캘리포니아 새크라멘토에 사는 크리스틴(시얼샤 로넌)은 이제 막 12학년이 됐다. 스스로 ‘레이디 버드’라는 이름을 선사해 남들도 그리 부르길 똑똑히 요구하는 크리스틴 아니, 레이디 버드는 뉴욕 같은 ‘문화의 도시’를 동경하며 얼른 고향을 뜨고 싶다는 생각뿐이다. 하고 싶은 건 또 많아서 저질러는 보는데(“출마가 취미예요”) 대단한 의지는 없어 보인다. 매사 직선적이고 똑 부러지는 엄마(로리 멧칼프)는 늘 ‘최선’을 따지니 틈만 나면 티격태격이다.

절친 줄리(비니 펠드스타인)와 시덥잖은 얘기나 늘어놓으며 시간을 죽이던 와중, 레이디 버드는 학교 뮤지컬 오디션에서 처음 본 귀여운  대니(루카스 헤지스)와 첫 연애를 시작하면서 그나마 활력을 찾는다. 처음으로 가족이 아닌 친구들과 보낸 추수감사절, 파티에서 베이스를  치는 잘생긴 카일(티모시 샬라메)에게도 첫눈에 반한다. 별로 대단하지 않는 자기를 감싸기 위해 거짓이나 날선 말들을 뱉는 레이디  버드는 상처를 주기도, 받기도 잘 한다.

<프란시스 하>(2012), <매기스 플랜>(2015) 등으로 미국 독립영화계 스타 배우로 자리매김한 그레타 거윅은 제 고향 새크라멘토를 배경으로 한 성장영화 <레이디 버드>를 내놓으며 감독으로 데뷔했다. <레이디 버드>의 시나리오 초안은 350페이지에 달했다. 일반적인 시나리오로 따지면 6시간에 육박하는 분량. 결국 <레이디 버드>는 90분 남짓한 러닝타임의 영화로 완성됐다. 레이디 버드가 고등학교 마지막 학기를 통과해 대학생이 되는 가을에서 봄까지의 시간들이 들쭉날쭉 담겨 있다. 그래서 리듬이 아주 빠르다.

<레이디 버드> 촬영 현장. (왼쪽부터) 배우 시얼샤 로넌, 감독 그레타 거윅.

<레이디 버드>의 대부분은 레이디 버드와 그 주변 사람들이 대화를 나누는 순간들로 채워졌다. 레이디 버드는 세상천지 마음에 차는 건 별로 없는데, 싫은 건 무궁무진하다. 불만이 많으니 들이받기도 잘한다. 만만한 건 가족뿐인지라, 그들과 핏대를 세우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레타 거윅은 두 명 혹은 그 이상의 사람들이 레이디 버드와 옥신각신 할 때, 찰진 대사의 맛뿐만 아니라, 그것이 오고가는 리듬을 완벽하게 통제하면서 단숨에 난장판을 맺고 끊는다.

영화가 진행되는 동안 많은 관계와 갈등이 발생하지만, 대개의 영화들처럼 특정한 사건과 그게 해결되는 과정을 보여주는 데에 목매지 않는다. 이야기를 벌려 놓고 그걸 무책임하게 내버려둔다는 인상을 주는 것도 아니다. 그저, 이따금씩 불쑥 튀어오르는 추억의 편린들처럼 나타났다가 사라지기를 반복하며 레이디 버드의 시간이 성큼성큼 앞으로 나아가고 있음을 보여줄 따름이다. 영화 바깥을 사는 우리의 시간도 그렇게 굴러가고 있기에, 자연히 레이디 버드가 통과하는 17살의 시간들에 동참하게 된다.

빠른 전개 속에서도 <레이디 버드>는 쏟아지듯 등장하는 인물들을 허투루 다루는 법이 없다. 존 브라이언의 쿵짝쿵짝 흥겨운 음악과 함께 펼쳐지는 오프닝은 언뜻 밋밋한 학교 생활을 나열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레이디 버드와 앞으로 그녀가 집 바깥에서 마주하게 될 사람들이 한 공간 안에 있음을 은근슬쩍 드러낸다. 그리고 차례차례 레이디 버드 눈 앞에 데려다 놓는다. <레이디 버드> 속 레이디 버드의 절대적인 존재에도 불구하고, 주변 사람들이 뿜어내는 에너지는 저마다의 빛으로 선명하다. 배우 개개인의 역량은 물론, 배우와 캐릭터 사이의 거리를 밀착시켜놓은 듯한 그레타 거윅의 세심한 연출이 이런 미덕을 가능케 한다. 뮤지컬을 연습/공연하는 모습을 정면으로 담은 인서트 숏들은 종종 이 영화가 픽션임을 잊게 만든다.

‘엄마와 딸’. <레이디 버드>의 오랜 가제였다. 그레타 거윅은 주인공의 이름 '크리스틴'을 자기 어머니의 이름에서 따왔다. 영화는 처음부터 끝까지 줄곧 레이디 버드 아니, 크리스틴과 엄마 매리언과의 관계에 집중한다. <분노의 포도> 오디오북을 들으며 같이 눈물을 흘리다가 1분도 안 돼서 고래고래 소리 지르며 싸우는 모녀. 많은 사람들을 만나며 조금씩 성장하는 사이, 부모가 준 이름까지 지워가며 가족을 부정하던 크리스틴은 엄마의 곁으로 되돌아온다. 마주하는 대부분 서로에게 아쉬운 점을 들춰내 기어코 상처를 주고받고 말지만, 어떤 날은 이유도 묻지 않은 채 마음껏 울 수 있는 품을 내어주기도 한다. 엄마와 딸이니까, 이런 회귀가 당연한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결국 우리는 이 당연한 듯한 만남이 자연스러운 우연이 아닌, 엄마의 사랑에서 비롯된 의지였음을 서서히 알게 된다. 철저히 크리스틴의 시점에서만 펼쳐질 것 같았던 영화에서 불현 듯 엄마가 ‘홀로’ 운전하며 새크라멘토 이곳저곳을 바라보는 신을, 성인이 된 크리스틴이 거의 똑같이 반복하는 순간 밀려드는 감동. 레이디 버드가 크리스틴이라는 이름을 비로소 받아들이게 되는 가을, 겨울, 봄을 같이 경험한 사람만이 느낄 수 있다.

레이디 버드

감독 그레타 거윅

출연 시얼샤 로넌

개봉 2018 미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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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네플레이 에디터 문동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