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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난의 시대에도 예술이 존재해야 하는 이유 〈날씨의 아이〉

추아영기자
〈날씨의 아이〉 포스터
〈날씨의 아이〉 포스터

 

개봉 당시 국내 관객 380만 명을 동원한 <너의 이름은>(2016)의 감독 신카이 마코토의 영화 <날씨의 아이>(2019)가 10월 30일 재개봉했다. <날씨의 아이>는 <너의 이름은>부터 <스즈메의 문단속>(2023)까지 이어지는 재난 3부작의 두 번째 작품으로 이상 기후가 드리운 도쿄를 배경으로 한다. 이 중 <스즈메의 문단속>은 제73회 베를린국제영화제 경쟁 부문에 진출해 세계적으로 작품성을 인정받았다. 신카이 마코토의 쾌거는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영화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2002)의 황금곰상 수상 이후 일본 애니메이션이 21년 만에 처음으로 베를린 경쟁 부문에 진출한 것으로 그를 포스트 하야오로 거론되게 했다. 마코토는 실제 풍경을 사진으로 찍은 후 리터칭을 통해 리얼리즘을 추구하는 작화를 선보여 왔다. <날씨의 아이>는 여전히 그의 아름다운 작화에 래드윔프스의 음악이 어우러져 감정을 진폭 시킨다. 다만 빈곤과 기후변화 코드를 직접적으로 드러내면서 전작과 다르게 세계의 위기를 그리고 있다.


〈날씨의 아이〉 호다카
〈날씨의 아이〉 호다카
〈날씨의 아이〉 히나
〈날씨의 아이〉 히나

16세 소년 호다카(다이고 코타로)는 다시는 돌아가고 싶지 않은 고향섬에서 벗어나 도쿄로 온다. 한여름의 도쿄는 이상 기후로 비가 계속 내리고, 호다카는 비에 젖은 몸으로 인터넷 카페와 맥도날드, 지하철역을 전전한다. 하루하루 떨어져 가는 적은 돈으로 끼니를 때우던 그는 어느 날 의문의 소녀 히나(모리 나나)를 만난다. 히나는 회색빛 하늘의 비구름을 거두고, 비를 멈추게 하는 능력을 가진 도시 전설 속 ‘맑음 소녀’다. 죽은 엄마를 대신해 어린 남동생을 부양해야 하는 히나는 호다카의 제안으로 의뢰를 받은 곳에 맑은 하늘을 드리우는 ‘날씨 비즈니스’를 시작한다.

〈날씨의 아이〉
〈날씨의 아이〉

호다카의 도쿄살이는 쉽지 않다. 인터넷 카페와 맥도날드를 전전하는 호다카의 모습은 주거지 없이 인터넷 카페에서 기거하는 일본의 ‘넷카페 난민’과 맥도날드에서 저렴한 메뉴를 하나 시켜두고 하룻밤을 보내려는 ‘맥도날드 난민’의 모습과 같다. 때때로 그는 지하철역과 길바닥에서 추위를 견디기도 한다. 일을 구하려 해도 가출 청소년의 신분으로는 허락되지 않는다. 정처 없이 도쿄를 떠도는 호다카의 모습은 명확히 그가 사회의 빈곤층이라는 것을 알게 한다. 히나 역시 그와 다르지 않다. 히나는 죽은 엄마를 대신해 어린 남동생을 돌보는 소녀 가장이다. 그녀는 전철역 바로 옆에 위치해 싼 가격에 매매되는 아파트에서 살고 있다. 전철의 진동은 가끔 지진으로 착각되기도 한다. 이는 실제 지진이 닥쳤을 때 빠른 대응을 늦출 수도 있는 안전의 문제로 직결된다. 호다카와 히나는 기본적인 안전마저 보장되지 않은 사회의 사각지대에서 위태롭게 서 있다. 그들이 내몰린 곳은 성 산업과 그리 떨어져 있지 않다. 호다카가 도쿄에서 머무는 곳은 가부키초로 바닐라카(일본의 유흥업소 구인구직 사이트의 광고 차량)가 대놓고 거리를 활보하고, 성 산업에 얽힌 야쿠자가 자리 잡고 있는 곳이다. 파트타임 일자리를 잃은 히나는 동생을 지키기 위해 유흥업소에 가려 하기도 한다.

〈날씨의 아이〉
〈날씨의 아이〉

공교롭게도 <날씨의 아이>는 <기생충>과 <조커>가 개봉한 해인 2019년에 개봉했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세 작품은 모두 사회에서 소외된 하층민의 테러 행위를 그려낸다. <기생충>에서 수직적인 자본주의 시스템을 파괴하려는 시도인 기택의 칼부림과 <조커>에서 사회의 냉소와 일상적인 폭력에 대항하는 아서 플렉의 비정상적인 살인 행위는 끝내 경찰에게 총구를 겨누는 호다카의 행위와 다르지 않다. (다만 호다카는 살인을 저지르지 않는다.) 또 폭우가 똥물이 되어 범람하는 <기생충>의 수재는 <날씨의 아이>에서 전면적으로 다루고 있는 기후 불평등 문제를 은유한다. <기생충>에서 빗물이 계속해서 아래로 흐르듯 기후 위기는 가장 먼저 빈곤층의 삶을 헤집어 놓는다. 반지하의 집이 침수당한 기택은 기후 불평등의 희생양이며, 그의 일격은 부조리한 자본주의 시스템과 얽혀 있는 기후 불평등 문제에서 기인한다.

〈날씨의 아이〉
〈날씨의 아이〉

앞서 말했듯이 <날씨의 아이>는 기후 위기를 다루며 보이지 않는 영역에 있던 ‘기후 아파르트헤이트’ 문제를 가시화한다. 기후 아파르트헤이트는 부유층은 돈을 지불하고 기후 변화에 적응하여 삶을 이어나갈 수 있지만, 빈곤층은 기후 변화의 직격타를 입어야 하는 불평등의 심화 현상을 말한다. <날씨의 아이>는 기후 위기가 전 세계인 모두에게 직면해 있는 문제이지만, 그 피해는 평등하게 작용하지 않는다는 걸 전한다. 호다카의 숙식을 해결해 주는 스가의 반지하 사무실이 지속된 폭우에 의해 침수된 것은 이를 잘 드러낸다. 그리고 마코토는 현실의 문제를 환기하기 위해 영화 속 이상 기후의 이미지를 실제 벌어지고 있는 기상현상에서 가져온다. 영화 속 비가 그치지 않는 도쿄의 하늘은 적란운으로 가득 메워져 있고, 특히 호다카가 히나를 구해낸 후 하늘에 생겨난 용의 형상은 용오름 현상에서 착안한 이미지다.

〈날씨의 아이〉 스가
〈날씨의 아이〉 스가

 

​<날씨의 아이>에서 기후 위기를 대하는 두 세대의 입장은 다르게 그려진다. 호다카처럼 10대 때 가출해서 도쿄에 온 스가는 어린 시절을 떠올리며 호다카를 자신의 잡지사에 고용한다. 하지만 그는 호다카에게 터무니없는 금액의 급여를 주며 호다카의 노동을 착취하고, 아내를 잃은 후의 슬픔에 갇혀 파친코와 유흥업소를 드나들며 되는대로 살기도 한다. 그는 맑음 소녀의 전설을 취재한 후에도 “제물 한 명 바쳐서 날씨가 돌아온다면 난 환영”이라며 무심하게 말한다. 스가는 자신의 삶을 유지할 수 있다면, 누군가의 희생이 동반되더라도 아무렇지 않게 여기는 기성세대의 어른이다. 그는 호다카의 소재를 조사하는 경찰이 그의 사무실에 들이닥치자 호다카를 다시 도쿄의 차디찬 바닥으로 몰아낸다. 스가는 호다카에게 자신의 삶의 방식을 강요하면서 “이젠 어른이 돼야 해 소년”이라고 말한다.

〈날씨의 아이〉
〈날씨의 아이〉

위기는 곧 그에 맞는 대응을 생각하게 한다. 신카이 마코토는 그간 자신이 그려왔던 세카이계(남녀로 구성된 ‘나와 너’의 일상적인 문제가 구체적인 중간 항 없이 ‘세계의 위기’, ‘이 세상의 마지막’이라는 비일상적인 문제와 직결되는 작품군)의 공식을 변주해 세계의 위기에 대처하는 대안을 제시한다. 마코토는 생활을 지속해야 하는 책임을 무겁게 진 ‘어른’과 자신의 삶을 책임지지 않는 ‘소년’ 사이의 중간 지대를 열어 보인다. 스가의 말대로 호다카는 히나에게 책임을 맡겨 둔 채 그녀의 비상한 능력을 이용하는 소년이었다. 그는 히나를 잃으면서 뒤늦게 자신의 책임을 자각한다. 자신이 가장 연장자였다는 사실을 알게 된 호다카는 그녀가 진 책임이 자신의 것이었음을 깨닫고 후회 어린 눈물을 흘린다. 책임을 자각한 그는 히나를 구하기 위해 사력을 다한다.

〈날씨의 아이〉
〈날씨의 아이〉

호다카의 자각은 자의식에 빠져 사회를 등지고 ‘소녀’에게만 위기의 해결을 맡겨 놓았던 세카이계 소년들의 무책임한 행동과 대비를 이룬다. 세카이계의 대표 작품 <신세기 에반게리온> TVA 판의 ‘오메데토’ 결말은 이를 잘 보여준다. <신세기 에반게리온>의 이카리 신지는 세계의 위기를 외면하고, 모두가 자신을 축하해주는 환상 속으로 숨는다. 호다카는 자의식에 젖은 우울한 망상 속으로 숨어들지 않고, 히나를 위해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한다. 마코토는 사회 문제를 반영하지 않는다는 비판을 받아왔던 세카이계의 설정을 활용해 오히려 세계의 위기를 해결하기 위한 대안적인 태도로 제시한다. 한층 더 성숙해진 세카이계의 세계관 안에서 소년이었던 호다카는 개인의 삶을 위해 세계의 문제를 못 본 척하고, 소수의 희생에 무관심한 어른이 아닌 자신의 책임을 자각하고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청년’으로 자란다.

〈날씨의 아이〉
〈날씨의 아이〉

 

한 명의 소녀를 살리기 위해 세계를 재난으로 몰아넣는 호다카의 선택은 소년의 좁은 시야에서 비롯된 잘못된 선택일 수 있다. 그럼에도 마코토는 그의 선택과 태도를 긍정하고 있다. 히나를 구하기 위해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그의 태도는 비단 개인적 감정에만 국한하지 않는다. 모든 인류가 처한 기후 위기에서 벗어나기 위해 떼어야 할 첫 발은 결국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있을지’ 생각해 보는 것에서 시작한다. 감독은 영화의 영문 제목 ‘Weathering with you’에도 그 의미를 숨겨 놓았다. ‘Weather’에는 ‘날씨’의 뜻과 함께 ‘(역경을) 극복하다’는 의미도 있다. 마코토는 전 지구의 위기에 대처하기 위해서라도 누군가의 희생은 전제되지 않아야 한다고 역설한다.

〈날씨의 아이〉
〈날씨의 아이〉

 

21세기는 숱한 인재와 더불어 COVID-19 팬데믹, 기후 위기로 말미암은 재난의 시대다. 신형철 문학평론가는 21세기 문학의 흐름과 방향을 논하면서 ‘재난이 범람하는 시대에 문학이 존립할 수 있는가’, ‘스스로 정당화할 수 있는가’를 먼저 질문한다. 예술이라는 범주 안에서 문학의 위기는 영화의 위기와도 그리 떨어져 있지 않다. 재난이 일상화된 시대에서 영화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날씨의 아이>는 재난의 시대에도 예술이 존재해야만 하는 이유를 증명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