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강산이 한번 바뀌고도 1년이 더 지난 시간. 배우 박신양이 2013년 영화 <박수건달> 이후 11년 만에 오컬트 휴먼 드라마 영화 <사흘>로 스크린에 복귀했다. 화가로서의 삶을 이어가던 그는 복귀작으로 <사흘>을 선택한 이유에 대해 “기획, 시나리오를 봤을 때 두 가지 이야기가 한 영화에 들어있어서 끌렸다”라고 말하며 “아빠와 딸의 애틋한 감정을 다루는 휴먼 드라마와 오컬트 장르가 같이 담겨있었다. 한쪽 장르를 다루는 영화는 많이 있을 텐데 이렇게 두 가지 장르가 공존하는 점이 흥미로웠다”라고 덧붙였다. 그는 누구나 아는 재벌 로맨티시스트의 “애기야, 가자!”부터 차갑지만 정의로운 의사, 전설의 거지짤, 심지어는 여장까지 가리지 않으며 배우로서 폭넓은 스펙트럼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여전히 “애기야, 가자!”만 알고 있다면 오늘은 배우 박신양의 대표 필모그래피를 소개하고자 한다. 스크린 복귀 기념으로 드라마가 아닌 영화로 대표작을 선정했다. 만약 리스트엔 없는 박신양의 대표작을 소개하고 싶다면 댓글로 알려주시길.
<유리>
박신양의 스크린 데뷔작

연극판에서 탄탄하게 입지와 실력을 쌓고 있던 박신양은 1996년, 영화 <유리>의 주인공으로 스크린에 데뷔한다. 그의 인지도에 비해 <유리>를 알고 있는 사람은 많지 않은데, 굉장히 난해하고 심오하기 때문에 관람이 다소 어렵기 때문이다. <유리>는 소설가 박상륭의 『죽음의 한 연구』를 원작으로 한 작품으로, 원작은 한국 관념소설의 최고봉으로 손꼽히는 작품이다. 소설의 첫 문장이 “공문(空門)의 안뜰에 있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바깥뜰에 있는 것도 아니어서, 수도도 정도에 들어선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세상살이의 정도에 들어선 것도 아니어서, (후략)” 이렇게 시작되는데, 문장이 너무 길어 다 가져오지 못했다. 도무지 무슨 말인지 알기 어렵기도 하고, 불교의 육조 대사 혜능과 예수의 모습을 따서 만든 주인공의 행보는 마치 오래된 종교 서적을 읽는 느낌이다. (필자는 도전하다 실패했다) 박신양은 이 소설을 무척이나 좋아해서 영화화가 결정되자 한달음에 달려왔다고.

영화 <유리>는 유리(박신양)를 중심으로 서사를 펼친다. 유리의 어머니는 창녀로, 아버지가 누구인지 모른 채 성장한 그는 정체성이 결여된 채 어머니를 뺏어간 남성에 대한 질투와 증오를 안고 성장한다. 어머니의 죽음 이후 수도승이 된 그는 33세에 40일간의 수행을 위해 모든 관습과 집착을 내려놓고 알몸으로 들어가야 하는 고난의 땅 ‘유리’에 들어선다. 그곳에서 유리는 자만과 편견을 상징하는 인물을 만나고 그들을 ‘구도적 살해’하며 내면의 갈등과 고통으로 깨달음을 얻기 위한 구도의 길을 걷는다. 영화는 인간 존재의 본질과 삶의 의미를 탐구하는데, 난해한 상징과 성에 대한 파괴적인 표현으로 호불호가 크게 갈린다. 특히 어머니로 추정되는 여성의 시체에다 시간을 하는 장면까지 등장하기 때문에 “박신양의 데뷔작이네”라는 가벼운 마음으로 보기엔 다소 무리가 있는 작품. 기존의 불교영화에 비해서도 파격적인 표현 방식으로 혼란스러운 작품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상징을 하나하나 이해하고, 이 난해한 이야기를 박신양은 어떻게 풀어 나갔는지를 보는 재미가 있다. 씨네필이라면 한 번쯤은 도전해보길.
<편지>
충격적인 데뷔작 이후, 청춘스타이자 멜로 남주로

<편지>는 1997년에 개봉한 멜로 영화로, 82만 관객을 동원해 그해 한국영화 흥행 1위를 차지할 만큼 인기몰이를 했던 작품이다. 박신양과 최진실이 주연을 맡았는데, 캐스팅만으로도 얼마나 그 사랑이 애틋할지 상상이 간다. 영화는 대학시절 우연히 만나 사랑에 빠진 정인(최진실)과 환우(박신양)의 이야기를 중심으로 전개된다. 우연히 정인이 기차표를 떨어뜨린 일을 계기로 두 사람은 서로에게 첫사랑이자 마지막 사랑이 되어 결혼에 골인한다. 그러나 환우가 갑작스럽게 뇌종양 판정을 받으면서 영원은 깨지고 만다. 환우는 자신이 곧 세상을 떠나야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지만 정인에게 슬픔이 아닌 아름다운 추억을 남겨주고 싶어, 편지를 한 통씩 쓰기 시작한다. 자신이 세상을 떠난 후 정인이 읽을 수 있도록 진심을 눌러쓴 편지에는 그를 향한 사랑과 함께 그가 앞으로도 행복하길 바라는 마음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정인아, 나야”로 시작하는 편지에 눈물을 흘리지 않을 도리가 없다. 박신양과 최진실의 조합은 뻔한 멜로임을 알면서도 울게 만드는 힘이 있다. 피곤해서 발 씻을 힘도 없다는 아내를 위해 직접 발을 씻겨주는, 유머러스하고 부드러우면서도 늘 아내를 응원하고 사랑하는 남편의 모습은 그를 청춘스타로 만들기 충분했다. <유리>에서 알몸으로 구도의 길을 걷던 충격적인 모습은 어디에도 없고 로맨틱한 남편의 모습으로 여성 팬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인상적인 건 그가 ‘멋진 남자주인공’의 모습을 연기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는 기존 로맨스 영화 주인공에 비해 보다 처절한 모습을 보여주었는데, 마지막 영상 편지에서 사랑한다고 말하는 정인의 음성 메시지를 들으며 아이처럼 우는 그의 모습에 스태프까지 울음을 참지 못했다고. 실제로 영화에서 ‘흡’하는 소리가 있는데 이 소리가 스태프의 울음소리라고 한다. 이 작품 이후 전도연 배우와 합을 맞춘 멜로 영화 <약속>(1998)까지 연달아 히트하며 그는 멜로 흥행 공식으로 자리매김한다.
<범죄의 재구성>
한국 영화계 최고의 케이퍼 무비

<편지>와 <약속>에 이어 SBS 드라마 <내 마음을 뺏어봐>(1998)로 연이어 로맨스/멜로 작품에서 좋은 모습을 보여준 그는 ‘박신양 = 부드러운 남자 주인공’이라는 이미지를 확고히 했다. 하지만 2001년, 불교 조폭 영화 <달마야 놀자>에서 조폭 재규 역을 맡으며 완전히 새로운 영역에 도전한다. 섬세하고 세련된 감정 연기 위주였던 이전 작품들과 달리, <달마야 놀자>에선 몸을 쓰고 즉흥적이며 직관적인 연기로 자신을 정의하던 이미지를 스스로 깨는 데 성공한다. 그 이후, 그는 <범죄의 재구성>에서 사기꾼 최창혁과 형 최창호 역을 동시에 맡아 1인 2역을 소화해낸다. 최동훈 감독의 데뷔작이자, 김윤석 배우의 스크린 데뷔작이기도 했던 <범죄의 재구성>은 한국 영화계 케이퍼 무비의 최고봉으로 여전히 손꼽히고 있다.

영화는 천재 사기꾼 최창혁(박신양)을 중심으로 전개된다. 그는 뛰어난 두뇌와 전략으로 은행을 상대로 한 대규모 사기 계획을 세운다. 이를 위해 그는 각 분야의 전문가를 모아 팀을 구성하는데, 사기꾼들의 대부 김선생(백윤식)부터 떠벌이 얼매(이문식), 제비(박원상), 위조 기술자 휘발류(김상호)가 그 주인공이다. 이들은 철저한 계획 아래 작전을 실행하고 한국은행에서 50억을 인출하는 데 성공한다. 하지만 결과가 없다. 남은 사람은 없고, 돈은 사라진 상황. 완벽한 계획에서 무엇이 문제였을지, 영화는 팀원들 간의 신뢰와 배신이 교차하는 지점을 속도감 있게 쫓아가며 예측 불가능한 상황을 전개한다. 참고로, 영화의 모티브가 된 ‘한국은행 구미지점 9억 인출 사기 사건’은 1996년 2월 17일 경북 구미에서 실제로 발생한 사건이다. 신용도가 높은 법인이나 개인 사업자가 발행한 당좌수표는 은행에서 현금화가 가능하다는 점을 악용한 범죄였다. 범인들은 대동은행 구미지점에서 당좌수표를 훔친 다음, 은행 관계자인 척 가장해 9억 원이 적힌 당좌수표를 제시, 현금화를 해 그대로 사라졌다. 대대적인 수사를 벌였지만 단서를 찾지 못해 결국 미제로 남은 사건으로, 최동훈 감독 특유의 맛깔나는 대사와 개성 있는 캐릭터 구성이 돋보이는 작품.
<박수건달>
박신양이 제대로 웃겨줍니다

<범죄의 재구성> 이후 <눈부신 날에>(2007)를 마지막으로 <쩐의 전쟁>(2007), <바람의 화원>(2008), <싸인>(2011)으로 드라마 커리어를 이어가던 그는 돌연 6년 만에 <박수건달>이라는 조폭 샤머니즘 코미디 영화로 스크린에 복귀한다. 잘나가던 조폭 간부 광호(박신양)는 2인자 자리를 노리던 라이벌 태주(김정태)의 습격으로 손금이 바뀌게 되고, 운명이 바뀐 그는 ‘박수무당’의 운명을 갖게 된다. 귀신이 보이기 시작한 그는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박수무당이 되지 않으면 죽을 수도 있다는 대무당의 얘기에 무당과 건달, 이중생활을 하게 된다. 어이없는 소재에 갑작스러운 신파까지 쉽사리 흥행을 예측하기 힘든 영화였으나 박신양이 제대로 웃겨준 덕분에 약 390만 관객을 동원하며 흥행에 성공한다.

<박수건달>을 연출한 조진규 감독은 “건달 역이 어울리는 남자배우들 중 무당이 되었을 때 가장 섬뜩하고 어울릴만한 배우가 누가 있을까 상상해보았다. 그때 가장 먼저 떠오른 배우가 박신양이었다”라고 말하며 그를 캐스팅한 이유를 설명했다. 6년 만의 스크린 복귀에 정말 이를 갈고 나온 듯, 박신양은 짙은 아이라인에 첫 여장까지 감행하며 특유의 뻔뻔하고 자연스러운 연기로 스크린을 완전히 장악해버린다. 그야말로 박신양이 멱살 제대로 잡고 끌고 가는 작품. 심지어는 극중 부산지검 검사 황만삼으로 특별출연한 조진웅과 키스신을 찍기까지 했다.
<사흘>
11년만에 스크린에 돌아오다

2024년 11월, 박신양은 오컬트 영화 <사흘>로 11년 만에 스크린에 복귀했다. <사흘>은 오컬트에 휴먼 드라마 요소를 결합한 작품으로, 흉부외과의사 승도(박신양)가 구마 중 죽은 딸 소미(이레)의 목소리를 장례식장에서 듣게 되면서 발생하는 사건들을 다루고 있다. 흉부외과 분야의 탑이자 누구보다 차가운 성격을 지닌 그는 딸 소미만큼은 무엇보다도 애틋하게 여기는 아버지다. 딸의 심장 수술이 성공하면 더 이상 걱정거리가 없을 것만 같았던 그는 수술 이후 이상행동을 하는 소미를 발견한다. 심지어는 부모의 목을 짓누르기까지 하자 그는 가정을 지키기 위해 구마 사제 해신(이민기)를 만나 구마를 요청한다. 그리고 소미는 구마 의식 중 사망하고, 전개는 급물살을 탄다. 구마에 실패한 해신은 이상한 기운을 감지하고, 소미에게 어떤 존재가 있음을 확신한다. 죽은 자의 목소리는 산자의 마음을 헤집어 놓는다. 승도는 딸을 지키지 못했다는 죄책감에, 해신은 과거 트라우마로 구마를 할수록 상처는 깊어지지만 그럼에도 멈추지 않는다.

박신양은 10년 이상의 공백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집착에 가까운 부성애 연기를 선보이며 배우 박신양은 녹슬지 않았음을 증명했다. 그는 특히나 자신의 방식대로 캐릭터 해석을 하는 데 능숙한 배우인데, 오컬트와 가족 코드 사이를 미묘하게 오가는 승도 역시 그의 연기로 중심을 잡는다. 영화는 후반부로 갈수록 오컬트보다 부성애를 강조한 휴먼 드라마에 좀 더 힘을 싣는데, 특히 ‘자신이 집도한 수술 때문에 딸이 잘못되지는 않았을까’에서 오는 죄책감, ‘딸이 날 기다리고 있는 건 아닐까’에서 오는 미안함을 동력으로 결말을 향해 나아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