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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슬픈 사람들 아니라 당당하게 살았던 이들로 기억되길” 〈조선인 여공의 노래〉 이원식 감독·강하나 배우

씨네플레이
〈조선인 여공의 노래〉 포스터 (사진 제공=시네마달)
〈조선인 여공의 노래〉 포스터 (사진 제공=시네마달)

‘오사카 지역 방적회사에서는 조선여자를 많이 쓰고 있다. 셋츠 방적에 54명, 미에 방적 지점에 40명, 그 외에 대여섯 명이 있는 곳은 여기저기 보인다. 내지 여자들과 비교하면 유순하고 근면하며 무엇보다 남자에 미치는 일이 없는 것이 큰 장점이다. 올 6월 모집인을 경남 진주에 출장 보내 데리고 왔다. 열네 살 난 여자아이부터 스물일곱까지 있다.’

1913년 12월 26일, <오사카 아사히> 신문 「방적의 조선 여공」 기사

각자의 자리에서 모두가 고통받던 일제강점기, 고국을 떠나 일본으로 간 소녀들이 있다. 가족을 먹여 살리기 위해서였다. 10~20대가 주축이었던 소녀 중에는 갓 열 살을 넘긴 아이도 있었다. 1854년 개항 후 서양의 신기술을 받아들인 일본이 방적산업으로 대호황을 누리며, 값싼 임금으로 24시간 방적공장을 가동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식민지 조선의 소녀들을 불러들인 것이다.

8월 7일 개봉하는 다큐멘터리 <조선인 여공의 노래>(감독 이원식)는 1910~1950년대 사이, 일본 오사카 지역 방적공장들에서 일했던 조선인 여공 22명의 증언을 담고 있다. 영화는 재일교포 4세 배우 강하나의 시선으로 시작한다. 영화의 과거와 현재를 연결 짓는 ‘프리젠터’로 나선 강하나 배우 덕분에 관객은 지금껏 알려지지 않았던 조선인 여공들의 삶에 한층 쉽게 이입할 수 있다. 조정래 감독의 <귀향>(2016)과 <귀향, 끝나지 않은 이야기>(2017)에서 위안부 피해 소녀 ‘정민’을 연기하면서 한국에 얼굴을 알린 그녀는 일본에서는 이미 베테랑 배우다.

이원식 감독은 우연히 읽은 고(故) 김찬정 작가의 동명 저서를 읽고 눈물을 흘렸다고 했다. 가족을 위해 머나먼 타지로 떠났던 소녀들은 그곳에서 ‘쓰레기’, ‘조선 돼지’라고 멸시받았고, 일본인 여공보다 못한 대우를 받았으며, 친일 조직 ‘상애회’로부터 급여를 강제 공제 당했던 사실을 확인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감독은 관객에게 당시 조선인 여공의 삶을 힘들고 슬프고 아프다고만 바라보는 시선을 넘어서기를 바란다. 허기에 굶주린 여공들이 일본인이 버린 내장(호루몬, ‘쓰레기’라는 뜻의 일본어)을 주워와 구워 먹으면서, 오사카의 명물 내장 요리의 기원이 된 점, 또 불의한 대우에 여공들이 연대해 쟁의를 일으켰다는 점 등을 객관적 사실로 영화에 삽입하며 조선인 여공은 불가항력적 사유로 일본에 왔지만, 주도적인 삶을 살았다고 강조한다. 이는 아직 생존해 있는 조선인 여공의 증언에서 오롯이 드러난다. 이원식 감독과 강하나 배우를 만나 <조선인 여공의 노래>에 대해 들어봤다.


〈조선인 여공의 노래〉 (사진 제공=시네마달)
〈조선인 여공의 노래〉 기자간담회 현장에서 이원식 감독과 강하나 배우. (사진 제공=시네마달)


<조선인 여공의 노래>의 출발점은 어디였나요?

이원식 감독 2017년에 우연한 일로 오사카에 갔어요. 하루키중학교를 방문했는데, 옆에 오래된 붉은색 벽돌 담장 윗부분에 십자가 흔적이 일정 간격으로 있더라고요. ‘도대체 이게 뭘까’하는 궁금증을 안고 돌아왔죠. 조사해보니, 담장은 조선인 여공들이 일했던 방적공장의 담벼락이었고, 십자가는 그들이 도망치지 못하게 철조망을 감아 고정하는 틀이었어요. 1910년 이후 가족을 먹여 살리러 조선에서 일본으로 온 소녀들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됐죠. 오랜 기간 고통과 차별을 받으며 인내의 시간을 보냈다는 것도요.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를 많이 알리고 싶어서 영화로 만들겠다고 결심했습니다. 그때부터 자료를 수집하고 펀딩을 신청하면서 2022년에 촬영에 들어갔습니다.

말씀하신 것처럼 강제징용이나 위안부에 비해 많이 알려지지 않았는데, 취재 과정에서 알게 된 특별한 이유가 있나요?

이원식 사실 조선인 여공들은 1910년 이후 자발적으로 일본행을 택한 이들입니다. 돈을 벌기 위해서 현해탄을 건너 오사카 방적공장에 취업한 이민자이자 이방인 노동자였죠. 당시 일본 경제는 방적산업과 군수산업으로 호황이었거든요. 조선인 여공의 역사는 민간 차원에서 이뤄진 부분이라 위안부나 강제 징용에 비해 상대적으로 덜 알려졌어요. 연구도 많지 않다는 걸 알게 됐고요. 그래서 더 알리고 싶은 마음이 컸습니다.

영화 제목이 고(故) 김찬정  작가의 저서 제목과 같습니다. 특별한 이유가 있었나요?

 

이원식 작가님에 대한 존경과 감사의 표현이었습니다. 조선인 여공의 존재를 인지한 후 다큐멘터리를 구성하는 과정에서 제게 가장 감동적인 부분은 파업이었어요. 나라를 잃은 상황이었고, 그 어린 소녀들이었습니다. 심지어 조선에 있지도 않아요. 책을 보면 여공들은 이민 노동자인데 불의한 대우에 파업을 여러 번 일으켰고요, 그중에 한 번은 일본인 여공을 위해 파업했다는 사실이 제게 울림이 컸습니다. 한일 관계를 다룬 영화가 많지만, 저희 영화는 좀 더 그런 부분을 다루고 싶었어요. 여기에 같은 민족이면서도 여공들을 핍박한 남성 친일 집단인 상애회도 숨기지 않고 드러내고 싶었고요.

〈조선인 여공의 노래〉 스틸컷. (사진 제공=시네마달)
〈조선인 여공의 노래〉 스틸컷. (사진 제공=시네마달)

영화 도입부가 상당 히 의미심장하더라고요. 오사카 사투리로 ‘호루몬’은 쓰레기를 의미하는데, 현재 오사카의 대표 내장 요리인 그 ‘호루몬’과 같은 단어고요. 감독님은 조선인 여공들을 ‘호루몬’으로 비유하셨습니다. 둘을 접목한 아이디어가 탁월합니다.

이원식 감사합니다.(웃음) 일본은 사실 메이지유신 전까지는 육류를 잘 먹지 않았대요. 이후 육류 를 섭취하면서도 내장은 다 버렸고요. 기록을 찾아보면, 당시 조선인 여공들이 급료를 받으면 고국의 가족에게 송금하고, 친일 조직인 상애회에 빼앗기고 나면 밥 사 먹을 돈이 없었대요. 그래서 일본인이 버린 호루몬, 쓰레기라는 의미의 내장을 주워다가 바닷가에서 구워 먹었다고 나옵니다. 영화에서 그 장면을 재연했죠. 그때부터 일본인들이 차츰 내장도 먹기 시작했다고 해요.

지금은 내장 요리를 통틀어 호루몬이라고 칭하죠. 조선인 여공들의 삶이 호루몬의 삶과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쓰레기로 버려졌던 내장이 지금은 즐겨 먹는 요리가 된 것처럼, 조선인 여공도 처음에는 쓰레기 취급을 받던 존재였죠. 쓰레기를 주워 연명해야 하는 삶이었지만, 그들의 삶까지 쓰레기는 아니라고 느꼈거든요.

〈조선인 여공의 노래〉 스틸컷. ((사진 제공=시네마달)
〈조선인 여공의 노래〉 스틸컷. ((사진 제공=시네마달)

 

제일교포 4세인 강 하나 배우를 프리젠터로 내세워 다큐와 재연 부분을 섞은 구성도 독특합니다.

 

이원식 <조선인 여공의 이야기>가 다큐멘터리다 보니 자칫 지루하거나 어려울 수 있다는 생각을 처음부터 했습니다. 많은 사람에게 조선인 여공의 이야기를 알리고 싶어서 만든 영화다 보니, 처음부터 관객이 여공들의 이야기를 최대한 잘 받아들일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했죠. 그래서 극영화 시퀀스를 도입했고요. 배우 역시 실제로 오사카에서 나고 자라며 활동한 배우들로 캐스팅했습니다.

놀랍게도 영화에는 당시 방적공장에서 일했던 여공 생존자 3인이 등장합니다. 어떻게 수소문해서  찾으신 건가요?

이원식 너무 오래전에 일어난 일이라  사실 생존 여공을 찾을 수 있을 거란 생각은 못 했죠. 살아계신다고 해도 80세는 훌쩍 넘기셨을 테니까요. ‘서울에서 김 서방 찾기’처럼 조급한 마음으로 수소문했어요. 재일교포가 많이 사는 지역 위주로 전단지를 만들어서 계속 돌렸고요. 한 달이 지나도 연락이 없었는데, 어느 날 키시와다 지역 노인케어센터에 여공 한 분이 계신다는 제보를 받은 겁니다. 거의 사돈의 팔촌까지 동원됐겠죠. 그날 저녁에 바로 찾아가서 뵀습니다. 그분을 만나면서 다른 생존 여공이 있다는 이야기를 듣게 됐고, 그렇게 세 분의 생존 여공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조선인 여공의 노래〉 속 인터뷰 (사진 제공=시네마달)
〈조선인 여공의 노래〉 속 인터뷰 (사진 제공=시네마달)

영화 촬영 기간 중에  가장 인상적이었던 순간이었겠네요.

 

이원식 그렇죠. 치매 걸린 분도 계셨는데, 어제 일은 기억하지 못해도 여공 시절의 일만은 또렷이 기억하고 계시더라고요. 이야기를 들으며 슬펐고요. 제가 조금만, 몇 년만 더 일찍 왔더라면 더 많은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을 텐데, 너무 늦게 와서 죄송한 마음이 컸어요. 할머니들을 만난 것 자체가 너무 감사한 일이었는데요. 제가 크리스천이다 보니, 뭔가 보이지 않는 존재가 우리를 연결해 준 것이 아닌가 하는 느낌이 드는 기적적인 순간이었습니다.

할머니들께 당신들 이야기를 영화로 만들겠다고 말씀드렸을 텐데 반응이 어떻던가요? 

이원식 정말 기뻐하셨어요. 젊은 시절 여공으로 일했던 기억은 가족들에게도 알리지 않은 채 살아오셨거든요 . 가장 젊었던 시절의 이야기를 해달라고 하니 술술 말씀하셨어요. 어제 일은 기억나지 않아도 그때 기억은 너무 생생하다고요. 같이 일했던 여공 친구들이 보고 싶다는 말씀도 하셨고요. 어쩜 이렇게 기억이 생생하냐고 여쭤봤는데, “맺힌 게 너무 많아 잊을 수 없다”는 말씀이 기억나네요.

〈조선인 여공의 노래〉 스틸컷. ((사진 제공=시네마달)
〈조선인 여공의 노래〉 스틸컷. ((사진 제공=시네마달)

 

세 할머니들에게 혹시 어 떤 공통점이 있던가요?

이원식 세 분 모두 대가족을 이뤘어요. 집에 증손자까지 수십 명이 있는 가족사진이 꼭 걸려 있더라고요. 그 사진을 보면서 ‘아, 조선인 여공의 삶을 과연 실패한 인생이라고 할 수 있을까? 오히려 너무나 잘 살아온 인생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방금 여공의 삶과 호루몬의 삶이 비슷하다고 말씀드렸던 것처럼요. 물론 고통스럽게 살다 돌아가신 분도 있겠지만, 제가 만났 던 영화에서 증언하는 할머니들의 이야기에서 그런 부분을 표현하고 싶었습니다.

혹시 할머니들이 영화 를 보셨나요?

이원식 일본에서 시사회를 했는데, 많이 우셨어요. 엄마 생각이 많이 난다고…. 그러면서도 되게 좋아하셨죠.

〈조선인 여공의 노래〉 스틸컷. ((사진 제공=시네마달)
〈조선인 여공의 노래〉 스틸컷. ((사진 제공=시네마달)

 

저도 뭉클해집니다. 다시 영화 이야기로 돌아가죠. 사실 영화 보기 전에는 일제강점기를 겪는 불쌍한 조선인 여공 이야기인 줄로만 알았는데, 후반에 보니 친일조직 상애회가 등장하 더라고요. 같은 조선인이면서 오히려 앞장서서 여공을 핍박한 상애회 존재는 영화를 찍기 전부터 인지하셨나요? 그 후손들이 어떻게 살고 있는지도 궁금합니다.  

 

이원식 자료를 조사할 때부터 인지하고 있었죠. 민감한 이야기일 수 있다는 생각도 했고요. 상애회에서 활동한 사람들의 후손이 여전히 오사카에 살고 있어요. 사회 지도층에도 있고요. 그렇다고 해서 이런 이야기를 알리지 말아야 하나 하는 고민은 전혀 하지 않았습니다. 나쁜 일본인이 있다면, 나쁜 조선인 이야기도 숨길 이유가 없죠. 그 모든 게 다 드러날 때에야 한국과 일본 사이에 새로운 이야기 그리고 관계가 시작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거든요.

<조선인 여공의 노래>는 어느 한쪽에 치우쳐서 ‘우리 정말 힘들었어’라고 말하는 신파 영화가 아닙니다. 정치적 상황에 휘둘리는 영화는 더더욱 아니고요. 조국을 빼앗기고 어린 나이에 가족을 지키기 위해 바다를 건너 공장에서 일할 수밖에 없었던 소녀들에 집중하는 이야기이기 때문에, 오히려 상애회 이야기는 더 알려져야 한다고 생각해요.

정확히 ‘상애회’ 뜻이 뭔가 요?

이원식 서로 상(相)에 사랑 애(愛)로 서로 사랑하는 모임이라는 뜻이죠….

〈조선인 여공의 노래〉 조선인 여공의 삶을 연구하고 기록한 히구치 요이치 목사 스틸컷. (사진 제공=시네마달)
〈조선인 여공의 노래〉 조선인 여공의 삶을 연구하고 기록한 히구치 요이치 목사 스틸컷. (사진 제공=시네마달)

그렇군요. 영화에 오 랫동안 조선인 여공의 역사를 추적하는 일본인 조력자가 눈에 띄더라고요. 역사학자이자 목사인 히구치 요이치 씨죠. 어떻게 만나게 된 건지 궁금합니다.

이원식 조선인 여공 자료를 조사하는 과정에서 분명 누군가 이들을 연구하고 기록한 사람이 있을 거란 생각이 들었어요. 물론 쉽게 찾진 않았죠. 몇 명을 거치면서 히구치 요이치라는 분이 있다는 이야길 들었습니다. 오사카 키시와다 지역에 당시 부임했던 목사님이었대요. 동네를 조사하면서 조선인 여공에 대한 이야기를 알게 됐고, 너무나도 마음이 아팠다고요. 그런데 왜 일본은 이들의 존재를 알리지 않고 묻어두는가 생각하면서 홀로 연구하고 정리했다고 하더라고요. 그 정리를 끝내고 일본 남부 시마바라로 이사 간 겁니다.

몇 단계를 더 거친 수소문 끝에 연락처를 알아냈죠. 전화를 드려 소개를 하고 이러저러한 사정을 말씀드렸더니 첫 말씀이 “당신을 기다리고 있었다”라고 하시더라고요. 저도 여공들의 역사를 기록한 누군가를 기다렸는데, 그분 역시 당신이 연구한 것들을 책으로든 영화로든 남길 사람을 기다리고 계셨던 거죠. 일주일 후 오사카에서 만나 방적공장을 함께 돌면서 증언 기록을 추가로 남길 수 있었습니다.

 

〈조선인 여공의 노래〉 스틸컷. (사진 제공=시네마달)
〈조선인 여공의 노래〉 스틸컷. (사진 제공=시네마달)

그런 사연이 있었군요. 이제 노래 이야기를 여쭤볼게요. 제목만 봤을 때 OST로 ‘조선인 여공의 노래’가 흘 러나올 거라 예상했는데, 후반부에서야 비밀이 밝혀지죠. 가사만 기록으로 남아 있다고요. 혹시 할머니들은 모르시던가요?

 

이원식 물론 여쭤봤죠. 모르시더라고요. 당시 방적공장들이 오사카 해안을 따라 엄청 많았어요. 너무나도 많은 공장이 있었고, 공장마다 상황이 달랐을 테죠. 저희가 찾은 노동요는 ‘키시와다’라는 가장 큰 방적공장에서 불렸던 노래였고, 시대도 약간 달랐어요. 저희가 찾은 노래는 모르시지만, 할머니들도 노동요를 불렀다고 기억은 하셨어요.

계속해서 멜로디 를 추적할 계획은 있으세요?(웃음)

이원식 계속 자료를 찾고 있어요. 그보다는 <조선인 여공의 노래>를 본 누군가가 찾지 않을까 하는 기대도 있습니다.(웃음)

〈조선인 여공의 노래〉 스틸컷. (사진 제공=시네마달)
〈조선인 여공의 노래〉 스틸컷. (사진 제공=시네마달)

 

이제 강하나 배우님 이야기를  들어볼게요. 2017년 <귀향, 끝나지 않은 이야기> 이후 7년 만에 한국 관객을 만나는데 소감이 어떤가요?

강하나 배우 한국 관객들의 반응이 정말 궁금해요. 일본에서 6월 말에 작게 시사회를 열어서 반응은 확인했는데, 한국 관객들이 영화를 보고 어떤 감정을 느낄지가 궁금합니다.

<조선인 여공의 노래> 에는 어떻게 합류하게 되셨어요?

강하나 어머니가 운영하는 극단을 통해 감독님이 연락을 주셨어요. 미팅하면서 조선인 여공에 대해 몰랐지만, 뜻깊은 영화가 되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 많이 배우겠다는 생각으로 출연을 결심했습니다. 딱히 고민은 안 했어요. 재일교포 4세라는 정체성 때문인지 역사 관련 작품 제안이 많이 들어오기도 하고요.

〈조선인 여공의 노래〉 스틸컷. (사진 제공=시네마달)
〈조선인 여공의 노래〉 스틸컷. (사진 제공=시네마달)

나고 자란 고향에 조 선인 여공들이 있었다는 이야기를 접했을 때 어떤 기분이었나요?

강하나 부끄럽지만 조선인 여공들이 어떤 삶을 사셨는지 구체적으로 몰랐어요. 증언집을 읽으면서 상애회의 만행이나 일본인 여공과의 차별 같은 사실을 알게 됐고요. 힘든 상황임에도 조선인 여공들이 자신의 권리를 위해 싸우는 모습을 보면서 감동받았습니다. 또 생존 할머니들을 만나면서 힘을 얻기도 했어요. 뭔가 친할머니 같은 따뜻함을 느꼈다고 할까요? <귀향> 때는 중학교 3학년이어서 힘든 것도 있었지만, <조선인 여공의 이야기> 현장에서는 긍정적인 에너지를 받았어요. 재일교포, 자이니치는 늘 차별과 함께 가는 존재지만, 그래도 앞을 보며 당당하게 살아가는 모습은 1세도, 4세도 같다는 걸 느끼면서 힘을 얻었습니다.

촬영 중에 가장 인상적이 었던 순간이 있었다면요?

강하나 감독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생존 할머니들을 만났을 때도 참 인상적이었어요. 영광이기도 했고요. 제 친구 할머니일 수도 있는 일이잖아요? 정말 가까운 이야기라는 걸 매일 느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영화 초반에 제가 프리젠터로 나오면서 재연 씬의 소녀와 눈이 마주치는 장면이 있는데, 정말 신기했어요. 정말 여공을 만나는 것 같은 느낌이 들기도 했거든요. 기억이 많이 나는 장면입니다.

〈조선인 여공의 노래〉에 출연해 증언한 생존 여공 할머니들 스틸컷. (사진 제공=시네마달)
〈조선인 여공의 노래〉에 출연해 증언한 생존 여공 할머니들 스틸컷. (사진 제공=시네마달)

어머니가 운영하는 극단이 재일교포 관련 연극을 많이 올리고 있고요. 강하나 배우 역시 한국에서 세 편째 영 화에 출연했는데 모두 일제강점기에 고통받은 여성 역입니다. 배우로서 이미지가 굳어진다는 우려는 없나요?

강하나 솔직히 없지는 않죠. 재일교포로서 이런 부분을 알리고 싶은 마음이 큰 한편, 배우로서는 이미지가 굳어지면 역할이 제한된다는 걸 잘 아니까요. 지금 한국에서 대학을 다니고 있는데 졸업공연하면 다음 학기가 마지막 학기에요. 고민하고 있어요. 새로운 도전도 하고 싶고요. 이미지를 싹 바꿀 수 있는? ‘어, 이 역할이 강하나였어?’하는 말이 나올 정도로 변신한 모습을 보여주고 싶어요.

하고 싶은 역할이 있다 면요?

강하나 한국 드라마를 많이 보는데 <나의 해방일지> 같은 휴먼 드라마에 출연해보고 싶긴 해요.(웃음)

이원식 호러에 도전해 보는 건 어때요?

강하나 도전은 하고 싶은데 무서워서 잘 못 봐요.(웃음)

이원식 제가 일본에서 강하나 배우가 연극 연습하는 걸 봤거든요. 물론 재일교포라는 정체성을 가진 연기자이기도 하지만, 정말 에너지가 넘치는 연기를 너무 잘해요. 분명 곧 (기존의 이미지가) 깨질 거라 생각하고 있습니다.

 

〈조선인 여공의 노래〉  스틸컷. (사진 제공=시네마달)
〈조선인 여공의 노래〉 스틸컷. (사진 제공=시네마달)

아까 일본에서 작게 시 사회를 열었다고 했는데, 일본 관객들 반응도 궁금하네요.

 

강하나 극단 배우들과 같이 봤어요. 다큐멘터리라고 하면 어렵고 어두울 거 같은 선입견이 있는데, 저희 영화는 중간에 극영화 형식도 있어서 보기 편하잖아요. 일본인 동료 배우가 “일본에 대한 비판이 아니라 조선인 여공들이 살아왔던 있는 그대로의 삶을 보여줘서 좋았다”라고 하더라고요.

이원식 돌아가신 여공의 따님, 70세가 넘은 분이 보고 제게 눈물을 글썽이며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저희 어머니 세대 여공들의 삶의 이야기를 비참하게 그리지 않아줘서 고맙다. 가족을 지키고 살았던 긍정적이고 당당한 모습으로 그려줘서 감사하다. 실제 우리 어머니가 그러셨다”라고요. 너무 감사했습니다.

<조선인 여공의 노 래>는 일본 개봉 계획도 있나요?

이원식 배급사와 이야기 중입니다. 일본은 공동체 상영이 많은 문화라고 해요. 개인적으로 연락이 오는 경우도 있어서요. 빨리 일본어 예고편을 만들라는 이야기를 듣고 있습니다.(웃음)

〈조선인 여공의 노래〉 포스터. (사진 제공=시네마달)
〈조선인 여공의 노래〉 포스터. (사진 제공=시네마달)

100년도 더 된 일을 영화로 만드셨어요. 개봉도 광복절에 즈음해서고요. 비슷한 시기에 <1923 간토대학살>( 감독 김태영·최규석)도 개봉합니다.

 

이원식 100년 전 조선인 여공에 대한 이야기죠. 현재 재일교포로 살고 있는 분들 이야기고요. 그런데 저는 그게 단지 100년 전 그들만의 이야기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당시 1세대로 일본에 정착한 여공들은 가족을 지키기 위해 열심히 일했고 성실하게 노력해서 대를 이어 현재까지 자손이 남아 있습니다. 이 어린 소녀들이 돈을 벌어 고국에 송금했다는 기록도 있고요. 1900년대 격동의 근대사를 산 우리의 이야기 아닐까요?

100년 전 이야기지만, 지금 전 세계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실제 전쟁이 일어나고 있고, 아이들이 돈을 벌러 외국으로 나가는 현실도 분명 있고요. 조선인 여공의 이야기는 100년 전 이야기지만, 현실의 우리에게 던지는 메시지가 분명 있다고 봐요. 조선인 여공의 이야기가 전해주는 긍정적인 메시지에서 관객들이 위로받고 희망을 발견할 수 있길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관객들에게 한 말 씀해 주신다면요.

이원식 영화를 만들면서는 조선인 여공의 숨겨진 이야기를 많이 알리고 싶은 마음이 컸어요. 개봉을 앞둔 지금 마음은, 정치적, 경제적으로 힘든 이 시기에 관객들이 조선인 여공들에게서 긍정적인 위로를 받으면 좋겠다는 겁니다. 광복절 연휴에 가족들이 꼭 함께 극장에서 보시면 좋겠습니다.

강하나 당시 조선인 여공, 소녀들이 힘든 상황 속에서도 너무나 밝고 긍정적으로, 또 당당하게 살아온 모습을 영화에서 확인하고 관객들도 힘을 얻어가면 좋겠습니다.

 

자 우리 여공들이여 오늘 일과를 말해보자

밤중에 한밤중 깊은 잠 들 때 잠을 깨우는

시끄러운 소리에 놀라 눈뜨고 머리 빗으며 세수하고

식당에 가면 먹을 시간 없어 된장에 밥 말아 쑤셔 넣듯 먹고

공장으로 가면 먼지가 하얀 산 같이 일어나고

전등을 태양 삼아 산 같은 하타를 끼고 시간이 되어

기숙사 돌아가면 빈 방에 들어가네

그래도 우린 또 하루를 살아가네

재일조선인 고(故) 김 찬정 작가의 『조선인 여공의 노래』에서 발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