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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몰랐던 킬리언 머피의 신비로운 얼굴들

씨네플레이
〈디스코 퍼그〉(2001)
〈디스코 퍼그〉(2001)
〈인셉션〉(2010)
〈인셉션〉(2010)
〈피키 블라인더스〉(2013 ~ 2022)
〈피키 블라인더스〉(2013 ~ 2022)

킬리언 머피, 하면 어떤 얼굴이 떠오르는지. 아마도 대부분은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킬리언 머피’가 떠오를 테다. 2005년, 놀란 감독의 <배트맨 비긴즈>의 스케어크로우 역을 시작으로 그는 <다크 나이트> 시리즈와 <인셉션>, <덩케르크>, <오펜하이머>까지 그의 페르소나처럼 활동해왔다. 재밌게도, 그는 배트맨 역 오디션에 지원했으나 그 역은 크리스찬 베일에게 돌아갔다. 하지만 오디션에서 보여준 그의 모습에 큰 감명을 받은 놀란은 배트맨의 적, 스케어크로우 역에 그를 캐스팅했고 그 이후 누구보다 그의 영감이자 얼굴로 활동했다. 결국 2023년 <오펜하이머>로 그는 놀란 영화 주연 배우로는 처음으로 오스카 남우주연상 수상자가 되기도.

이렇다 보니 킬리언 머피를 떠올렸을 때 놀란의 캐릭터가 먼저 떠오르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다. 하지만 그 모습만 알고 있기엔 머피의 얼굴은 무궁무진하다. 이번에 개봉한 <이처럼 사소한 것들>에선 석탄 배달 업체를 운영하는 평범한 가장이 불의를 마주했을 때의 선택을 다룬 작품으로 킬리언 머피가 주인공 빌 펄롱 역을 맡았다. 맑고 파란 눈에 강하고 뚜렷한 인상으로 자신만의 인장이 확실한, 그러나 모든 영화에서 늘 신비롭게 얼굴을 바꾸는 배우, 킬리언 머피. 오늘은 크리스토퍼 놀란 바깥에 있는 킬리언 머피의 다양한 얼굴들을 소개하고자 한다. 만약 킬리언 머피 최애 영화가 리스트에 없다면 댓글로 추천해주시길.

 


<이처럼 사소한 것들>

〈이처럼 사소한 것들〉(2024)
〈이처럼 사소한 것들〉(2024)

<이처럼 사소한 것들>은 클레어 키건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한 작품으로, ‘소설은 이렇게 영화화해야 한다’라는 걸 몸소 보여주는 작품이다. 소설은 빼곡한 묘사로 상황과 인물의 감정을 그려낸다. 대사보다는 지문과 배경 묘사로 을씨년스러운 마을의 풍경을 독자에게 보여주고 있는데, 영화는 이 지문을 한 장면으로 축약한다. 소설이 독자에게 보여주고자 했던 장면을 완벽히 이해하고, 이를 가장 똑똑한 방식으로 스크린에 옮겼다. 작품은 막달레나 수녀원 사건을 소재로 다루고 있는데, 1922년부터 1996년까지 약 74년간 아일랜드의 수녀회에서 발생했던 인권 유린 사건이다. 이 당시에는 세탁기 발명 전이었기 때문에 여러 단체에서 세탁물을 받아 처리하는 대형 세탁소 같은 것이 운영됐는데 매춘부, 미혼모를 교화한다는 목적으로 그들에게 세탁 노역을 시켜왔다. 뿐만 아니라 성폭행 피해자, 고아 소녀까지 가릴 것 없이 데려가 무대가로 강제 노역을 시키고 미혼모의 자녀들은 비싼 값에 입양을 보내는 것으로 수익을 올리고 있었다.

 

소설은 주인공의 내면으로 문제의식을 쌓아갔다면 영화는 킬리언 머피의 얼굴을 빌려 문제를 이야기한다. 문제를 고발하기보다는 올바르게 살고자 노력했던 평범한 인간이 거대한 불의를 마주했을 때 느끼는 두려움과 고민, 그리고 선택으로 앞으로 나아가야 할 방향에 보다 초점을 맞추고 있다. 펄롱은 좋은 사람이다. 금슬도 좋고, 직원들을 친절하게 대한다. 힘들어 보이는 아이가 있으면 기부도 한다. 이처럼 사소하지만, 건강한 사회를 지탱하는 데 필요한 것들을 행해온 그는 수녀원으로 강제로 끌려가는 어린 여자아이를 보고, 또 다른 여자 어린아이가 그에게 구조 요청을 하는 걸 듣고 자신이 놓치고 있는 사소한 무언가들을 생각한다. 영화의 마지막, 그가 드디어 선택을 한순간을 영화는 대사 한 마디 없이 오로지 킬리언 머피의 눈빛으로 표현해낸다. 석탄처럼 매캐하고 차가운 공기에 잔잔히 스며든 몇 안 되는 따뜻한 쇼트는 우리의 일상을 떠올리게 한다. 대체로 건조하지만 그럼에도 일상을 살아내게 하는 사소한 무언가. <이처럼 사소한 것들>은 지난날 내게 내밀어졌던 선의를 다시 누군가에게 내미는 행위를 ‘킬리언 머피’라는 매개를 통해 드러낸다.

 


<28일 후>

〈28일 후〉(2002)
〈28일 후〉(2002)

아일랜드 출신인 킬리언 머피는 법학을 전공했으나 약 1년 만에 중퇴한 뒤, 음악에 관심이 많아 기타 연주로 밴드에서 활동했다. 대학을 떠난 뒤, 그는 극단에 합류해 연극 ‘디스코 피그’의 주연을 맡으며 배우 생활을 시작했다. 대니 보일 감독의 <28일 후>(2002)는 그가 대중에게 자신의 이름을 각인시킨 작품이자 배우로서의 가능성을 보여준 첫 작품이다. <28일 후>는 좀비 아포칼립스 장르에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하여 좀비 장르에서 명작으로 손꼽히는 작품이다. <28일 후>은 동물 권리 운동가들이 실험에 쓰인 침팬지를 풀어주는데, 그들 안에는 전염성이 매우 높은 ‘분노 바이러스’가 내재되어 있다는 설정으로 진행된다. ‘분노 바이러스’는 감염되는 즉시 엄청난 폭력성과 살해 욕구를 갖게 되는데, 감염자의 타액이 단 한 방울이라도 닿으면 100퍼센트 감염되는 전염성을 갖고 있는 게 특징이다. 일반적인 좀비물은 좀비가 사람을 ‘물어야’ 죽은 뒤 감염이 되는데 분노 바이러스는 스치기만 해도 감염이 되고, 감염자들 역시 좀비와 달리 죽지 않고 살아있는 사람이라는 점에서 여타 좀비 영화와 전혀 다르게 전개된다. 이러한 독특한 설정은 이후 좀비 영화에 많은 영향을 주었지만, 정작 연출자인 대니 보일은 <28일 후>가 좀비 영화는 아니라고 언급하기도.

 

〈28일 후〉
〈28일 후〉

킬리언 머피는 주인공 짐 역을 맡았는데 의식불명 상태에서 깨어난 평범한 시민이 재앙과 그 안에서 고개를 쳐드는 인간의 이기심으로 인해 점차 각성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캐릭터다. 동정심 많고 여린 감수성을 지녔던 그는 처음엔 갈등을 피하거나 소극적으로 대응하는 등 다소 유약한 모습을 보여주지만 지켜야 할 존재가 생기고 타락한 군인들의 모습에 분노를 느끼며 무기 없이 그들과 맞서 싸우는 대범함을 보여준다. 이 당시 머피는 전혀 인지도가 없는 상태였는데 대니 보일은 스타들의 티켓 파워가 아닌 오로지 작품성만으로 영화를 흥행시키고자 했기 때문에 의도적으로 유명하지 않은 배우들을 주연으로 캐스팅했다. 연기 경력이 거의 없었다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킬리언 머피는 대체 불가능한 연기를 선보였는데 특히 그의 트레이드 마크인 신비롭고 불안한 눈빛은 캐릭터의 변화를 섬세하게 표현해냈다. 평범한 인물이 극한 상황에서 어떻게 변화하는지, 인간성과 본능 사이의 갈등을 설득력 있게 표현해낸 그는 이 작품으로 대중은 물론 할리우드에도 눈도장을 찍으며 전 세계의 주목을 받게 된다.

 


<플루토에서 아침을>

〈플루토에서 아침을〉(2007)
〈플루토에서 아침을〉(2007)

닐 조던 감독의 작품 <플루토에서 아침을>은 패트릭 맥케이브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한 작품으로, 1970년대 아일랜드 분쟁 속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발견하기 위한 여정을 그린 작품이다. 태어나자마자 어머니에게 버려진 주인공 패트릭은 스스로를 ‘키튼’이라는 이름으로 부르는, 여성스럽고 자유로운 성향을 가진 트랜스젠더다. 영화는 친모를 찾기 위해 그가 아일랜드에서 런던까지 가는 긴 여정을 따라가는데, 이 과정에서 그는 폭력과 편견, 상실을 경험하며 끊임없이 자신의 정체성을 지키기 위한 투쟁을 이어나간다. 재밌는 점은 시종일관 유쾌한 톤이라는 점이다. 자신을 버린 친모를 ‘유령 숙녀’라고 부르고, 세상의 벽에 부딪히면서도 자신을 지지해주고 그대로 받아줄 사람이 있을 거란 희망을 버리지 않는다. 심지어 그 희망이 꺾이는 순간에도, 그는 특유의 발랄함과 유쾌함을 잃지 않는다. 영화 속 그는 좌절하거나 비관하지 않는다. 오히려 현실을 진지하게 대하지 않고 마치 몽상하듯, 친모를 유령 숙녀라 표현하는 등 자신의 문제를 진지하게 마주하지 않는다. 오로지 웃고 사랑을 쫓을 뿐이다. 그의 웃음에 슬퍼하는 건 오직 관객뿐이다. 심지어 감옥에 가서도 그는 ‘나의 사랑스럽고 작은 방’이라 말하며 수난을 모른 채 한다. 그러나 영화는 그가 진심으로 상황을 모르고 있지 않음을 계속해서 내비친다. 필사적인 ‘모른 척’이 그만의 생존 방식임을 깨닫는 순간, 텅 비어있는 키튼의 눈동자를 발견한다.

 

〈플루토에서 아침을〉
〈플루토에서 아침을〉

<플루토에서 아침을>을 킬리언 머피 최고 영화라 꼽는 팬들이 있을 정도로 작품 속 머피는 완벽에 가까운 연기를 선보인다. 어떻게든 런던에 도착했지만 넓은 런던에서 친엄마를 찾는 건 사실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다. 연고도 없는 이곳에서 그는 엄마를 찾기 위해 여기저기 떠돌며 웃음을 팔고 자신의 정체성을 무대 위의 웃음거리로 올려 야유를 받고 와중에 폭발사고까지 휘말려 병원 신세를 진다. 아일랜드인 트랜스젠더라는 이유로 테러리스트로 몰리는 말도 안 되는 일까지 겪음에도 여전히 과장된 톤을 유지하는 키튼을 머피는 설득력 있게 해석한다. 키튼의 화려한 모습은 그의 방어기제로, 밝고 당당한 모습 뒤에 숨겨진 외로움과 불안을 디테일하게 표현해낸다. 영화 중간중간 나오는 멍하고 얼빠진 표정이 단순히 나른한 느낌으로 해석되지 않도록, 머피는 키튼의 얼굴에 얕게 비치는 슬픔을 포착해낸다. 그의 연기 경력 중에서 가장 도전적이고, 특별하며 어쩌면 가장 섬세한 킬리언 머피를 볼 수 있는 작품이 아닐지.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2006)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2006)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의 제목은 19세기 시인 로버트 드와이어 조이스의 시에서 따왔다. 사랑하는 연인을 잃고 1798년 반란에 참여하게 된 한 청년의 입장에서 쓰인 시로, “그리고 사랑하는 이의 싸늘한 시신을 눕혔네 / 내가 곧 따라갈 그곳에 / 그녀의 무덤 주위를 쓸쓸히 거닐며 / 정오에도, 밤에도, 이른 새벽에도 / 마음은 갈라질 듯 아프고 /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 소리를 들을 때마다 그렇다네”라는 구절은 자유를 위해 희생된 젊은이들을 상징한다. 제목의 시처럼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은 1920년대 아일랜드 독립 전쟁과 내전을 배경으로, 민족 해방과 정치적 이념의 충돌을 형제의 비극을 통해 그려나간다. 이야기는 크게 두 가지 줄기를 갖고 있는데, 처음엔 영국군의 폭압 통치 아래 자유를 갈망하는 아일랜드 사람들이 독립군 형태인 IRA로 결집해 독립운동에 나서는 과정을 따라간다. 그러나 독립 후 체결된 협정은 또 다른 갈등을 불러오고, 하나였던 아일랜드인은 협정파와 반협정파로 갈라져 내전을 겪게 된다.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

킬리언 머피는 주인공 데이미언 역을 맡아 전쟁으로 인해 이상과 현실, 가족과 신념 사이에서 갈등하는 젊은 의사를 연기했다. 그는 본래 런던으로 떠나 의사가 되려 했으나, 영국군의 학살을 목격한 후 IRA에 합류하게 된다. 그의 형 테디(패드레익 들러니)는 공화군의 지도자로, 형제는 처음엔 같은 이상을 공유하며 싸우지만 독립 후 체결된 협정에 대한 입장 차이로 갈등하게 된다. 상냥하고 예민한 성품의 의사였던 데이미언이 끝까지 신념을 굽히지 않는 IRA 대원이 되기까지의 그 지난한 과정을 머피는 꼼꼼하게 다룬다. 옳다고 생각해 사람을 쏘지만, 그럼에도 인간이기에 끊임없이 따르는 의문에 고통스러워하는 데이미언의 섬세한 내면은 킬리언 머피의 훤한 눈에 고스란히 반영된다. 총구를 갖다 대었을 때 흔들리는 울대와 과민함을 드러내는 마른 몸, 부상자를 치료할 때 단호한 손과 동시에 파르르 떨리는 긴 속눈썹까지. 그는 전쟁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이야기하기보다 얼굴짓으로 관객을 설득한다.

 


<와칭 디텍티브>

〈와칭 디텍티브〉(2007)
〈와칭 디텍티브〉(2007)

로맨틱 코미디 <와칭 디텍티브>는 킬리언 머피가 다치거나, 복면을 쓰지 않는 몇 안 되는 귀한 작품으로 그의 지질하고 귀여운 모습을 마음껏 볼 수 있다. 그는 작품에서 영화광이자 비디오 대여점을 운영하고 있는 평범한(혹은 조금 지질한) 남자 닐 역을 맡았다. 현실보다는 영화 속 세계를 더 가까이 여기는 그는 늘 누아르 영화로 대리만족을 하며 살아왔다. 어느 날 그의 가게에 매력적이고 자유분방한 성격의 바이올렛(루시 리우)가 찾아오며 그의 일상은 완전히 뒤바뀐다. 바이올렛은 닐의 지루한 일상에 강렬한 자극이 되어주고, 두 사람은 함께 엉뚱한 사건들에 휘말리며 색다른 사랑 이야기를 만들어간다. 영화광이 주인공인 만큼 영화 애호가들만 이해할 수 있는 유머와 레퍼런스를 적절히 녹여내며, 작품은 현실과 영화 사이를 경쾌하게 오간다.

 

〈와칭 디텍티브〉
〈와칭 디텍티브〉

이전 작품들에서 보여줬던 강렬한 캐릭터와 달리, <와칭 디텍티브>에서의 머피는 사랑 앞에 서툴고 서럽게 울며 크게 웃는 남자로 또 다른 매력을 드러낸다. 영화처럼 살고 싶지만 예측 불가능한 삶은 불안하고 두려운 그는 어설프게 바이올렛과의 로맨스를 이어가는데 어리숙한 그의 모습은 팬심을 자극하기 충분하다. 처음에는 바이올렛의 행동에 당황해 허둥대다가도 점차 그의 에너지에 매료되어 자신도 조금씩 변화하는 과정을 사랑스럽게 그려낸다. 바이올렛에게 차이고 야구하면서도 엉엉 울어대는 머피의 모습이 백미다. 게다가 기타도 치고, 카우보이 분장까지 한다. 그야말로 “킬리언 머피 종합선물” 같은 작품.

 

씨네플레이 객원기자 김명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