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MCU)가 전 세계를 주름잡던 그 시절에도, 박스오피스 1위를 못 찍은 나라가 바로 일본이었다. 마블민국이라고 불리던 때도 있었던 대한민국 바로 옆 나라인 일본에서만큼은 MCU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히어로무비가 별 인기가 없었다. 당시 일본 극장가를 주름잡던 작품은 애니메이션 극장판이거나, 애니메이션의 실사판 영화였다.
일본은 여전히 그렇다. 얼핏 생각해 보면 히어로무비도 코믹스, 즉 만화 원작 영화이니만큼 인기가 있었을 법도 한데 특유의 애니메이션 감성과는 상이해서 그런지 여전히 북미 기반의 코믹스 원작 영화는 이렇다 할 성과가 없는 것 같아 보인다. 반대로 그런 면에서 일본 특유의 감성을 담고 있는 애니메이션과 실사판 영화들은 여전히 괜찮은 성과를 내고 있다.

애니메이션 실사화가 본격적으로 시작될 무렵만 하더라도, 애니메이션 특유의 감성과 상상력을 실사판으로 잘 풀어내지 못해서였는지-뭐, 작품마다 여러 가지 이유는 있었지만-제작이 확정되었다는 소식이 들려올 때부터 인터넷 커뮤니티를 비롯한 다양한 채널에서 우려의 목소리가 더 컸다. 애니메이션 팬들은 심지어 자조적인 태도를 취하기도 했는데, 실패한 사례가 성공한 경우보다 훨씬 많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대략 <바람의 검심> 실사영화를 기점으로 애니메이션 원작의 실사영화들은 제법 괜찮은 퀄리티를 갖추기 시작했고, 히어로무비 못지않은 인기를 얻기 시작했다. <킹덤>의 실사영화는 그 흐름 속에서 무려 4편이나 제작된 걸출한 시리즈다.

원작 만화 「킹덤」은 하라 야스히사가 ‘주간 영 점프’에 2006년부터 연재한 작품으로, 24년 현재까지 70여 권에 이르는 장편 연재물이다. 재미있는 건 이 만화가 배경으로 하고 있는 곳이 일본이 아닌 중국, 그것도 진시황이 패권을 잡기 전인 전국시대 말기라는 점이다. 일본 인쇄만화로 역사물이라고 하면 대부분의 대중들은 사무라이를 떠올리겠지만, 이쪽은 제법 진지한 사극이다.
그래서였는지 처음에는 큰 반향을 일으키기 못하는 듯했으나 연재 10년차인 2015년부터 슬슬 인기에 힘이 실리더니, 2018년에 50권 발매를 기하여 실사화가 확정된다. 흔히 일본 만화, 애니메이션이라고 하면 상상하기 어려운 소재와 흐름이지만 2023년에는 누계 판매량 1억 부를 돌파하며 명실공히 인기 만화 대열에 이름을 올렸으며, 국내에서도 꽤 높은 인기를 끌고 있다.

주인공인 신은 노예 출신이지만 대장군이 되겠다는 꿈을 품고 친구인 표와 함께 무예 수련에 여념이 없었다. 하지만 표가 진왕 영정(훗날의 진시황)과 닮았다는 이유로 일종의 카게무샤(대역) 역할로 궁에 끌려갔다가 초죽음이 되어 돌아와 결국 사망하고, 신은 친구의 뜻을 지켜 주고자 영정을 구하기 위해 싸움을 시작한다. 이 사건을 계기로 영정과 신은 인연을 맺게 되었으며 신은 영정의 대장군이 되고자 무사의 길을 걷기 시작한다.
진시황의 말년과 최후가 그의 공적만큼이나 잘 알려져 있기 때문이라 그런지, 어쩐지 대단히 기대되는 내용은 아닌 것만도 같지만 실제 정사에는 거의 기록되지 않았던 장군 이신과 진시황을 소재로 한 이 이야기는 제법 흥미진진하다. 이신 장군의 역사적 기록은 초나라 정벌에 실패했다는 것과 천하통일 이후 제후에 봉해졌다는 정도인데, 가차없는 형벌로 유명했던 진시황 시대에 패전하고도 다시 신임 받고 공적을 인정받았다는 점이 의문이기는 하다. 아마도 원작자는 이 지점에서 이야기를 시작한 게 아닐까.

2019년에 개봉한 실사영화 <킹덤>은 애니메이션 실사영화를 여러 번 연출한 적이 있고, <아리스 인 보더랜드> 시리즈의 감독으로도 잘 알려져 있는 사토 신스케가 맡았다. 원작자 하라 야스히사 또한 각본에 참여해 실사화에 힘을 실었다. 주연인 신 역할은 <아리스 인 보더랜드>로 사토 신스케 감독과 작업했었던 야마자키 켄토가 맡았는데, <굿 닥터> 일본판의 주인공, <4월은 너의 거짓말>에서 히로세 스즈와 함께 출연해 한국 관객에게도 익숙한 얼굴인 인기 배우다.
훗날 진시황이 되는 영정 역은 요시자와 료가 연기했는데 <은혼> 실사영화에서 오키타 소고를 맡은 바로 그 배우다. 소고 역을 연기할 때와는 제법 다른 분위기로 작중 특유의 분위기를 잘 표현해 냈다는 평가를 받기도. 여기에 주인공 신과 나름대로 러브라인이 있었던 여자 조역인 하료초는 천년돌로 유명한 그 하시모토 칸나가 맡았다(<은혼> 실사판의 카구라도 이 배우).

올해 11월에 개봉한 <킹덤4: 대장군의 귀환>은 일본에서 박스오피스 80억 엔을 돌파하며 지난 시리즈에 이어 실사영화 흥행 1위를 기록했는데, 일본에서의 인기에 비하면 국내 흥행 성적은 초라하기 짝이 없다. 아무래도 일본 특유의 감성 때문이기도 할 테고, 중국 전국시대라는 소재나 진시황의 이야기라는 점이 그리 흥미를 끌지 않은 것 같기도 하다. 그리고 수많은 히어로무비 프랜차이즈가 겪는 바로 그 문제도 없진 않은데... 실제 역사를 소재로 했다고는 하나 어쨌든 시리즈의 4편이니 등장인물도 많고 알아야 될 사건도 많아 한 편만으로 무난히 따라가기에는 무리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영화를 보려고 역사 공부를 할 사람도, 영화관에 앉아서 역사 공부를 하고 싶은 사람도 그리 많지 않을 거라서….

개인적으로는 약간 아쉽기도 하다. 작품의 감성이 국내 정서와는 미묘하게 안 맞을 것 같기도 하고(신이 왕기 장군에게 반말하는 게 이상하게 거슬리긴 했다), 모든 등장인물이 본토 중국인이란 설정인데 일본어로 대화하는 게 어색하게 느껴지는 지점도 있다. 거기에 일본어로 말하는 배우들이 연기하는 사극이라면 보통은 일본 특유의 헤이안 시대극인 경우가 많으니 아주 어색하지 않을 수는 없을 것이다. 첨언하자면 제목에도 문제가 있다. 우리에게는 이미 조선판 좀비 사극 명작 <킹덤>이 있고 (이제는 고전이라 불러 손색 없는) 다른 드라마 <킹덤>이 있기 때문에….
하지만 원작이 꽤나 흡인력 있는 만큼(괜히 1억 부를 판 게 아니다) 영화도 제법 잘 만들어진 작품이고, 만화적인 상상력과 인물에 대한 재해석 역시 원작 팬 입장에서는 무난하게 재미있는 수준. 배우진들도 보는 재미가 있고, 액션도 각본도 이만하면 나쁘지 않은데 아무래도 만화 원작의 실사영화는 갈 길이 먼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