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전 tvN 드라마 <마더>가 종영했다. <마더>에 푹 빠져지내서 그랬던지, 그즈음 보았던 몇몇의 드라마와 영화들 속 엄마들의 모습이 더욱 특별하게 느껴졌다. 급기야 그런 생각과 여러 망상은 현실에서까지 이어졌다. 엄마가 나를 낳았던 나이가 지금 나의 나이라는 것이 새삼스럽게 느껴졌으며, 친언니 같았던 사촌 언니들이 엄마가 되는 순간들을 지켜보는 기분이 이상했다. 이렇듯 엄마라는 존재가 조금씩 남다르게 다가왔던 순간들을 영화, 드라마 속 가상의 캐릭터를 통해 되짚어보았다.


누군가에게 이 영화는 너무 예쁘게 만들어진 영화, 요즘 유행하는 말 '소확행'을 잘 담은 힐링 영화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닐지 모른다. 그런 평을 인정하지만, <리틀 포레스트>는 요근래 내 마음속에 꿈틀대던 여러 요소들을 건드리며 마음 한쪽에 자리 잡았다. 그중 가장 큰 이유는 플래시백을 통해 가끔 등장하던 혜원 엄마 때문이었다.

혜원(김태리)이 끊임없이 맛있는 음식을 해 먹으며, 좋은 친구들과 함께 사계절의 시골 생활을 하는 광경을 편안하게 지켜보면서도 떠나지 않는 생각이 있었다. 수능 시험이 끝난 혜원을 두고, 편지 한 장만 남긴 채 떠난 혜원의 엄마(문소리)는 어떤 심정일까. 영화 중간마다 나오는 혜원의 기억 속에 엄마는 왕따를 당하고 돌아와도 침착하게 위로해주던 사람, 남편 없는 것도 별스럽지 않고, 하나뿐인 예쁜 딸에게 레시피를 알려주던 사람이었다. 착한 엄마, 좋은 엄마였는데, 혜원 엄마는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딸이 성장하자마자 집을 탈출해 혜원에게 배신감을 안긴다. 혜원은 커다란 다툼이 없어도, 특별한 미움이 없어도, 엄마도 떠나야만 할 것 같은 순간이 있을 수 있다는 걸 예전에는 이해하지 못했지만 나중에야 이해한다. 나도 혜원처럼 엄마를 대단한 어른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던 적이 있었다. 그러나 지금 돌이켜보면 어떤 순간에는 괜찮은 '척'했던 것이었음이 느껴지는 순간들이 있었다는 생각이 든다. 영화에서 혜원과 엄마가 함께 토마토를 먹던 장면이 유독 기억에 남는 이유다.

리틀 포레스트

감독 임순례

출연 김태리, 류준열, 문소리, 진기주

개봉 2018 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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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이 주제로 글을 쓰고 싶었던 건 드라마 <마더> 때문이었다. 이 드라마에는 여러 유형의 엄마들이 나오는데, 유독 기억에 남는 엄마는 영신(이혜영)과 수진(이보영)이다. 두 사람은 모두 자신이 아이를 선택해 엄마가 되었다. 친엄마에게 버려졌던 어린 수진은 영신에게 입양되어 30년 가까이 큰 사랑을 받으며 컸지만 끝내 마음을 열지 못했다. 이곳을 떠나 아이슬란드로 가서 좋아하는 새를 연구하며 홀로 사는 것만이 인생의 목표. 그런데 아동학대를 당한 채 버려진 아이 혜나(허율)를 마주한 순간, 이 아이의 엄마가 되는 것이 아이와 자신을 위한 구원임을 직감하고 함께 도망치기로 한다. 마치 영신이 고아원에서 수진을 만나 엄마가 되기를 선택했던 것처럼. 수진은 졸지에 유괴범이 된 채 코너에 몰리다 결국 제 발로 영신을 찾아와 도움을 구한다. 영신은 그렇게 도망가려고만 했던 딸이 엄마가 돼서 처음 제 발로 자신을 찾아왔다는 사실이 안타까우면서도 기쁘다. 드라마는 그런 엄마와 딸 사이에 일어나는 미묘한 순간들을 섬세하게 그렸다.

회를 거듭할수록 차가운 포커페이스 표정에 가려졌던 영신과 수진의 얼굴에 감정이 서리는 순간마다 수도꼭지 켠 마냥 눈물이 흘렀다. <신과 함께>를 보면서도 눈물 한 방울 안 흘렸던 눈물 지수 0에 수렴하는 에디터가 말이다. 엄마에게조차 의지하지 않으려 애쓰며, 감정을 드러내지 않던 수진의 얼굴에서 나의 얼굴이 보였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영신은 죽음을 앞에 두면서도 살아오면서 가장 부러웠던 사람이 '수진을 낳은 사람'이라 말한다. 하필 옆에서 드라마를 같이 보던 엄마가 "진짜 사랑했구나"라고 말해서 괜히 더 눈물이 났다.

마더

연출 김철규, 윤현기

출연 이보영, 이혜영, 고성희, 이재윤, 고보결, 김영재, 이정열, 조한철, 하경, 허율, 전혜진

방송 2018, tv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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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마더>에서 자주 인용되는 동화책의 구절이 있다. 아기 토끼가 "엄마. 난 도망갈 거야."라 말한다. 그러자 엄마 토끼는 "네가 도망가면 난 쫓아갈 거야. 넌 나의 귀여운 아기니까." 항상 도망가고 싶어 하는 딸과 그 주위를 맴도는 엄마의 관계를 <마더>가 다소 센 설정으로 표현했다면, <레이디 버드>에서는 보다 일상적으로 그린다. 새처럼 멀리 날아가고 싶어 새 박사가 된 <마더>의 수진처럼 크리스틴(시얼샤 로넌)도 자신을 '레이디 버드'라 이름 지으며, 지긋지긋하고 답답한 고향 새크라멘토를 떠날 궁리뿐이다. 영화엔 보통의 딸과 엄마라면 공감할 여러 장면들이 등장한다. '분노의 포도' 오디오북을 함께 들으며 폭풍 눈물 흘리다가도 엄마의 폭풍 잔소리를 들으며 바락바락 대드는 장면이 바로 이어져도, 별일 아닌 거로 틱틱대며 쇼핑하다가도 내 취향에 딱 맞는 원피스를 고른 엄마에게 "와! 이거 예쁘다"라는 말이 이어질 수 있는 건 이들이 모녀지간이기 때문에 가능하다. 영화는 안타까울 만큼 서로 어긋나고 있는 듯 보이지만, 사실은 눈치채지도 못할 정도로 너무나 당연한 순간마다 엄마라는 존재는 늘 나의 근처를 맴돌았음을 깨닫게 한다.

레이디 버드

감독 그레타 거윅

출연 시얼샤 로넌

개봉 2018 미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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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앤>은 루시 모드 몽고메리의 고전 소설 '빨간 머리 앤'을 재해석한 넷플릭스 드라마다. 원작 소설에서 막 튀어나온 듯한 에이미베스 맥널티의 앤도 훌륭했지만, 제라르딘 제임스가 맡은 캐릭터 마릴라가 더욱 눈에 띄었다. 오빠 매슈가 잘못 데려온 앤이 일을 도울 수 있는 남자아이가 아니라며, 마릴라의 원칙에 없던 딸을 키우게 된 상황이 탐탁치 않다. 퍼프 없는 수수한 차림에 언제나 목 끝까지 단추를 잠근 것만 봐도 그녀가 얼마나 단호하고 원칙주의인지 알 수 있다. 그러나 앤을 딸로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자신이 세운 원칙을 깨는 순간 나오는 츤데레 매력이 상당하다. 마릴라는 언제나 틀을 깨는 상상력으로 당혹스럽게 만드는 앤을 딸이라 받아들이고자 마음먹은 순간, 변화하기 시작한다. 평범한 여자아이의 삶을 거부한 앤을 이해하고, 편이 되어주고자 여성 교육과 페미니즘을 배우며 오히려 본인 스스로 가둬뒀던 틀을 깨고 성장한다.

출연 에이미베스 맥널티, 제라르딘 제임스, R.H. 톰슨, 덜릴라 벨라, 코린 코슬로, 에이머릭 젯 몬태즈, 루카스 제이드 주먼

방송 2017, 넷플릭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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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영화, 드라마를 보며 문득 나는 어떤 엄마가 될까 상상해봤지만, 아무 그림도 떠오르지 않았다. 새삼 현모양처가 꿈이었다 말하던 엄마가 대단하게 느껴졌다. 내 삶을 통째로 뒤흔들고, 바꿀 수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준비를 하고, 기꺼이 선택한다는 것. 사실 나는 아직도 그 마음을 잘 모르겠다.


씨네플레이 에디터 조부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