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똥파리>(2008), <워낭소리>(2009), <파수꾼>(2011), <한공주>(2014) 등을 기억하는가. 이 작품들은 ‘저예산의 기적’이라는 수식어를 가진 독립영화이다. 한국 영화계에는 드물지만 간간이 관객들의 사랑을 받는 저예산 독립영화가 등장한다. 2024년, 그 뒤를 이을 강력한 후보가 나타났다. 오는 24일 개봉하는 영화 <엄마의 왕국>이다.
지난 19일, 서울시 종로구 모처에서 <엄마의 왕국>의 이상학 감독, 한기장 배우를 만났다. 이 작품으로 장편 데뷔를 한 감독과 배우는 기자의 질문에 차분하게 대답을 이어갔다. 두 사람의 한 마디 한마디에는 작품에 대한 고민의 흔적이 묻어있었다. 제25회 전주국제영화제 한국 경쟁 공식 초청작이자 올해 독립영화계의 기대작 <엄마의 왕국> 이상학 감독과 한기장 배우와의 대화를 전한다.

<엄마의 왕국>이 오는 24일 개봉해요. 소감 한마디씩 해주세요.
이상학 감독 골방에서 쓴 시나리오가 영화가 되어 개봉을 한다니 대단히 감회가 새로워요. 이 과정에서 정말 많은 분들의 도움이 필요했어요. 배우와 스태프를 포함해 배급, 홍보사분들까지 모두에게 감사하다는 생각이 먼저 드네요.
한기장 배우 감독님과 꼭 같이 작업을 하자는 얘기를 많이 했는데 그 약속이 <엄마의 왕국>을 이루어져서 감사해요. ‘이제 시작이구나’하는 생각과 함께 ‘더 열심히 해야겠다’는 마음이 들어요. 아직 보여주지 못한 모습들을 펼치고 싶은 욕심이 생기기도 하고요.

<엄마의 왕국>은 올해 전주국제영화제 경쟁 부문에 초청되면서 큰 관심을 모았어요. 전주에서 레드 카펫에 선 두 분의 모습을 봤어요. (<엄마의 왕국>의 한기장, 남기애, 유성주 배우와 이상학 감독은 지난 5월 1일 전주국제영화제 개막식에 앞서 레드 카펫 행사에 참여했다.)
이 다들 긴장을 많이 했는데 막상 레드 카펫에 오르니 배우 세 분은 너무 잘 걸어가시더라고요. 그런데 저는 나중에 보니까 마치 수행원처럼 옆에 있는 거예요. 저희끼리는 ‘감독이기보다는 경호원 같다’며 말이 많았죠. (웃음)
한 레드 카펫을 걷는데 팬분들이 남기애 선배님께 ‘너무 아름다우시다’며 환호를 보내주셨어요. 되게 기분이 좋더라고요. ‘우리 엄마 자랑스럽다’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이 GV에서도 좋은 질문이 많이 나왔어요. 특히 촬영, 조명, 음악, 미술 등 영화의 다양한 부분에 대해서 짚어주셔서 행복했어요. <엄마의 왕국>은 영화의 종합 예술적 특성을 최대한 보여주고자 노력했거든요. 전주 관객분들이 알아봐 주셔서 영광이었어요.
한 맞아요. GV가 끝나고도 관객분들이랑 사적인 이야기까지 나눌 정도로 깊은 대화를 나누었어요. 어떤 관객분은 감독님께 메일로 추가 질문을 하시기도 했어요.

두 분은 2018년 단편 <바보들의 배>로 처음 합을 맞추셨다고 알고 있어요. 서로의 첫인상은 어떠셨나요?
이 한기장 배우를 처음 만난 건 오래되었어요. 한기장 배우가 한국예술종합학교에 재학 중일 때 지인의 소개로 연극을 보러 갔다가 한기장 배우의 연기에 반한 거죠. 사석에서 만난 한기장 배우는 굉장히 투박한 매력을 가진, 연기밖에 모르는 친구였어요. 연기에 대한 열정이 엄청난 데다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이 굉장히 밀도 있다고 느꼈어요. 이후 <바보들의 배>를 찍으며 정말 대단한 배우라는 것을 느꼈어요. 특히 앙상블을 굉장히 잘 만드는 배우예요. 그래서 다시 한번 함께 작업을 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는데 2022년에 <엄마의 왕국>으로 다시 만난 거죠.
한 감독님을 치킨집에서 처음 만났을 때는 이미 대단한 감독인 줄 알았어요. (웃음) 그만큼 영화에 진심이었거든요. (당시 이상학 감독은 영화계에 입문하기를 희망하는 20대 후반의 감독 지망생이었다고 한다.) 또 배우들에 대한 존중감이 큰 감독이라 느껴졌어요. 이후 제가 공연을 할 때마다 보러 와서 이야기를 나누었어요. 그렇게 스며들 듯 가까워졌어요. 촬영장에서의 감독님은 굉장히 신뢰가 가는 연출이에요. 본인이 생각하는 명확한 그림이 있을 때는 제가 그것을 믿을 수밖에 없도록 설득을 하세요. 그런 점에서 배우는 오히려 굉장히 자유로움을 느끼죠.

두 분 모두 <엄마의 왕국>으로 장편 영화에 데뷔하셨어요. 그간 단편 작업은 많이 하셨고요. 단편 영화 작업과의 차이점이 있었나요?
이 <엄마의 왕국>을 만들면서 장편과 단편은 대단히 다르단 걸 깨달았어요. 한 시간 반 정도의 이야기를 끌고 가기 위해서는 시나리오뿐 아니라 연출과 연기 등 많은 논의가 필요했어요. 그래서 사전 작업을 대단히 열심히 했어요. 그럼에도 <엄마의 왕국>은 5억 미만의 저예산 작품이기에 제작 여건상 원하는 대로 모두 할 수는 없었어요. 제한된 상황 속에서 포기할 건 빠르게 포기하고 취할 건 빠르게 취하는 법을 배웠죠. 이 과정에서 배우, 스태프들과 더욱 돈독해지기도 했어요.
한 인물을 처음부터 끝까지 분석하고 가까워질 수 있는 시간을 보낼 수 있어 정말 행복했어요. 사실 그간 기술적인 연기로 소비된다는 생각에 스스로를 더 의심하거나 이 일에 대한 회의감을 느끼기도 했거든요. 하지만 <엄마의 왕국>을 준비하면서 스스로 성장한다는 느낌을 받았고 제가 연기를 시작하게 된 이유를 새삼 깨닫게 되었어요.
*이하 <엄마의 왕국>에 대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엄마의 왕국>은 기억을 잃어가는 엄마 주경희(남기애)와 비밀에 다가가는 아들 도지욱(한기장)의 이야기를 담는다. 어느 날 엄마 경희에게 치매가 찾아오고 그는 아들 지욱에게 ‘네 아빠를 죽였다’는 충격적인 고백을 한다. 무엇이 진실인지 알 수 없어 혼란스러운 지욱에게 삼촌 도중명(유성주)이 나타나며 의심은 점점 확신이 되어 간다.

처음 시나리오를 받았을 때 어떤 느낌을 받으셨나요?
한 강렬했어요. 하나의 라인을 따라가는 이야기라기보다는 뜨거운 에너지가 덩어리째 다가왔어요. 읽을수록 궁금한 것이 많아져서 빨리 감독님과 대화를 나누고 싶었어요.
<엄마의 왕국>은 명확한 하나의 장르가 아닌 다양한 장르가 결합되어 있는 형태를 띠고 있어요. 이런 방식으로 영화를 만드신 이유가 있을까요?
이 시나리오 단계부터 다양한 시청각적 효과를 사용해 관객들이 지루하지 않게 볼 수 있는 가족 미스터리극을 만들자는 목표를 가졌어요. 보통의 독립영화들은 예산이 부족하기 때문에 대화 장면을 위주로 찍거든요. 그럼에도 이 안에서 새로움을 줄 수 있는 장치를 찾으려고 했어요. 그래서 ‘가족’이라는 집단의 독특한 속성을 이용했어요. 가족은 장르적으로 휴먼 드라마이기도 하고 미스터리이기도 해요. 가장 익숙한 존재이자 낯선 존재이니까요.

배우의 입장에서 이렇게 다변하는 장르에 대한 연기가 쉽지 않았을 것 같아요.
한 사실 장르적 성향이 드러나는 후반부보다 초반부가 더 어려웠어요. 장르가 명확하게 드러나는 부분은 대본을 있는 그대로 잘 따라가면 되거든요. 그래야 장르와 인물이 같은 선을 탈 수 있어요. 그런데 사건이 드러나기 전에는 영화의 느낌과 인물의 상태가 충돌하는 부분이 있기 때문에 그 지점을 어떻게 녹여낼지가 관건이었어요.
오히려 일상에서의 뾰족함이 드러나는 부분을 표현하기가 더 어려웠을 수 있겠네요.
한 네. 도지욱이라는 캐릭터를 준비하면서 어느 순간 어디까지가 진실이고 어디까지가 거짓인지 헷갈렸어요. 그리고 그 단계가 넘어가니까 이게 중요하지 않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래서 지욱이 어디까지 기억하고 있는지 명확히 정하지 않았어요. 중요한 것은 관객들에게 입체적인 인물로 다가가는 것이고 무엇보다 저나 감독님이나 <엄마의 왕국>이 지욱의 잃어버린 과거를 찾는 이야기로 비추어지길 바라지 않았어요. 지욱이라는 인물은 경계 위에 놓여 있는 상태라고 생각했어요.
이 한기장 배우가 진실과 거짓에 대한 고민을 수백 번 하시고 나서 그 의문을 다 내려놓고 즉흥적이고 본능적으로 연기를 하셨을 때 매우 놀라웠어요. 그제야 이 글을 쓴 저도 이 이야기가 어떤 이야기였구나 하는 것을 알게 되었어요.
제작 단계에서부터 다양한 해석을 할 수 있는 작품이었군요. 이게 <엄마의 왕국>의 매력인 것 같아요.
이 맞아요. <엄마의 왕국>은 관객분들이 n차 관람을 하셨을 때 또 다르게 보일 수 있는 여지가 있는 작품이죠.
한 또 <엄마의 왕국>은 소수의 등장인물과 '집'이라는 한정적인 공간에서 진행돼요. 심리적으로 답답한 느낌을 주면서 동시에 문제에 대해 깊이 파고들죠. 이 지점을 극장에서 보시면 색다른 느낌을 받으실 수 있을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