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으로의 최소한의 예의와 책임

여느 회사원들이 그렇듯 문경(류아벨)도 사회생활이 버겁다. 전시기획 TFT를 이끌며 성과를 내는 것은 차라리 쉽다. 직원 3명의 단출한 팀. 정규직 직원이 계약직 직원의 성과를 가로채고도 되려 ‘을’질을 성토하며 눈을 흘기는 사이, ‘갑’의 몫을 대신하는 계약직 초월(채서안)은 군말 없이 야근을 하고 새로운 아이디어로 눈을 반짝인다. 한 명을 달래고, 다른 한 명의 앞날을 걱정하는 것은 선임인 문경의 몫이다. 파르르 위에 경련이 이는 것을 느끼지만 문경은 조금 더 인내심을 발휘해 본다.
대거리하고 싶은 울화를 도로 삼키는 건 자기 보신의 본능 때문만은 아니다. 어른으로 최소한의 예의와 책임을 문경은 생각한다. '사회생활이 다 그런 거지'라며 한 방향으로 쓸고 가려는 비질에 맞서 누구도 착취되고 희생되어선 안 된다는 지극한 상식을 되짚는 한 마디 말과 관심. 하지만 문경의 권한은 초라했고, 사내정치는 막강했다. 초월의 뛰어난 업무 능력을 어필하고, 만성적인 인력 부족을 호소했지만 채용은 엉뚱한 곳에서 진행된다. 초월의 채용이 좌절된 그날, 문경의 위경련도 악화된다. 끝내 입원을 한 문경이 핸드폰을 압수당한 채 휴식을 취하는 사이 계약이 만료된 초월은 회사에서 자취를 감춘다. 좌절감, 죄책감, 부채감. 초월의 부재 앞 문경은 복잡한 감정에 휩싸인다. ‘나갈 사람은 나가줘야 조직이 돌아가는 거야’라는 상사의 무심한 말에 ‘우리가 그렇게 대단하냐’라고 문경은 쏘아붙인다. 그리고 충동적으로 휴가를 낸다. 3일뿐이지만, 어렵게 얻어낸 휴가다. 초월의 고향 문경이 생각난 건 그때다.

초월과의 재회라는 옅은 희망을 품고 문경은 경북 문경으로 향한다. 만행 중인 비구니 가은(조재경)과 떠돌이 개 길순을 만난 건 우연이었다. 교통사고를 당한 길순의 주인을 찾고자 길동무가 된 둘은 함께 로드 무비의 서사에 오르고 문경에서 손녀와 함께 사는 유랑 할매(최수민)의 집에 당도하게 된다. 할매의 호의에 끼니를 나누고 잠자리를 나누는 사이 시린 사연들이 낡은 시골집으로 고여든다. 현실과 유리된 이 작은 우주에서 문경, 가은, 유랑은 각자의 아픔을 꺼내 보이며 정서적 연대의 하룻밤을 보낸다.
사회적 참사를 껴안은 존재들

계약직 직원과 죽은 동생의 모습이 겹치며 지키지 못했다는 죄책감이 문경을 이곳으로 불러들였다면, 가은은 살아남았다는 죄책감에 면벽 수행을 한다. 가은은 사회적 참사의 생존자다. <문경>을 연출한 신동일 감독은 비구니 가은의 사연을 빌어, 희생자 대부분이 10대 청소년이었던 인천 호프집 화재 참사를 소환한다. 화재 참사의 자리에 우리는 수많은 다른 참사를 호명할 수 있다. 세월호 참사, 이태원 참사… 세상이 망각한 그 자리를 당사자와 유가족은 여전히 고통스레 통과하는 중이다. 문경의 시골집 한편, 문을 걸어 잠근 유랑 할매의 손녀도 학교 폭력으로 입은 생채기를 나름의 방식으로 치유하는 중이다. 사회적 모순을 공적 시스템의 부재로 비난하는 것은 이 영화의 역할이 아니다. 사회적 폭력의 생존자들이 우연한 만남에 마음을 연다. 별거 없는 음식과 간단한 코드로 만든 노래를 나누며 서로의 마음을 들여다본다. 누구를 이해한다는 것은 어쩌면 이리도 쉬운 일이다. 그저 지나치지만 않는다면.
문경에서의 마법 같은 3일 후, 문경은 징계와 잔업이 기다리는 서울로 복귀해야 한다. 후배를 지키지 못했다는 자책과 직장에 대한 환멸은 그대로다. 번들거리는 얼굴을 한 상사를 대면할 자신도 아직이다. 그래도 얼마간은 버틸 것이다. 맨발로 흙바닥을 내딛던 감촉, 처음 안아본 털복숭이 생명체의 포근함, 숨겨뒀던 진심을 고백하는 나긋한 목소리, 혀끝에 남은 깔끔한 채식 요리의 맛과 그것을 만들어 준 이의 고운 마음 같은 것들이 문득문득 튀어나와, 그는 견딜 것이다.
치유의 시작과 끝은 강아지 '길순'으로 통한다

'불행이 있는 곳마다 신은 개를 보낸다'라는 어느 유명 시구는 영화 <문경>에서 유효하다. 사회적 참사와 폭력의 기억을 환기하는 영화 속 만남과 치유는 강아지로 시작해, 강아지로 완성된다. 문경과 가은은 돌연 나타난 길순을 구조하며 연을 맺고, 길순이가 잃어버린 자신의 개라고 착각한 한 할머니를 만나 그 집에서 하룻밤을 묵게 된다. 주요 인물들의 동선과 목적지가 길순의 갑작스러운 등장과 이동으로 추동된다는 점에서 길순은 진정한 <문경>의 주연일지 모른다. 등장인물들의 만남과 헤어짐을 바라보는 길순의 시점 샷은 인간들의 상처와 아픔을 긍휼히 여기는 '신'의 시선으로도 느껴진다. 길순의 연기가 어쩐지 익숙하다 했는데, 최근 개봉한 <핸섬가이즈>의 신 스틸러 봉구 역을 훌륭히 소화한 강아지 배우 복순이 또 한 번 메서드 연기를 펼쳤다. 교통사고로 고통스러워하는 연기와 상처받은 인간을 위로하는 롱테이크 장면은 배우 복순의 다음 연기를 기대하게 만든다.
배경을 보는 것만으로도 치유되는

<방문자>부터 <나의 친구, 그의 아내> <반두비>로 이어진 ‘관계 3부작’을 내놓으며 독립영화계에서 고유의 스타일을 펼쳐온 신동일 감독은 신작 <문경>으로 인간과 인간의 관계를 넘어 인간과 동물의 관계, 나아가 환경까지 범지구적으로 시선을 확장하고자 했다. 특히 눈길을 끄는 것은 후경에 넉넉히 펼쳐지는 문경시의 전원적 풍광. 로드무비 형식의 전개로 진행되는 영화에는 감독의 고향인 경북 문경의 윤필암과 선유동계곡, 용추계곡, 고모산성, 주암정, 진남교반, 잉카마야박물관 등의 명소들과 아름다운 풍광이 쉴 새 없이 이어진다. 영화 초반, 서울에서 사내 갈등을 다룬 부분을 제외하면 영화의 80% 이상이 경북 문경이 배경이라고. 참고로 영화 제목뿐만 아니라, 극 중 비구니 명지 스님의 속명인 ‘가은’ 또한 ‘문경시 가은읍’에서 따왔고 영화 후반 유랑 할매 집은 감독의 아버지가 태어난 집이다.

이제는 베테랑 반열에 오르고 있는 류아벨 배우, 장편영화에서 첫 주연 배역을 맡은 조재경, 최수민 배우의 남다른 케미도 영화를 살아 숨 쉬게 한다. 조재경 배우는 기독교를 믿는데도 삭발을 감행했고, <영심이>의 영심이, <달려라 하니>의 나애리 등을 맡으며 한국 성우계에 굵직한 발자국을 남긴 베테랑 성우 최수민도 성우로 50여 년 활동하다 영화라는 큰 세상으로 나와 첫 주연을 맡았다.
문화기획자 하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