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해를 정리하고 되돌아보는 12, 이 시기 할리우드에선 각종 시상식들이 연달아 개최된다. 각 도시별 비평가 시상식들이 쭉 이어지며 한해 영화들을 복기하고, 연초의 빅3 골든 글로브와 영국 아카데미, 오스카 시상식으로 그 대미를 장식한다. 여기에 맞춰 완성도 높은 영화들이 개봉해 반응을 살피고, 여론을 조성하며 시상식에 대비한다. 따라 한해 결산의 느낌보단 오히려 시상식에 더 초점이 맞춰진 면도 없지 않다. 그래서 아예 한해를 정리하는 의미의 베스트 목록보단 연말과 연초 시상식에 가장 많이 오르내린(그리고 오르내릴) 2017 할리우드 사운드트랙 리스트 5’를 골라보았다.
 
안타깝게도 이 명단에선 제외했지만 인상적이고 주목할 만한 사운드트랙들을 먼저 간략하게나마 언급하고 본문으로 넘어가고자 한다. 그리고 한스 짐머의 <덩케르트>와 한스 짐머와 벤자민 월피쉬의 <블레이드 러너 2049>는 이미 앞서 다룬 바 있기에 이번 포스팅에서 다시 다루지 않는다. 여기에 소개하지 않았다고 해서 이 두 작품이 시상식 후보작에 들어가지 않는다는 건 아니다. 오히려 두 작품 중 하나는 반드시 후보에 들어가 있을 거라 예측된다. 넘버링은 했지만 리스트는 한국 사운드트랙과 마찬가지로 무순이다.

올 더 머니 / 빌리 진 킹: 세기의 대결

케빈 스페이시의 성추문이란 악재에도 불구하고 크리스토퍼 플러머를 긴급 투입해 영화를 예정대로 마무리한 리들리 스콧의 <올 더 머니>는 음악도 눈여겨 봐야 한다. 최근 몇 년간 다니엘 팸버턴은 가장 좋은 결과물들을 쏟아내고 있다. <빌리 진 킹: 세기의 대결> 음악을 만든 니콜라스 브리텔 역시 지난해 <문라이트>의 후보 지명이 갑툭튀가 아니란 걸 증명해냈다. 배우를 넘어 뛰어난 각본 솜씨를 지닌 그레타 거윅의 단독 연출작 <레이디 버드>의 음악을 담당한 존 브라이언은 언제나 저평가받아온 작곡가였다. 이번 작품 역시 상대적으로 음악은 주목받지 못했다. 존 윌리엄스의 <스타워즈: 라스트 제다이>는 따로 언급하는 게 민망할 정도다.

레이디 버드 / 코코

현재 할리우드에서 가장 잘 나가는 마이클 지아치노가 올 한해 내놓은 작품들은 모두 평균 이상의 완성도를 들려줬다. 그 중 대망의 삼부작을 마무리한 <혹성탈출: 종의 전쟁>과 픽사의 19번째 작품이자 그의 6번째 픽사 애니인 <코코>의 음악은 퍽 인상적이었다. 스산하고 황량한 감성을 선사한 닉 케이브와 워렌 엘리스의 <윈드 리버>도 빼놓을 수 없고, 거장의 품격을 여실히 드러낸 필립 글래스의 제인 구달다큐 <제인>도 아름다운 미니멀리즘을 선사했다. 데이빗 로워리와 꾸준히 호흡을 맞춰온 다니엘 하트의 <고스트 스토리> 역시 언급할 가치가 있는 스코어였다. 할리우드 외에 다른 나라 영화음악들에 대해 다루지 못해 아쉽다.

제인 / 고스트 스토리

더 포스트
by 존 윌리엄스

1971년 미국 정부가 베트남전 발발에 직간접적으로 관련, 개입돼 있음을 명시한 국방부 기밀문서 펜타곤 페이퍼를 폭로한 워싱턴 포스트지의 실화를 다룬 작품으로, 스티븐 스필버그가 <레디 플레이어 원>을 제작하던 도중 이를 미뤄두고 촬영할 만큼 꽂힌 영화였다. 메릴 스트립과 톰 행크스라는 걸출한 배우들에, 신인이지만 압도적인 각본을 선사한 리즈 한나의 필력과 명불허전 영화 연출의 달인 스필버그의 조합이 어우러져 <캐치 미 이프 유 캔><뮌헨>, <스파이 브릿지>에 이어 또 한 번 미 근현대사를 감동 깊게 조망해내고 있다. 여기에 힘을 보태는 건 당연하게도 29번째 파트너십을 이어가고 있는 마에스트로 존 윌리엄스의 위대한 음악이다.

<닉슨><뮌헨>에 이어 굉장히 오랜만에 만나는 다크한 느낌의 존 윌리엄스 스코어며, 오케스트럴 사운드 아래 잔잔하게 깔리는 일렉트릭 효과 또한 생소한 면모이기도 하다. 동료인 데이빗 샤이어와 마이클 스몰로 대표되던 70년대 정치스릴러 스코어를 의도적으로 연상케 하기도 하고, 소싯적 재즈 피아니스트로 많은 연주를 담당했던 솜씨가 얼핏 드러나는 피아노 솔로곡도 선보여 마냥 크고 중후했던 사운드에서 살짝 빗겨난 접근법도 신선하게 다가온다. 아울러 부패한 정부와 맞서 신념과 희망을 지켜내는 영웅담의 음악으로 윌리엄스만큼 찬가(讚歌)를 원숙하게 잘 다뤄내는 작곡가가 또 있을까 싶을 정도로 뜨거운 울림과 감동도 선사한다.

'Main Theme'

이 작품을 먼저 맡는 바람에 85세 고령의 존 윌리엄스는 스필버그 차기작인 <레디 플레이어 원>의 음악을 알란 실베스트리에게 넘길 수밖에 없었다. 그들의 서른 번째 협업은 다음으로 미뤄진 셈. 건강상의 이유로 토머스 뉴먼이 음악을 맡았던 <스파이 브릿지>22년 전의 <닉슨>의 스코어와 비교해보는 것도 흥미로울 듯 싶다.


셰이프 오브 워터: 사랑의 모양
by 알렉산드르 데스플라

올해 베니스 국제 영화제 황금사자상을 수상한 길예르모 델 토로의 이 신작 영화음악은 현재 세계에서 가장 바쁜 영화음악가 알렉산드르 데스플라가 맡았다. 그간 세계적인 명장들과 국적을 가리지 않고 두루 호흡을 맞춰왔던 데스플라는 델 토로가 원하던 지점을 정확히 꿰뚫은 몽환적이면서 낭만적이고 동시에 어둡기 그지없는 사운드로 이 동화 같은 영화에 독특한 질감을 안겨주었다. 그간 마르코 벨트라미와 대니 엘프만, 하비에르 나바레테와 페르난도 벨라스케즈 등과 호흡을 맞추며 고딕적이고 다크한 사운드를 창출하는 데 심혈을 기울인 델 토로는 여기에 로맨스 기운을 강하게 얹어 복고지향적인 시공간 속의 따뜻한 휴머니즘을 설파한다.

물속에서 사는 어류인간이 등장하는 만큼 물의 질감을 음색으로 표현하기 위해 워터폰과 유리 하모니카와 같은 독특한 악기들이 동원됐으며, 이는 신비스러우면서 기괴하고 동시에 아름다우며 황홀경의 사운드를 선사한다. 여기에 아코디언과 휘파람, 하프와 피아노들이 어우러지며 낭만적인 프렌치 스타일로 동화적인 로맨스를 포장하는 한편, 프릭스 장르에 어울릴 법한 어둡고 긴장감 넘치는 방점도 잊지 않는다. 마치 전체적으로 <아멜리에><고지라> 톤이 섞인 듯한 사운드트랙으로 이질적인 두 장르를 효과적으로 섞어낸 알렉산드르 데스플라의 미려하고 깔끔한 솜씨를 유감없이 즐길 수 있다.

‘You’ll Never Know’

낭만적이기 이를 데 없는 삽입곡들의 역할도 크다. 세계적인 소프라노 르네 플레밍이 영화를 위해 특별히 부른 ‘You’ll Never Know’를 비롯해, 마들렌 페이루의 ‘La Javanaise’와 앤디 윌리엄스의 ‘A Summer Place’, 카르멘 미란다의 ‘Chica Chica Boom Chic’ 그리고 카테리나 발렌테와 실비오 프란체스코가 부르는 ‘Babalu’ 등 그 어느 것 하나 버릴 게 없다.


팬텀 스레드
by 조니 그린우드

이번 <팬텀 스레드>를 끝으로 연기의 신다니엘 데이 루이스가 은퇴한다고 선언했다.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을 최초로 3번 수상한 유일한 배우이고, 지독할 정도로 배역에 몰입하는 메소드 연기로 유명하며, 그런 만큼 과작을 하던 그가 폴 토마스 앤더슨과 10년 만에 두 번째로 만난 작품이다. 1950년대 런던 상류층 의상 디자이너가 한 여자를 만나게 되며 변모해가는 과정을 그리고 있는데, <데어 윌 비 블러드>부터 다큐멘터리 <주눈>까지 함께 해온 라디오 헤드의 멤버 조니 그린우드가 이번에도 음악을 맡았다. 그들의 다섯 번째 협업작으로 지금까지 개최된 미국의 각 도시별 비평가 시상식의 음악상을 독식(벌써 8개를 수상했다!)하고 있는 중이다.

130분의 영화에서 그린우드의 음악만 90분 가까이 차지한다고 한 만큼, 그가 작곡한 스코어가 갖는 비중이나 영향력이 전작들에 비해 대폭 커진 듯하다. 폴란드의 현대음악가 크시슈토프 펜데레츠키에게서 지대한 영향을 받았다고 종종 밝혔던 그이기에 혁신적이고 전위적이며 세련된 테크닉들을 시도해왔는데, 이번에는 1950년대를 무대로 삼고 있어 폴 토마스 앤더슨과 넬슨 리들이나 글렌 굴드, 벤 웹스터 등의 재즈 뮤지션들에 대해 얘기하고 많은 참조를 했다고 한다. 아름답고 우아하며 고풍적인 사운드가 역대급이란 평이 지배적으로, 이번 시상식 시즌의 가장 강력한 타이틀 홀더가 될 가능성이 농후하다.

'House of Woodcock'

밴드 기타리스트이기 전에 어린 시절부터 유스 오케스트라에서 활동했고, 다양한 악기들을 직접 연주하는 게 취미이며, 음악 이론을 정통으로 배운 작곡가답게 실험적이고 모험적인 사운드 구사를 두려워하지 않는 그의 색채는 인간의 심원으로 파고들어가는 철학적이고 심오한 폴 토마스 앤더슨의 영화에 더할 나위 없이 잘 어우러진다.


쓰리 빌보드
by 카터 버웰

코엔 형제와 꾸준한 작업으로 실력을 인정받았지만 유난히 상복이 없었던 게 바로 카터 버웰이다. 스파이크 존스나 찰리 카우프만, 빌 콘돈과의 오랜 협업도 가져봤지만 역시나 버웰을 시상식에 데려가는 데 실패했던 게 사실. 그 막힌 혈을 뚫어준 게 바로 지난해 토드 필립스와 함께 한 <캐롤>이었다. 이 아름답고 우아하며 가슴이 아려오는 사운드에 그는 드디어 골든 글로브와 오스카에 첫 지명되는 감격을 누렸다. 그리고 올해 마틴 맥도나와 세 번째로 호흡을 맞춘 <쓰리 빌보드>로 다시 여러 시상식들에 노크할 준비를 마쳤다. 앞서 소개한 <더 포스트>와 함께 올 한해 가장 미국적인 색채와 정서를 지닌 영화음악으로 감히 뽑을 만하다.

영화는 여러모로 <파고>가 떠오른다. 살풍경한 깡촌에서 일어난 범죄를 다루고 있고, 이를 블랙 코미디로 포장해낸 점, 그리고 주연인 프란시스 맥도널드의 놀라운 호연과 음악을 맡은 게 둘 다 카터 버웰이란 점에서 더욱 그렇다. 그러나 바이올린 솔로와 함께 심포닉 사운드를 전면에 드러내 강약을 조절하던 <파고>와 달리 <쓰리 빌보드>에선 피아노와 기타, 만돌린, 플루트 등의 솔로 연주를 앞세운 여백미 가득한 짧은 큐들로 프란시스 맥도널드의 절망감과 슬픔, 답답함 그리고 아이러니한 현실 상황을 극대화시켜 표현하고 있다. 연륜과 여유가 쌓인 버웰의 노련하고 담백한 소리들이 던지는 여운은 쉬 잊혀지지 않는 감정의 파고를 남긴다.

'Main Theme'

여기에 블루지한 사운드의 타운즈 반 젠트와 인디록계의 잘 알려진 뮤지션들이 뭉쳐 만든 슈퍼밴드 몬스터 오브 포크의 포크-컨트리 계열, 미시건주 출신으로 다양한 장르 곡들을 노래한 포탑스’, ‘조안 바에즈의 포크송과 에이미 안넬의 컨트리까지 미국을 대표하는 장르의 삽입곡들이 전달하는 정서 또한 영화의 분위기를 자아내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다키스트 아워
by 다리오 마리아넬리

올여름 다이나모 작전은 크리스토퍼 놀란에 의해 <덩케르크>로 개봉됐다. 그리고 올겨울 다이나모 작전의 정치적 뒷배경을 다룬 조 라이트의 <다키스트 아워>가 개봉을 앞두고 있다. 재밌게도 조 라이트는 이미 <어톤먼트>에서 덩케르크의 전장을 살짝 다룬 바 있는데, 이번엔 그 결단과 고뇌를 짊어진 윈스턴 처칠에게 포커스를 맞춰 웰메이드 전기 영화를 선보인다. 무엇보다 처칠에게 빙의돼 호연을 펼친 게리 올드만의 압도적인 연기가 일품으로, 잉글랜드 동년배 다니엘 데이 루이스와 수상 맞대결이 흥미로운 시상식 관전 포인트가 될 것으로 보인다. 음악은 조 라이트와 다섯 번째로 호흡을 맞추는 이탈리아 출신의 다리오 마리아넬리가 맡았다.

1984년생의 젊은 아이슬란드 태생의 피아니스트 비킹구르 올라프손을 앞세워 고전적이면서 진중한 미니멀 사운드를 펼쳐 보이는 <다키스트 아워>는 전기 영화에서 흔히 등장하는 영웅적인 스코어와는 거리가 멀다. 마치 알렉산드르 데스플라가 <아르고><유령작가> 등 일련의 현대 정치 스릴러에서 들려줬던 날렵하면서 리드미컬하고 모던한 방식으로 가장 위태로운 순간 가장 큰 권력을 잡게 된 처칠의 고뇌와 숙명, 책임에 대해 스케치해간다. 혼과 스트링의 반복적이고 점층적으로 고조되는 흐름에, 강력한 퍼커션이 뒷받침되고, 주도권을 잡고 끌고 가는 유려한 피아노가 만들어내는 긴박한 템포와 서스펜스는 상당히 인상적이다.
 
결의를 담아내듯 직선적이고 강직한 혼의 활용과 전쟁의 상황을 상기시키는 스네어 드럼의 찰진 주법, 스피디하게 몰아치는 피치카토까지 가장 어두웠던 시기에 가장 희망찬 사운드를 별다른 뚜렷한 테마 없이도 잘 들려준다. 여기에 <오만과 편견>, <어톤먼트>, <안나 카레리나> 등에서 들려줬던 감성을 슬쩍 드러내는 건 덤. 그렇기에 더욱 강렬하고도 세련되게 다가온다.


사운드트랙스 / 영화음악 애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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