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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는 건 별로 없지만 가족입니다. 〈할머니가 죽기 전 백만장자가 되는 법〉

씨네플레이
경고합니다. 손수건 꼭 챙겨 가시길.
경고합니다. 손수건 꼭 챙겨 가시길.

흔한 신파물? 신파에도 격이 있다!

<할머니가 죽기 전 백만장자가 되는 법>은 신파극이다. 오랜만에 보는 손자에게 대뜸 "밥은 먹었냐"를 먼저 묻는 할머니, 효도는 돈으로 하는, 건실하지만 어쩐지 차가운 첫째 아들, 어머니와 비슷한 삶을 살기에 눈에 밟히는 정 많은 둘째 딸, 사고뭉치 막내아들까지. 기시감이 드는 유교적인 가족 구성에 암에 걸린 할머니의 사연이 날아들자 속수무책으로 눈물샘이 개방된다. 하지만 억지 눈물즙 짜내는 신파극은 아니니 알레르기 반응은 잠시 넣어두시길. 신파에도 격이 있고, <할머니가 죽기 전 백만장자가 되는 법>은 과잉 감정을 경계하고 신파를 적절히 활용해 담백하고 솔직한 가족 이야기를 완성했다. 상업성과 작품성까지 모두 잡은, 소위 '천만 영화'의 덕목을 두루 갖춘 영화는 태국을 넘어 동남아시아 전역에서 역대 태국 영화 수익 1위를 차지하며 가장 성공한 태국 영화가 되었다. 실제 이 영화를 본 전 세계 관객 수를 합하면 천만이 넘는다고.

지난 11일 막을 내린 제29회 부산국제영화제 '아시아영화의 창' 부분에 초청돼 먼저 공개된 영화는 예매 시작과 동시에 전석 매진을 기록하며 한국에서도 높은 관심을 증명했다. 태국 영화지만 시노 타이(태국 화교)의 가족 이야기를 다뤄 우리에게도 익숙한 정서를 영화는 내뿜는다. 통속적인 신파가 아닌 진솔한 가족 영화가 그리웠다면 오늘 사랑하는 이의 손을 잡고 영화관을 찾아보자. 손수건은 필히 지참하고서 말이다.

 

할머니의 유산을 상속받기 위한 불온한 계획

〈할머니가 죽기 전 백만장자가 되는 법〉사촌 무이(왼)와 엠
〈할머니가 죽기 전 백만장자가 되는 법〉사촌 무이(왼)와 엠

어릴 땐 반에서 1등을 할 정도로 똑똑했던 엠(푸티퐁 아싸라타나쿨)의 현재는 다소 비관적이다. 게임 방송으로 허송세월하며 엄마에게 빌붙어 살고 있는 그에게 가족들은 모진 눈총을 숨기지 않는다. 그러던 어느 날 사촌 무이(투 톤타완 탄티베자쿨)가 투병 중인 할아버지를 지극정성으로 간호한 끝에 거액의 유산을 물려받자, 자신도 같은 방법을 쓰기로 결심한다. 가족 모임이라면 시큰둥했던 엠이 말기 암 판정을 받은 외할머니의 간병을 자청한 것이다. 적당히 돌보는 척하며 유산을 물려받을 속셈이었는데 이 할머니 꽤나 꼬장꼬장하다. 단골집이 아닌 곳에서 사 온 생선은 단박에 알아채고, 새벽 5시부터 시작되는 죽 장사에 늦는 법이 없다. 자신만의 질서가 부여된 작은 재단에 손자가 손을 대자 어김없이 잔소리가 쏟아진다. 엠은 공짜는 없는 법이라 되뇌며 할머니의 까다로운 입맛을 맞추고 새벽 장사를 돕고 병원의 긴 대기줄을 함께 기다린다. 낯설었던 병원의 줄서기 문화가 익숙해질 만큼의 시간이 흐르자, 납득할 수 없었던 할머니의 행동 또한 하나 둘 그 이유를 드러낸다. 그렇게 불손한 의도로 시작된 동거는 가족의 이해라는 또 다른 지평을 향해 한 발 나아간다. 

 

떡밥을 놓치지 말자. 하나하나가 눈물 포인트

〈할머니가 죽기 전 백만장자가 되는 법〉할머니와 손자
〈할머니가 죽기 전 백만장자가 되는 법〉할머니와 손자

<할머니가 죽기 전 백만장자가 되는 법>은 가족애를 강조하며 교훈적으로 흐르는 여타의 가족 중심 작품들의 실수를 피하기 위해 캐릭터 설정과 서사 진행의 개연성을 면밀히 확보했다. 먼저 눈에 띄는 건 할머니와 손자의 티키타카. 부지런한 할머니가 "일찍 일어나는 새가 먹이를 먹는다"라고 게으른 손자를 타박하면 손자는 "일찍 일어나는 새가 잡아먹힌다"라며 반격하는 식이다. 잔소리와 조언 사이를 줄타기하는 할머니의 명언 또한 퍼레이드를 이룬다. "무슨 일이든 장원급제를 할 각오로 임해라", "시늉만 하려거든 하지 말아라", "이미 지은 밥이다"(벌어진 일은 돌이킬 수 없다는 태국 격언) 등 손자를 향한 할머니의 잔소리가 암에 걸려 죽음을 향해 가는 그의 인생을 맞닥뜨리면 다급히 전해야 할 인생의 지혜로 모두의 가슴에 오롯이 새겨진다.

착실한 떡밥 회수 또한 이 영화의 미덕이다. 허투루 낭비되는 신이나 대사는 이 영화에 없다. 할머니가 왜 작은 신발을 고집하는지, 석류나무는 언제 심었고 그 열매를 애지중지하는 이유는 무엇인지, 관세음보살 앞에서 소고기는 먹지 않겠다 맹세한 까닭은 무엇인지, 의미심장한 대사 한 마디 한 마디를 따라가다 보면 어느새 우리가 간과했던 가족의 의미와 조건 없는 사랑에 눈물이 강을 이루는 경험을 하게 된다. 결국 그 누구보다 백만장자가 되길 소망했던 건 할머니 아니었을까. 남은 자식들이 조금 더 편한 삶을 영위하도록 자신의 모든 것을, 하다못해 집 앞 나무에 열린 석류 한 알조차 내어주고자 한 마음은 영화 마지막에 손자에게 뜻밖의 선물을 안기고, 수미상관의 형식을 취하는 영화는 꽉 닫힌 결말을 맞이한다.

 

노인 돌봄이라는 묵직한 이슈 "자식들이 절대 안 주는 게 뭔 줄 알아? 바로 시간이야."

〈할머니가 죽기 전 백만장자가 되는 법〉
〈할머니가 죽기 전 백만장자가 되는 법〉

전면에 내세우진 않지만, 영화는 현대 사회가 당면한 가장 시급한 과제인 노인 돌봄과 존엄한 죽음에 대해서도 질문한다. 성인 남성의 똥기저귀를 서슴없이 갈고 넉살 좋게 할아버지를 간호하던 사촌 무이는 할아버지의 죽음에 대한 비밀을 엠에게 실토한다. 자신이 할아버지의 죽음을 의도적으로 방치했다는 고백이다. 영혼도 없이 기저귀를 찬 껍질에 불과했던 할아버지는 죽기를 바랐다. 할아버지의 존엄한 마지막을 위해 슬쩍 눈을 감은 무이는 질문한다. 누군가를 살아있게 한다는 명목으로 고통을 지속시킨다는 것은 올바른 일인가. 죽음 앞에서도 시간을 내주지 않는 자식이라는 존재들은 그저 죄책감을 덜기 위해 의미 없는 삶을 연장시키고 있는 것은 아닌가.

"자식들이 절대 안 주는 게 뭔 줄 알아? 바로 시간이야"라는 영화 속 일갈이 사무친다. 무책임한 도회지의 자식들을 꾸짖기 위한 대사이기도 하지만 복잡한 함의가 얽혀있다. 완전한 돌봄은 가족이 계획의 일부로 참여하지 않는 한 불가능한 일이지만, '시간'을 내기 위해선 돌봄의 중요성과 필요성에 대해 보다 폭넓은 사회적 합의가 마련되어야 한다. 또한 환자들에게 더 나은 돌봄을 제공하기 위해 고통 완화 돌봄은 물론 의료 조력 사망까지 진지하게 고려해야 될 때가 도래한 것은 아닌지 영화는 질문한다.

 

영화의 가장 강력한 반전: 우싸 셈캄

〈할머니가 죽기 전 백만장자가 되는 법〉
〈할머니가 죽기 전 백만장자가 되는 법〉

영화의 가장 강력한 반전은 이 영화가 할머니 역할을 맡은 배우 우싸 셈캄의 첫 영화 출연작이라는 것이다. 옆집에 살고 있을 것만 같은 평범한 할머니를 원했던 제작진이 영화 출연 경험이 전무한 인물을 찾았던 것. 높은 경쟁률을 뚫고 거머쥔 첫 영화 주연으로 '국민 할머니'로 등극한 우싸 셈캄과 연기 합을 맞춘 손자 엠 역은 BL 드라마 <I Told Sunset About You>와 후속작 <I Promised You the Moon>으로 국내 팬들에게도 친숙한 빌킨 푸티퐁이 맡았다. <배드 지니어스 더 시리즈>(2020)를 연출한 팟 분니티팟 감독의 장편 극영화 데뷔작으로 방콕의 거리를 포착한 카메라가 우기의 청량함을 후경으로 정겹고도 이국적인 풍경을 한 폭의 그림처럼 펼쳐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