 들어오게 된 상황이다 보니, 예란신은 모든 가족을 품을 수 있는 더 큰 집을 마련해야겠다는 생각에 여기저기 집을 보러 다니기 시작한다. 그러면서 자신의 지난날도 떠오르고 앞으로 해야 할 일도 생겨나며, 늦은 나이이긴 하나 새로운 꿈을 꾸게 된다.

 

〈엄마라는 집〉

 

주성철 씨네플레이 편집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