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부턴가 다르게 들려 언제부턴가 다르게만 보여 / 혼자 끓인 라면처럼 혼자 마시던 쓴 소주처럼 이젠 내 입가에 머무네” (머물다 재섭 Theme)

어느 날부터 재섭(김태우)의 눈과 귀에 소희(김민정)가 머물기 시작한다. ‘혼자 끓인 라면혼자 마시던 쓴 소주는 재섭의 상황을 대변한다. 서른둘의 나이지만 사회인의 냄새가 물씬 풍기는 대학 동기들과 어울리지 못하고 친구도 없이 늘 혼자 라면을 끓여먹고 혼자 소주를 마시며 늘 똑같은 일상을 보낸다. 학원 강사 일을 하는 그의 앞에 소희가 나타난다.

왜 사랑은 이렇게 두려운지 그런데 왜 하늘은 맑고 높은지 / 왜 하루도 그댈 잊을 수 없는 건지 그 누구도 내게 일러주지 않았네 /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갈까 그냥 또 이렇게 기다리네 / 왜 하필 그대를 만난 걸까 이제는 나는 또 어디를 보면서 가야할까” (그 누구도 일러주지 않았네 소희 Theme)

열일곱의 소희는 원조교제를 한다. 집과 학교에선 겉보기에 문제없는 모범생이지만 속은 그렇지 못하다. 재섭의 학원으로 옮긴 소희는 일반적인 사회인 같지 않은 재섭에게 관심이 간다. 같은 동네에 사는 걸 알게 된 뒤로 둘은 함께 버스를 타고 다닌다.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갈까 그냥 또 이렇게 기다리네망설이며 소희는 재섭을 본다.

서른둘과 열일곱. 소재는 자극적이지만 영화는 전혀 자극적이지 않게 흘러간다. 각자 상처를 안고 있는 이들은 서로에게 한 번씩 우는 모습을 보이고, 그 어떤 것도 확실히 하지 않은 채 영화는 막을 내린다. 담담하게, 조바심 없이.

여기에 루시드 폴의 음악은 꼭 맞는다. 그는 2002년 당시 정규 앨범을 한 장 발매한 신인 음악가였지만 연출을 맡은 이미연 감독은 그에게 사운드트랙 전체를 맡겼다. 그 기대에 부응하며 루시드 폴은 어쩌면 영화보다 더 오래 얘기되는, 또는 늘 영화와 한 몸처럼 함께 얘기는 멋진 사운드트랙을 한 장 만들었다.

루시드 폴의 음악세계는 거칠게 초기와 그 이후로 나눌 수 있을 것이다. 시리도록 아름답고 서정적이지만 한편으로 냉소도 담고 있는 미선이와 초기 루시드 폴, 그리고 이른바 월드뮤직에 경도되며 그 음악을 자신의 한 부분으로 삼으려 했던 이후의 루시드 폴. <버스, 정류장>의 루시드 폴은 1집과 2집 사이에 있는 앨범이다. 말하자면 초기 루시드 폴의 서정을 마음껏 감상할 수 있는 앨범이라는 얘기다.

기타와 피아노가 중심에 있고 필요할 때 밴드 편성이 붙는다. 재섭의 테마인 머물다와 소희 테마인 그 누구도 일러주지 않았네는 악곡뿐 아니라 가사까지도 담담하게 그들의 심정을 대변한다. 기본 테마를 변주하거나 미선이 시절의 음악을 다시 가져온 연주곡들이 있지만 <버스, 정류장>을 이끌어가는 건 주인공들의 마음을 대변하는 노래곡들이다. 루시드 폴의 노래뿐 아니라 당시 스웨터의 멤버로 활동하고 있던 이아립의 따뜻한 목소리를 비중 있게 빌려왔다. 루시드 폴이 미선이 시절부터 해온 커다란 농담같은 마지막 성인가요풍의 노래 약속된 사랑을 제외하곤 앨범 전체가 자연스럽게 흘러간다.

lucid fall(루시드폴) - 그대 손으로, <버스, 정류장> OST

이 자연스러운 흐름 안에서도 유난히 도드라지게 들리는 동명의 타이틀곡 그대 손으로가 있다. 김태우가 숨을 참고 터널을 달리는 장면이 뮤직비디오에 쓰이며 영상과 음악이 하나처럼 붙어버렸다. 정갈한 밴드 연주에 루시드 폴의 연약한 목소리가 흘러나오며 노래는 완성된다. 그리고 그 노래는 처음 시나리오를 쓸 때부터 존재했던 것처럼 완벽하게 영화를 대변한다. 노래의 가사는 대략 이렇다. 소희와 재섭의 마음이 꼭 이랬을 것이다.

나는 쉴 곳이 없어 고달픈 내 두 다리 어루만져주오 그대 손으로 그대 손으로 / 지금 가야만 한다면 그대 품으로 그대 품으로

버스, 정류장

감독 이미연

출연 김태우, 김민정

개봉 2001 대한민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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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학선 대중음악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