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 시대 가장 인상 깊은 연기를 보여주던 다니엘 데이 루이스가 작년 6월 은퇴를 발표했다. 지금 촬영 중인 <팬텀 스레드>가 자신의 마지막 영화가 될 거라는 것이었다. 이제 막 환갑을 맞이한 그의 나이로 봐서 그리고 지나치게 과작을 했던 경력으로 봐도 꽤 이른 은퇴였다. 일흔을 넘긴 아놀드 슈왈제네거는 새로운 <터미네이터> 촬영을 앞두고 있고, 실베스터 스탤론 역시 <익스펜더블> 4편과 <록키>의 스핀오프 <크리드>의 속편을 준비 중에 있다. 폴 뉴먼과 그레고리 펙, 로렌스 올리비에, 말론 브란도, 잭 니콜슨, 진 해크만, 숀 코네리 등 전통적인 할리우드 스타들은 모두 일흔 중반 가까이 영화를 찍었고, 피터 오툴과 알렉 기네스는 여든까지도 노익장을 과시했다. 그래서 연기 대가의 깜짝 은퇴는 꽤나 놀랍고 아쉬운 뉴스였다.

대니얼 데이 루이스

하지만 오랜 칩거와 일시적인 은퇴를 몇 차례나 반복했던 대니얼 데이 루이스인지라, 이번 은퇴 발표가 뜬금없거나 새삼스럽지는 않다. 그럼에도 배역에 철두철미하게 몰두해가는 메소드 연기 달인의 부재는 그 어떤 다른 배우로도 채워지지 못할 허전함과 안타까움을 남길 듯하다. 그나마 다행이라고 할 건 그의 마지막 작품이 폴 토마스 앤더슨(이하 PTA)의 영화라는 점이다. 마흔이 되기 전에 이미 <펀치 드렁크 러브>로 칸 영화제 감독상, <데어 윌 비 블러드>로 베를린 영화제 은곰상, <마스터>로 베니스 영화제 은사자상을 수상하며 세계 3대 영화제 감독상을 거머쥔 천재 영화감독이기에, 이번 <팬텀 스레드>에 쏟아지는 기대 또한 남다르다. 하물며 다니엘 데이 루이스의 은퇴작이라는 프리미엄까지 붙어 어떤 명작이 나올지 궁금증을 자아내게 만든다.

팬텀 스레드

그간 미국을 무대로 인간의 본질적이고 철학적인 화두를 담아냈던 PTA는 이 영화에선 1950년대 영국 런던을 배경으로 삼아 예술 장인의 삶 속으로 거침없이 파고들어간다. 의상 디자이너라는 직업을 통해 대배우의 초상을 의미심장하게 대입하고 반추해내고 있다. 강렬하고 소름 끼치는 연기로 흡사 캐릭터에 빙의된 것처럼 보이던 다니엘 데이 루이스는 여기서 살짝 뒤로 물러선 여유와 절제, 담백한 모습으로 자신이 몸담아 온 예술에 대한 열정과 회한을 뿜어낸다. 대가만이 보일 수 있는 위엄이자 고독의 지점이고, 정수이기도 하다. PTA는 그런 천하제일 천의무봉의 솜씨에 대한 예우로 압도적이고 유려한 연출력을 과시하며 사랑과 예술에 대한 이야기를 완성해나간다. 여기에 화룡점정이 되는 건 조니 그린우드의 우아한 음악이다.

조니 그린우드

사실 조니 그린우드는 영화음악가라기 보단 ‘비틀즈’ 이후 영국의 가장 대표적인 록밴드 ‘라디오헤드’의 멤버(리드 기타)로 더 유명한데, 리더인 톰 요크와 함께 밴드 내 음악적 지분을 양분하고 있는 브레인이기도 하다. 1998년 토드 헤인즈의 영화 <벨벳 골드마인>에 톰 요크와 함께 ‘벨벳 언더그라운드’에 영향을 받은 ‘비너스 인 퍼스’란 이름으로 참여한 바 있는 그가 본격적으로 영상 음악에 도전하게 된 건 2003년 사이몬 퍼멀 감독의 다큐멘터리 <바디송>에서부터였다. 여기서 그는 기타와 재즈, 클래식 등 다양한 스타일을 선보이며 자신의 역량을 뽐냈다. 이 영화를 유심히 봤던 PTA가 조니에게 자신의 새 영화 음악을 부탁해 첫 번째 극영화 음악을 맡게 된다. 그게 바로 전설의 시작, <데어 윌 비 블러드>였다.

데어 윌 비 블러드

이전까지 PTA는 존 브라이언과 마이클 펜에게 음악을 맡기며 현대 미국 사회의 여러 모습들에 주목했다. 로버트 알트먼과 마틴 스콜세지의 적자로 불릴 만큼 탁월한 캐릭터 조형술과 입체적인 내러티브를 구사했고, 그들에게 뒤지지 않는 특별한 선곡표를 뽑아냈다. <부기 나이트>는 70년대 사운드의 총체였고, <매그놀리아>는 사운드트랙 이전에 놀랄 만한 에이미 만의 성공적인 독집이었다. <펀치 드렁크 러브>가 가진 정신 나간 사랑스러움과 <하드 에이트>의 스산하고 멜랑꼴리한 감성은 기존의 할리우드 메이저 영화음악가들이 만들어낸 정형적인 스코어들과는 사뭇 달랐다. 하지만 PTA는 존 브라이언과 마이클 펜에 만족하지 않았고, 이후 놀랍도록 변모한다.

조니 그린우드를 영입(?)하며 본격적으로 자신의 독자적인 화법과 창의적인 색채, 압도적인 구도의 걸작들을 선보였다. 일반적인 서사에 집착하지 않고, 캐릭터는 보다 다층적이고 내면적으로 심화되었다. 탐욕과 구원, 성찰과 망상, 본능과 이성 사이에서 방황하며 거대한 주제로 슬며시 들어가 상징과 은유를 마구 쏟아내는 PTA의 <데어 윌 비 블러드> 이후의 영화들은 난해하고 비논리적이지만 강렬하고 아름답다. 이는 폴란드의 혁신적인 현대음악가 크시슈토프 펜데레츠키를 좋아하고, 실험적이고 도전적인 방식의 사운드를 창출하길 원하는 조니 그린우드와 만나 긍정적인 화학 반응을 일으켰다. 그들이 서로에게 미친 영향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크다.
    
지난 10년, 그들이 함께 한 다섯 작품에 대해 간략하게 살펴본다.


데어 윌 비 블러드
(2007)

묵직한 스트링이 귓가를 장악한다. 때론 신경질적으로 날뛰고, 사이렌처럼 불안하게 신경을 건드린다. 서늘한 광기와 그칠 줄 모르는 탐욕, 황폐하고 척박한 환경과 무자비한 폭력을 다루기에 이처럼 잘 어울리는 소리가 또 없다. 조니 그린우드는 난해하고 파편화된 현악을 중심에 두고 피아노로 감성을 건드리며 PTA가 구현하고자 했던 주제들을 직접적이고 적나라하게 표출한다. 과한 에너지와 세밀한 감정선을 동시에 품고 있는 실험적인 접근은 이전의 PTA 영화들에선 전혀 접할 수 없는 깊이와 품격, 격랑과 평정을 담아냈다. 펜데레츠키에게서 받은 영향을 노골적으로 피력하는 사운드는 이전에 조니 그린우드가 BBC 콘서트 오케스트라 상임작곡가로 위촉되며 작업한 결과물 ‘Popcorn Superhet Receiver’에 크게 빚지고 있다. 이 때문에 그해 가장 인상적인 스코어였지만 아카데미 음악상 후보에서 탈락하는 비운을 겪었다.


마스터
(2012)

전작 못지않게 파격적이고 전위적인 불협화음들이 가득하지만, 스트링과 피아노에만 의지했던 첫 영화와 달리, 목관악기들과 오르간, 사운드 디자인에 가까운 앰비언트를 살짝 섞어 한발 나아간 모습을 들려준다. 여전히 음향과 음색에 혁신적인 시도를 보였던 펜데레츠키의 영향력 아래 있으며, 광기와 탐욕의 핏빛 소리들은 유대와 상실, 구원의 고찰로 전이돼 묵직한 항해를 계속 이어간다. 음악적 사용 또한 진일보해서 브람스와 아르보 패르트, 찬송가만 흐르던 전작에 비해 엘라 피츠제랄드와 조 스태포드, 듀크 엘링턴 등 전후 시대적 상황을 묘사하는 곡들이 배치돼 조니 그린우드의 스코어를 상대적으로 보완해주고 있다. 기이하고 불안하지만 그래서 더욱 더 매력적으로 다가오는 그의 형이상학적인 소리들은 PTA의 주제를 더욱 깊고 폭넓게 해석해주는 여지를 선사한다.

'Alethia'

인히어런트 바이스
(2014)

영화화가 불가능하다고 여겨졌던 토머스 핀천의 탐정(?)소설을 원작으로 삼은 이 작품은 한없이 무겁고 강렬했던 앞선 두 편과 달리 보다 장르적인 분위기를 갖고 있다. 이야기가 진행되며 이내 누아르적인 색채는 휘발되고 말지만, 조니 그린우드는 미클로스 로자와 제리 골드스미스 등이 들려줬던 고전적인 스타일을 의도적으로 차용해 중간 중간 클리셰로 활용한다. 다만 여전히 브라스나 혼은 자제하며 현악 편성을 메인으로 둬 자신의 색깔을 명료히 밝힌다. 미스터리 요소를 부각시킬 글로켄슈필(금속 막대를 피아노 건반과 같은 방식으로 배열한 타악기)과 기타를 곁들여 약과 술에 취해 허우적거리는 혼돈에 빠져들게 만든다. 핀천의 미로와 같은 문장만큼이나 점차 몽롱해져가는 사운드가 인상적이다. 시대적인 배경을 드러내는 닐 영과 샘 쿡, 사카모토 큐, 캔, 렉스 벡스터, 더 캐스케이즈 등 삽입곡들의 역할은 더욱 더 커졌다.

'Spooks'

주눈
(2015)

몇 편의 뮤직비디오를 제외하고 극영화만을 연출해온 PTA의 첫 다큐멘터리라는 것도 신선하지만, 역으로 조니 그린우드가 영상 기록을 PTA에게 제의했다는 점도 눈여겨볼 만하다. 조니 그린우드와 라디오헤드 때부터 친했던 프로듀서 나이젤 고드리치, 이스라엘의 작곡가 샤에 벤 쭈르가 인도의 마하자라에 가서 그곳의 뮤지션들과 교류하며 음악을 만들어내는 3주간의 과정을 담았다. 한 시간이 채 안 되는 시간 동안 별다른 내러티브 없이 오롯이 음악에만 집중하며 소통하는 예술가들의 환희에 찬 모습은 아름답고 숭고하다. 기묘하게 휘몰아치며 사이키델릭한 쾌감을 선사하고 열반의 경지에 오르게 만들며 영적인 울림마저 선사하는 음악의 힘이 무엇보다 강렬한데, 한번 들으면 빠져나올 수 없는 마성의 소리들로 순식간에 시간을 지워버린다. 가히 인도판 <부에나 비스타 소셜 클럽>으로 부를 만하다.

'Roked'

팬텀 스레드
(2017)

이 영화에서 PTA가 조니 그린우드에게 요청한 건 단순하게 "엄청나게 압도적인 현악 파트"였다. 하지만 조니는 그런 큰 규모의 오케스트라 연주에 대해 경계했는데, 자칫 진부해 보일 수 있단 생각에서였다. 여러 논의 끝에 그가 찾아낸 방법은 글렌 굴드의 바흐 피아노 연주나 벤 웹스터가 여러 큰 현악 섹션과 함께 한 연주였다. 그런 면에서 <팬텀 스레드>는 그가 작업했던 이전의 결과물들과는 사뭇 다른 결을 지닌다. 이 스코어는 낭만적이고 우아하며 아름답고 정갈하다. 동시에 여전히 도전적이고 도발적인 면모도 갖고 있다. 이는 영화상에서 두 남녀 캐릭터가 보여주는 대립과 집착 그리고 사랑을 무엇보다 탁월하게 드러내기 위해서다. 비록 골든 글로브와 오스카를 놓치긴 했지만 지난해부터 올해까지 각종 시상식에서 가장 많은 음악상을 휩쓴 작품이며, 작년에 나온 가장 뛰어난 영화음악이라 감히 단언해본다.

'House of Woodcock'

사운드트랙스 / 영화음악 애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