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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구조조정 시행하는 인사팀 직원 마음은 어떨까 … “부끄러움 알아야 인간 아닐까요?” 〈해야 할 일〉 박홍준 감독

씨네플레이
〈해야 할 일〉포스터 (사진 제공=명필름랩)
〈해야 할 일〉포스터 (사진 제공=명필름랩)

 

‘노동자는 선, 사용자는 악’이라는 이분법을 탈피한 한 편의 노동 영화 수작이 관객과의 만남을 기다린다. 9월 25일 개봉하는 <해야 할 일>(감독 박홍준)이 그 주인공이다. 한양중공업 입사 4년 차 강준희 대리(장성범)는 인사팀으로 발령받은 직후, 150명을 정리하라는 구조조정 지침을 마련하라는 지시를 받는다. 하고 싶지 않지만, 회사를 살린다는 명분으로 정리해고자를 선발하지만, 회사는 입맛대로 해고 대상자를 추린다. 이제 준희는 해고자 명단에 오른 존경하는 선배와 친한 친구 사이에서 선택을 해야만 한다.

구조조정은 외부 시각에서는 노사 간 갈등으로 인식된다. 내부 사정은 다르다. 구조조정 명령을 내린 주체는 빠지고, 노동자끼리 다툰다. 구조조정 후 산산이 조각나버린 직원들 간의 유대와 살아남았다는 일말의 안도감, 언제 잘릴지 모른다는 불안감만이 유령처럼 조직을 떠돌아다닌다. 그렇게 노동자들은 거대한 자본의 힘 앞에서 다양한 형태로 패배한다.

데뷔작에서 연출과 각본을 맡은 박홍준 감독은 실제 조선소 인사팀에서 4년 6개월 일했던 경험을 시나리오에 녹였다. 퇴사와 함께 본격적으로 시나리오 작업에 들어갔고, 명필름랩 6기로 합류하며 영화 기초를 다진 박홍준 감독은 “노동 문제를 다루는 이야기들은 주로 구조조정의 직접적인 피해자들이 회사를 상대로 싸우는 형태로 그려져 왔다. 그렇다면 구조조정의 실행자로서 그저 자신의 해야 할 일을 할 뿐인 인사팀 노동자들은 과연 어떤 모습일까? 구조조정 과정을 둘러싼 다양한 층위의 인물들을 통해 우리 시대 노동환경의 본질에 대한 이야기를 관객들과 함께 나누고 싶다”고 영화 기획 의도를 설명했다. 부산국제영화제를 비롯한 유수의 독립영화제 주요 부문 6관왕을 휩쓸며 작품성을 인정받았다. 해고 대상자가 아니라, 해고 실행자인 인사담당자 주인공의 시선에서 진행되는 <해야 할 일>의 박홍준 감독을 만나 이야기를 들어봤다.


 

〈해야 할 일〉로 장편 데뷔한 박홍준 감독. (사진 제공=명필름랩)
〈해야 할 일〉로 장편 데뷔한 박홍준 감독. (사진 제공=명필름랩)

 
작년 부산국제영화제에서 프리미어로 선보이면서 수상도 했고요, 이후 많은 영화제에서 상을 받으셨죠. 기대하셨나요?

​아뇨, 그렇게까지 기대는 하지 못했죠. 사실 서울독립영화제 같은 경우는 미리 연락을 줄지 알았는데, 연락이 없기에 뒤풀이나 가야지 하고 갔는데 배우도 저도 상을 받아서 얼떨떨했습니다. 그래도 기분은 좋았죠.

9월 25일 개봉을 앞둔 소감은 어떠세요?

​아무래도 떨리죠. 사실 영화제에는 전반적으로 영화에 호의적인 분들이 많잖아요. <해야 할 일>이 정치적 색채도 있는 영화라 일반 관객들 반응이 궁금하면서 두렵기도 합니다.

영화제 버전과 개봉 버전에서 달라진 부분이 있나요?

​거의 없어요. 부산국제영화제 상영하고 서울독립영화제에서 틀기 전에는 조금 편집을 하긴 했어요. 크게 달라진 건 없고, 흐름을 좀 더 매끄럽게 하려고 컷 길이를 좀 줄이고, 불필요한 부분을 덜어낸 정도죠.

제목이 정말 인상적인데요. 처음부터 <해야 할 일> 이었나요?

초고 때부터 제목을 그렇게 정했어요. 이 영화는 ‘회사 안에서 해야만 하는 일을 해야 하는 상황’과 ‘사회 안에서 한 명의 시민으로 살아가기 위해 해야 할 일’, 이 두 개의 감정과 목표가 계속 충돌하면서 가는 영화라고 생각했어요. 그리고 ‘해야 할 일’이라는 제목 자체가 시나리오를 쓰기 위한 가이드라인이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일단 그렇게 제목을 정해두고 쓴 거죠. 주변에서도 시나리오 때나, 영화를 보고 난 후나 다 제목이 너무 찰떡이라고 해주셨어요.

 

〈해야 할 일〉
〈해야 할 일〉

 

영화의 출발점은 무엇이었나요? 자전적 요소가 녹아 있다고 들었습니다.

​실제로 제가 조선소에 2015년에 입사해 인사팀에서 4년 반을 일했습니다. 2016년부터 전 세계적으로 조선업 경기가 안 좋아져서 구조조정에 돌입하는 분위기였어요. 국내에서도 문 닫는 회사들이 많았고요. 한국 정부 역시 조선업을 특별고용업종으로 지정해, 현장에서 고용을 유지해달라고 요청했죠. 인사팀에서 처음 겪는 일이다 보니, 스스로 나는 올바른가, 맞는 방향으로 살고 있는가 하는 회의감도 들었어요.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복합적인 분위기였는데요. 회사 안에서는 누가 그만둬야 하네, 안 되네 이런 논의들이 나오는데, 사회에서는 우리 사회를 좀 더 낫게 만들어야 한다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커져가는 상황이었죠. 그때 제가 사회와 분리됐다는 느낌을 처음 받았어요. 왜 자신이 사회랑 동떨어졌다는 느낌을 받는 일이 많지 않잖아요. 이렇게 살다가는 사회 속에 녹아들지 못할 거 같다는 복합적인 감정이 들었습니다. 당시 취미처럼 단편영화를 만들고 있었어요. 회사에서의 경험을 시나리오로 써봐야지, 하다가 시간이 지나서 이렇게 영화로 만들게 됐습니다.

그러면 영화 속 ‘준희’(장성범)가 거의 감독님이겠군요.

​제가 많이 투영돼 있죠. 아무래도 극화화는 과정에서는 준희가 저보다 좀 더 나은 사람이 되기도 하게 좀 다듬긴 했습니다.(웃음) 주변 상황이나 가정사라든가 이런 부분은 만들었지만, 기본적으로 준희가 고민하는 지점은 제가 느꼈던 것들이죠.

 

〈해야 할 일〉
〈해야 할 일〉


본격적으로 시나리오는 언제부터 쓰신 건가요?

​2019년 8월에 회사를 나왔습니다. 그때부터 쓰기 시작했죠. 2020년부터 명필름랩이랑 같이 작업을 했는데요, 2022년 초 부산영상위원회의 제작지원에 선정되기까지 2년 반은 계속 고쳤어요.

처음 썼던 시나리오랑 명필름랩 합류 이후 고친 시나리오랑 차이가 많이 나나요?

​아무래도 제가 처음 쓰는 장편이다 보니 지금보다 좀 더 길었고요, 인물도 많이 나오고 그랬죠. 명필름랩을 만나면서 전체적으로 줄이는 작업을 많이 했어요. 불필요한 인물들은 합치고요.(웃음)

 

〈해야 할 일〉
〈해야 할 일〉

 

실제 경험이 시나리오에 녹아 있다고 아까 말씀 주셨는데요. 영화로 만들 때 꼭 넣고 싶었던 장면이 있었나요?

​영화에서 딸 전화가 오는 장면이 현실 경험을 기반으로 한 장면입니다. 일하고 있는데, 어떤 분이 희망퇴직원을 내러 오셨어요. 그분이 회의실에 들어가자마자 전화벨이 울렸어요. 받았더니, 한 여자분이 “오늘 아버지가 마지막 출근이라고 하고 나가셨어요. 꽃을 보내드리려고 하는데, 어느 부서에서 일하시는지 모르겠어요”라며 울면서 전화를 한 거였습니다. 그때 기억이 강하게 남았죠. 시나리오를 처음 쓸 때부터 이 장면을 클라이맥스라고 생각했어요. 비인간적인 순간들이 이어지는 와중에 굉장히 인간적인 요소가 들어오는 장면이라서요. 영화적으로 감정을 증폭시킬 요소를 덧붙였습니다. 준희가 원래 자재팀에서 일하면서 장 부장님(강주상)과 관계가 있다가 인사팀으로 오게 됐다고 설정했죠. 창작 에피소드였다면 스스로 되게 뿌듯했을 텐데요.(웃음)

그 목소리 연기를 김향기 배우가 했더라고요.

​촬영 때는 스크립터가 대본을 읽어줬어요. 전문적으로 연기를 배우지 않은 스태프다 보니 느낌이 안 살더라고요. 편집할 때 아무래도 배우를 섭외해야겠다 생각했죠. 장 부장님이 딸을 준희랑 연결시켜주려고 하는 상황이니까, 전화하는 여자분은 20대 중반은 돼야 할 것 같았어요. 순수한 대사니 소녀 같은 느낌이면 좋겠다는 것, 또 아빠를 걱정하고 위하는 성숙한 마음이 공존하는 좋겠다는 생각으로 배우를 찾았어요. 그러다 김향기 배우가 떠올랐죠. 마침 그때 명필름랩에서 아직 공개되진 않은 영화 중에 김향기 배우가 출연하는 작품이 있었죠. 명필름랩의 이은 대표님께 혹시 김향기 배우가 녹음 때 하루 섭외 되느냐고 여쭸죠. 대표님도 직원들도 다 좋은 생각이라고 하셨고, 김향기 배우 역시 이야기를 듣고 흔쾌히 승낙해주셨습니다.

〈해야 할 일〉
〈해야 할 일〉


<해야 할 일>은 기존 노동 영화들과 달라요. 정리해고와 구조조정을 다루지만, 투쟁하는 장면이 주가 되지 않죠. 인사팀 직원들의 시선으로 진행되는, 어찌 보면 정리해고 대상자나 인사팀 직원들 모두 장기판의 말 같은 느낌이랄까요?

​말씀하신 것처럼 기존 노동 관련 영화나 드라마는 대부분 투쟁적이죠. 노사가 싸우는 이야기가 주예요. 노동자 측면에서 사용자 쪽은 ‘나쁜 사람들’로 그려지는 경우가 많더라고요. 사실 혐오가 편하고 쉽죠. 나쁜 사람이라고 단정 지으면 극성을 만들어낼 수도 있고요. 하지만, 그렇게 되면 노동 현실을 다루는 데 있어 이야기가 너무 단조로워지지 않을까 생각했습니다.

제가 실제 회사에서 일하면서 겪은 일도 있잖아요. 회사마다,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사실 사측 사람들도 대단히 나빠서라기보다는, 이들에게도 인간적 고뇌가 있죠. 생각이 많았어요. 인사팀에 있다가도 다른 팀에 가는 순간 언제든 정리해고 대상이 될 수도 있어요. 회사에서 살아남기 위해, 어쩔 수없이 가족 부양하기 위해 해야 하는 일이니까요.

그러면 도대체 이 문제를 만들어내는 잘못은 누구에게 있는 건가로 고민을 옮겼습니다. 시각을 틀어서 보니, 지금 이 상황이 이 사람들을 이렇게 만든 것이더라고요. 나쁜 사람이 아니라, 본성이 그런 게 아니라면 이 문제의 원인이 어디에 있는지 다 같이 고민해볼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크게 보면 자본주의 시스템일 테고, 좁혀 보면 기업을 운영하는 오너의 문제이겠죠. 너무 사측이 나빠 보이는 것보다는 다 같이 시야를 넓혀서 보자는 생각으로 만들었습니다.

주인공 준희 역할을 맡은 장성범 배우의 시선으로 영화가 진행되잖아요. 너무 안타까운 캐릭터인데, 아까 감독님 자신이 투영된 캐릭터라고 설명하셨는데, 당시 상황을 좀 더 듣고 싶어요. 장성범 배우 캐스팅 비하인드도요.

저는 준희랑 다르게 당시 결혼을 안 했던 상황이어서 탈출할 수 있었죠.(웃음) 2010년대부터 중국 조선소들이 엄청 생겼어요. 회사 몸집을 키우느라 저가 수주를 많이 했죠. 이른바 조선업계에서 ‘치킨게임’이 벌어진 건데요. 그렇게 쌓였던 것들이 2016년 말에 터진 겁니다.

장성범 배우를 처음 본 건 KBS 드라마 <땐뽀걸즈>(2018)였어요. 구조조정이 한창인 쇠락하는 조선업의 도시 거제에서 댄스스포츠를 추는 여상 아이들을 그린, 약간 <빌리 엘리어트>(2000) 같은 성장 드라마인데요. 신임교사 역으로 장성범 배우가 나왔죠. 나이가 20대 초반인데 되게 안정적으로 연기를 하더라고요. 얼굴이 가진 힘도 좋고요. 떠 있는 연기가 아니라, 차분하게 자신의 연기를 한다는 느낌을 받았어요. 시나리오를 수정하던 때였는데, 이런 얼굴의 배우가 준희를 연기해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캐스팅 후 촬영장에서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실제로 자기 생각이 단단하게 서있어요. 그러면서 다른 사람들 연기하는 걸 잘 들어주더라고요.

 

〈해야 할 일〉
〈해야 할 일〉


인사팀장 역을 맡은 김도영 배우는 조연인데도 연기가 너무 좋더라고요. 이번 영화로 상도 많이 받으셨던데, 개인적으로는 완전 ‘카멜레온’ 같은 조직원 느낌이었어요. 부하직원을 구워삶는 데 명분도 있으면서 인간적으로 다가가죠. 상사를 대할 때는 자존심을 보여주면서 실리도 취하죠. 인사팀장 캐릭터는 어떻게 만드신 건가요?

​준희 역의 장성범 배우가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올해의 배우상을 받았고요, 인사팀장 김도영 배우가 서울독립영화제에서 올해의 배우상을 받았습니다.(웃음) 인사팀장 캐릭터부터 말씀드리면, 저는 이 사람이야말로 회사를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 아닐까 생각했어요. 물론 회사를 사랑하는 저마다의 방식이 있겠지만, 회사에 대한 로열티, 충성심은 가장 강한 거죠. 사실 본부장은 회사보다는 회장에게 충성하잖아요.

준희를 구워삶는다고 표현하셨는데,(웃음) 촬영할 때 김도영 배우에게 이 장면에서만큼은 인사팀장의 진심이라고 생각하고 연기해달라고 했어요. 나이로 보면 인사팀장은 아마 90년대에 입사했을 겁니다. 대한민국 조선업이 세계 1위에 오르는 과정을 다 겪으면서 자부심도 강하죠. 이 회사를 너무 사랑하다 보니, 회사가 망가지는 모습을 보는 것 자체가 너무 가슴 아픈 겁니다. 그러니 사람마다 성향은 다르지만, 회사를 다시 생동감 있는 조직으로 바꾸는 것이 본인의 사명이라 생각해서, ‘저 사람은 빨리 잘라야 한다’, ‘새로운 피를 수혈해 회사를 바꿔야 한다’고 굳게 믿는 사람이죠. 조직에 충성하다 보니 본인은 내적 갈등이 있겠고요.

인사팀장 역의 김도영 배우 캐스팅은 어떻게 하셨나요?

​김도영 배우뿐만 아니라 캐스팅에 대한 전반적인 이야기를 먼저 말씀드리고 싶어요. 저는 이 영화에 낯선 얼굴이 많았으면 했어요. 익숙한 배우라든가, 특정한 이미지가 박힌 배우가 나오면 관객이 ‘아, 이건 영화구나’ 할 것 같아서요. 저는 이 영화를 관객이 영화라기보다 ‘현실적인 풍경’으로 봐주길 바랐습니다. 그래서 낯선 얼굴을 찾았어요. 그러면서 하나의 숙제는 사투리였습니다. 배경이 경남입니다. 조선소는 좋은 일자리였기에 다양한 지역에서 사람들이 모이지만, 위치가 위치다 보니 사투리를 쓰는 사람이 압도적으로 많죠.

부산, 경남에서 활동하는 배우를 거의 다 봤어요, 정말.(웃음) 각 지역 영상위원회에서 관리하는 배우 DB도 다 찾아봤고, 부산 출신 배우들까지 뒤졌어요. 그때 김도영 배우가 레이더에 걸린 겁니다. 약간 냉철하면서도 군인 같은 느낌? 영화에는 안 나오지만 인사팀장은 ROTC 장교라는 설정이 있었거든요. 김도영 배우 역시 연극판에서 활동하면서 매체 연기를 거의 안 하셨더라고요. 매체에서 단역으로 주로 의사 역할을 하셨다던데, 영상 클립을 보면서 느낌이 좋아서 같이 하자고 말씀드렸죠.

 

〈해야 할 일〉
〈해야 할 일〉


조선업이라는 산업 특성상 남자가 많은 건 어쩔 수 없는데요. 홍일점인 인사팀 여자 대리(장리우)가 결국 회사를 그만두는 장면도 인상적이더라고요.

​사실 요즘은 많이 없어졌는데요. 지방의 제조업 기반 회사에는 아직 남아 있는 거 같아요. 여상이나 전문대 졸업 후 입사했는데, 단순 업무만 반복하는 여직원들요. 진급도 안 되고, 언젠가 결혼하게 되면 육아휴직하면서 자연스럽게 퇴직하는 분들이 꽤 있었어요. 제가 회사에 있을 때 그런 것들이 굉장히 폭력적이라는 생각을 많이 했던 거 같아요. 한 개인의 발전 가능성을 싹 막아둔다는 느낌이랄까요? 그들이 아무리 노력해도 같은 업무만 주어질 뿐이니까요.


저는 조직이 개인에게 되게 다양한 방식으로 상처를 입힌다고 생각했어요. 희망퇴직이라는 큰 사건이 벌어지면 대상자가 된다는 것만으로 상처를 받잖아요. 회사에서 자신이 쓸모없는 사람이 됐다는 거니까요. 버티는 사람도 있겠죠. 그런데 그 여자 대리는 이미 자존심에 스크래치가 더 이상 날 곳이 없을 정도로 나 있는 거죠. 결국 구조조정 시국이라는 산까지 오게 됐을 때는, 회사가 이미 조직 구성원들에게 상처를 많이 입혔을 거고, 한 명쯤은 자신이 먼저 손을 들고 나가면, 사측에서도 좋아하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준희 아내(이노아)가 남편의 매력을 묻는 친구의 질문에 “지질하긴 해도 뭔가 잘못했으면 부끄러움이 뭔지는 알아요”라는 대사를 합니다. 저는 어쩌면 이 대사가 영화를 관통하는 메시지처럼 들리더라고요. 인간이라면 부끄러움을 알아야 한다는?

딱 그 생각으로 쓴 겁니다.(웃음) 초고를 쓸 때까지만 해도 거기까지 생각하진 못했어요. 내가 이 이야기를 쓰는 동력이 뭘까를 고민했죠. 결국은 부끄러움이었던 거 같아요. 그래서 그런 설정들이 필요했어요. 그런 질문을 던지는 준희 친구는 한때 좀 더 나은 세상을 꿈꾸며 함께 집회를 했던 사람인데, 그렇게나 욕하던 언론사에 입사할 정도로 변절했다는, 그런 설정들요.

 

〈해야 할 일〉
〈해야 할 일〉


배경음악으로 민중가요들을 많이 썼던데요. 그 장면에서 유독 ‘청계천 8가’(노래 천지인)가 길게 나오더라고요. 참 좋아하는 노래인데, 장면과 묘하게 맞아떨어져요. 특별히 그 노래를 고른 이유가 있나요?

​저도 좋아하는 노래여서요.(웃음) 따뜻한 노래잖아요. 회사에서 비인간적인 일들을 해나가는 와중에, 준희는 위로받을 사람이 없어요. 선배를 만나도 “너도 똑같아”라는 이야기를 듣고요. 그럴 때 그냥 따뜻한 노래가 나오면 좋겠다, 준희를 위로할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해서 ‘청계천 8가’를 넣었어요.

준희가 조언을 얻기 위해 찾아가는 어머니도 창조한 캐릭터인가요? 실제 감독님 어머니가 투영된 건지도 궁금해서요.

​저희 어머님은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미용실 하세요.(웃음)

그렇군요. 그런데 준희가 꼭 엄마까지 찾아가야 했을까, 하는 의문이 들더라고요.

​말씀하신 것처럼 전체적인 흐름상 필요 없이 느낄 수도 있어요. 그런데 저는 준희가 처한 상황에 대해 좀 더 이야기해주고 싶었습니다. 너무 답답한 상황에서 어디 말을 할 수도 없잖아요. 엄마는 20~30년 넘게 활동가로 살아왔다는, 사회운동을 하느라 준희가 어릴 때 이혼했다는 설정이었고요. 준희는 본인이 그런 상황에 놓여서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를 고민하는 인물이니, 그에 대한 답을 찾는 과정에서 엄마에게까지 간 거죠. 와이프에게 말할 수도 없고, 선배도 답을 못 주니까요. 데면데면하게 20년 넘게 살아온 모자 관계인데, 준희가 대학에서 사회 운동에 관심을 조금 가진 것도 ‘엄마는 대체 무엇 때문에 이런 일을 했을까’ 하는 궁금함 때문이었겠죠.


그런데 우리 세대는 학생 운동으로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그럴 때 엄마라면 명쾌한 답을 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으로 준희가 엄마를 찾아간 겁니다. 그런데 엄마도 뾰족한 수가 없어요. “아유, 힘들겠네” 정도죠. 그러고 나면 준희는 본인 스스로 답을 찾아야만 합니다. 준희에게 그런 상황을 만들어주고 싶었어요.

 

〈해야 할 일〉
〈해야 할 일〉


본인 스스로 답을 찾아야 하는 상황까지 준희를 몰아넣으셨습니다. 그런데 회사 사정은 또 바뀌죠. 그런 의미에서 엔딩씬이 의미심장합니다. 저 멀리에서 준희가 카메라쪽으로 다가오는 장면을 롱샷, 롱케이크로 담으셨어요. 어떤 의도를 담으신 건가요?

준희가 그 프레임 안에 갇히길 바랐습니다. 영화에서는 새해가 밝아요. 준희는 신년사 대자보를 붙이죠. 해가 떠오릅니다. 새해라면 항상 희망찬 기분일 텐데, 사실 이들의 상황은 그렇지 않죠. 당장 회사를 떠날 수 있는 상황도 아니니, 카메라 쪽으로 걸어오지만, 결국 이 프레임에서 벗어날 수 없는. 그래서 관객들이 가장 많이 물어보는 질문이 바로 그거예요. 그래서 준희는 어떻게 됐느냐고요.(웃음)

어떻게 된 겁니까?(웃음)

​본인이 준희라면 어떤 선택할 건지, 그걸 같이 고민해보자고 만든 영화가 이겁니다.(웃음) 어떤 관객은 준희에게 이입할 수도 있고요, 연배가 있는 관객이라면 인사팀장, 장부장에게 이입해 영화를 볼 수 있겠죠. 이 영화를 보고 나서 자신이 준희라면 어떡할지,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의 노동 현실에 대해 고민해보면 좋겠습니다.

영화가 미니멀하다는 표현은 좀 그렇긴 합니다만, 카메라를 불필요하게 움직이지 않는 점이 좋더라고요. 배우들이 그 공간에서 느끼는 감정, 스크린 속 공기가 그대로 느껴진다고 할까요? 켄 로치 감독 영화들도 떠오릅니다. 레퍼런스로 삼은 영화가 있을 거 같아요.

켄 로치 감독의 많은 영화들이 좋은 레퍼런스였습니다. 사실 인사팀 이야기를 다루는 영화는 별로 없더라고요. 로랑 캉테 감독의 <인력자원부>(1999)라는 프랑스 영화도 참고했어요. 아들이 파리에서 공부하고 기업에 취직하는데, 고향 지사에 인사담당자로 발령을 받아요. 생산직 노동자로 일하는 아버지를 해고해야 하는 상황을 그린 영화입니다. 해고 전문가들 이야기를 다룬 미국 영화 <인 디 에어>(감독 제이슨 라이트맨, 2010)도 참고했어요. 좀 결이 다르긴 한데, 한 인물의 심리를 따라가는 영화라는 점에서 <머니볼>(감독 베넷 밀러, 2011)도 도움이 됐습니다.

 

〈해야 할 일〉기자간담회 현장 (사진 제공=명필름랩)
〈해야 할 일〉기자간담회 현장 (사진 제공=명필름랩)


거의 10년 전 이야기를 영화로 만드셨어요. 2024년 한국 사회에 <해야 할 일>이 어떤 반향을 일으키면 좋겠다고 생각하세요?

​찍으면서도 고민했던 지점인데요. 딱 10년이면 2022년에 나왔어야 할 영화인데 지금은 2024년이라서요. 현대 시점을 살릴지, 거슬러 올라갈지 고민이었죠. 그런데 사실 한국사회의 노동 현실 자체가 그때나 지금이나 크게 달라진 게 없더라고요. IMF 이후 구조조정이나 희망퇴직은 우리 사회 어디선가 늘 진행되고 있습니다. 사람들도 당연하게 받아들이고요.

회사 다닐 때 충격적이었던 게 있어요. 포털 사이트에 희망퇴직 기사가 뜨면 댓글에 ‘위로금 많이 받아 좋겠네 ㅋㅋㅋ’ 같은 댓글이 있더라고요. 웃어넘길 일은 아니지 않나요? 젊은 사람이야 이직할 수 있다고 해도, 나이가 있는 분들은요? 그렇다고 한국 사회가 재취업 교육이 잘 이뤄지는 사회도, 재취업이 쉬운 나라도 아닌데 말이죠.
 

오늘날 한국 사회의 노동 현실에 대해 다시 한번 다 같이 이야기하는 자리가 만들어지면 좋겠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노동하면서 살아가고 있지만, 노동이라는 단어 자체에 아직도 프레임이 씌워져 있잖아요. 입에 올리기를 금기시하고요. 그런 것들을 좀 더 편하게 받아들일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해야 할 일〉 포스터
〈해야 할 일〉 포스터


감독님이 생각하는 좋은 사회란 어떤 사회인가요?

너무 어려운 질문입니다.(웃음) 사실 어떤 측면에서는 정리해고나 구조조정은 받아들여야 하는 부분도 있다고 봐요. 산업 구조가 바뀌면서 실업이 발생하기도 하니까요. 그럴 때 어쩔 수 없지, 하고 받아들여야 하는 부분이 있긴 한데요, 아까 말씀드린 것처럼 너무 준비 없이 그 사람들을 밖으로 몰아내는 느낌이 강해요. 이 사람들이 새롭게 교육받고 재취업할 수 있는 기반, 제도적 뒷받침이 일단 있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러면서도 대량의 정리해고, 구조조정 같은 것들에 대해서는 조금 더 진지하게 봐야 할 것 같아요. 노사 간 대립으로만 볼 것이 아니라요. 늘 책임져야 할 사람들은 빠져있는 것 같아서, 책임져야 할 사람들이 책임을 져야 하지 않을까 생각하고 있습니다.

차기작은 뭐로 준비 중이세요?

​아직 정해진 건 없어요. 쓰려고 하는 소재의 키워드만 말씀드릴 수 있을 것 같아요. 환경, 교육, 전염병 그리고 이상심리? 이런 것들이 머릿속에서 혼재해 있는 상황입니다.

마지막으로 관객에게 한 말씀 해주신다면요.

​<해야 할 일>이라는 제목이 사실 영화를 고를 때 뭔가 ‘숙제’ 같은 어감이라 관객들이 잘 안 고를 거 같기도 해요.(웃음) 소재도 노동이라 무거울 거로 짐작하실 수도 있는데, 생각보다 영화가 무겁지 않습니다. 직장인이라면 불합리한 명령에 따랐던 경험을 떠올리면서 공감할 수 있고요. 주변 사람들과 이야기할 거리가 많이 생기는 영화예요. 게다가 낯선 얼굴이지만 보석 같은 배우들이 너무 연기를 잘합니다. 김도영, 서석규 배우는 이 영화 이후 캐스팅 제안도 많이 받고 있다고 해요. 상업영화 쪽에서도 연락이 많이 온다고 해서, 얼른 이분들 영화가 공개돼야 할 텐데 말이죠.(웃음) 극장에서 많이 봐주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