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탐정 코난: 제로의 집행인>

개봉 3주차를 넘겨서도 <어벤져스: 인피니티 워>(이하 <인피니티 워>)의 흥행 질주는 무서울 정도다. 국내에선 1000만을 넘긴 다섯 번째 외화가 되었고, 딱히 경쟁작도 없는 독주 체제라 어느덧 <아바타>의 외화 흥행 1위 기록인 1300만에 근접하고 있다. 외화 개봉 제한에서 풀린 중국마저 11일에 개봉하며 첫 주말 수익 2억 불이라는 엄청난 성적을 기록했다. 중국의 가세로 <인피니티 워>는 역대 전 세계 흥행 5위에 올라서며 20억 불 돌파를 목전에 두고 있다. 다만 이렇게 식을 줄 모르는 엄청난 마블 돌풍에도 조금은 시큰둥한 모양새의 나라가 있으니, 바로 흥행의 갈라파고스(!)라 불리는 일본이다.
 
만화와 TV 기반의 전대물이 탄탄이 자리 잡은 일본에선 유달리 할리우드산 슈퍼 히어로들이 맥을 추지 못했다. 소니가 제작한 스파이더맨시리즈를 제외하곤 마블과 DC 모두 기대 이하의 성적표를 받아들곤 했다. 이번 <인피니티 워> 역시 97년부터 매년 만들어져 온 명탐정 코난22번째 극장판인 <명탐정 코난: 제로의 집행인>(이하 <제로의 집행인>)에 밀려 개봉 첫 주에 2위를 기록했다. 그리고 3주차가 지났음에도 여전히 초등학생 코난에 막혀 한 번도 정상을 차지하지 못하고 2위에 랭크돼 있다. 이번 <제로의 집행인>은 그간 코난 극장판 시리즈 중 가장 성공했던 <진홍의 연가>를 넘어 최고 수익을 기록할 것으로 보인다.


만화의 나라 일본
<기동전사 건담 디 오리진>

일본 박스오피스에서 강세를 보이는 건 이처럼 애니 기반의 영상물들이다. 현재 5주째 1위를 달리고 있는 <제로의 집행인>을 비롯해, ‘짱구는 못 말려26번째 신작 <폭성! 쿵푸 보이즈 라면 대란><기동전사 건담 디 오리진> 등 전통적인 아니메 극장판 시리즈가 Top 10에 당당히 머물고 있으며, 뒤늦게 개봉한 할리우드산 애니메이션 <보스 베이비><코코>도 몇 주째 차트에 머물고 있다. 얼마 전 TV 아니메로 방영되었던 인기 만화 원작의 <옆자리 괴물군> <이누야시키> 실사 영화판까지 합하면 무려 지난주 박스오피스 10 7편이 만화와 관련된 작품들로 도배돼 있었다. 가히 만화의 나라다운 박스오피스의 모습이다.
 

<사랑은 비가 갠 뒤처럼>

하지만 만화 원작의 영화들이 주류 상업영화를 잠식하자, 일부 일본 영화계 관계자들은 얄팍한 코스프레 쇼에 가까운 기획물의 범람과 기형적인 시장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를 내기도 했다. 이런 자성의 시각에도 불구하고 대중의 기호에 맞춰 양산돼 상업적인 성공을 가져오는 현 일본 영화계의 세태는 그리 쉽게 변하지 못할 것 같다. 5월말 개봉할 <사랑은 비가 갠 뒤처럼>을 시작으로, <나팔꽃과 카세씨>, <시노짱은 자기 이름을 말하지 못한다>, 2000년대 소년점프 3대 만화 중 하나였던 <블리치>, <무지개빛 데이즈>, <선생군주(일명:철벽선생)>, <은혼 2><카사네>, <하드코어> 등이 만화 원작의 실사판 영화들이 줄줄이 대기 중에 있다.


어느 누구도 만화 원작의 작품을 거쳐 간다
<미래소년 코난>

만화가 일본 문화 전반의 주요 키워드로 자리 잡은 만큼 일본의 많은 영화음악가들도 여기서 벗어날 수 없는데, 거의 모든 작곡가들이 한 번쯤은 만화 원작의 영상물들을 거쳐 갔다고 할 만큼 친숙하고 익숙한 경험이다. 장르와 국적, 매체와 세대를 가리지 않고 온갖 종류의 다양한 이야기가 쏟아져 나오는 터라, 음악 또한 무국적의, 한정되지 않은, 그리고 정의할 수 없는 놀라운 소리들로 넘쳐난다. 그 경계 없는 상상력이 주는 효과가 엄청나지만, 때론 감당할 수 없는 문화적 충돌과 반발을 불러오는 경우도 있다. 그럼에도 일본 작곡가들이 지니고 있는 순발력과 적응력은 기시감과 함께 독자적인 특유의 문화를 생성해낸다.
 

<장난꾸러기 왕자의 큰 뱀 퇴치>

일본 영화음악의 거두 이후쿠베 아키라는 그 옛날 토에이 동화의 명작 <장난꾸러기 왕자의 큰 뱀 퇴치>의 음악을 맡아 놀라운 충격을 전달한 바 있고, 구로사와 아키라의 후반기 작업을 도왔던 이케베 신이치로는 미야자키 하야오의 TV 아니메 <미래소년 코난>의 음악을 담당했다. 심지어 애니와 관련이 없을 것 같은 류이치 사카모토조차 가이낙스의 태동을 가져왔던 <왕립우주군: 오네아미스의 날개> 음악을 유일하게 작업한 바 있다. 현재 일본 영화음악계에서 가장 활발히 활동하는 히사이시 조가 일련의 지브리 작업들을 통해 거장으로 발돋음한 건 단연 상징적인 의미이자 현 일본 영화음악의 현실을 내포하는 단면이기도 하다.
 
최근 제작된 일본의 만화 원작의 실사판 영화들과 그 작곡가들에 대해 살펴본다.


은혼 (2017)
by 세가 에이지 (변태가면 / 사이키 쿠스오의 재난)
세가 에이지

<은혼>은 소라치 히데아키가 2004년부터 연재한 병맛+막장 개그 만화를 바탕으로, 만만치 않은 변태력(!) 지니고 있는 후쿠다 유이치 감독이 오구리 슌과 스다 마사키, 하시모토 칸나를 데리고 실사화했다. 음악을 맡은 세가 에이지는 2009년 방영된 일드 <도쿄 DOGS>를 통해 후쿠다 감독과 의기투합했는데, 궁극의 <변태가면> 시리즈와 <사이키 쿠스오의 재난> 등을 함께 만들며 만화 원작의 세계관을 경험한 바 있다.

<은혼> / <변태가면> OST.

1980년대 후반부터 지금까지 2000 편의 CF음악을 작곡했던 독특한 이력이 말해주듯 그는 감각적이고 순발력 있는 소리들을 선사한다. B급 유머들과 각종 패러디들을 질퍽하니 구사하는 감독의 연출과 달리 세가 에이지의 스코어는 진지하고 여유로우며 박진감 넘치는데, 그 간극 때문에 웃음 터지고, 독특한 아우라가 조성된다. 일본식 블록버스터를 표방한 만큼 기백 넘치는 사운드가 만화적 스케일과 특유의 세계관을 만들어낸다. 올여름에 나올 속편에서도 그들의 호흡이 기대된다.

은혼

감독 후쿠다 유이치

출연 오구리 슌, 스다 마사키, 하시모토 칸나, 나가사와 마사미, 오카다 마사키

개봉 2017 일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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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태 가면

감독 후쿠다 유이치

출연 스즈키 료헤이, 시미즈 후미카, 무로 츠요시

개봉 2013 일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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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키 쿠스오의 재난

감독 후쿠다 유이치

출연 야마자키 켄토

개봉 2017 일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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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티니: 가마쿠라 이야기 (2017)
by 사토 나오키 (우미자루 / 암살교실 / 비밀 / 기생수 / 바람의 검심)
사토 나오키

1984년부터 연재된 사이간 료헤이의 만화 <가마쿠라 이야기>를 일본에서 가장 CG를 잘 구사한다고 정평이 난 야마자키 다카시 감독이 실사화했다. 유령과 요괴, 사신과 미스터리 등이 절묘하게 배합된 독특한 분위기를 살리기 위해 야마자키 감독과 오래 호흡을 맞춰온 사토 나오키가 음악을 맡아 스펙터클하고 유려한 사운드를 선사한다. 마치 할리우드의 대니 엘프만이나 제임스 뉴턴 하워드가 연상되는 환상적이고 동화적인 심포닉 스코어다.
 

<데스티니: 가마쿠라 이야기>

<올웨이즈 3번가의 석양>으로 일본 아카데미 최우수 음악상을 수상한 그는 일본에서 가장 할리우드 작풍에 맞닿아 있는 작곡가로 드라마틱하고 서사적인 음악을 들려주는데, 그런 이유에서 유달리 만화 원작의 실사화 작품들을 많이 담당했다. 그뿐만 아니라 <교향시편 유레카 세븐>, <스트레인저 무황인담>, <프리큐어> 시리즈, <모야시몬>, <암살교실> 등의 아니메에서도 눈에 띄는 활약을 보였다. 무엇보다 멜로디를 직조하는 탁월한 능력과 능수능란하게 작품마다 변신하는 호쾌한 편곡 센스는 그를 현재 일본에서 가장 잘 나가는 작곡가 반열에 올려놓았다.

데스티니: 가마쿠라 이야기

감독 야마자키 다카시

출연 사카이 마사토, 타카하타 미츠키

개봉 2017 일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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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웨이즈 - 3번가의 석양

감독 야마자키 다카시

출연 호리키타 마키, 요시오카 히데타카

개봉 2005 일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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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인 (2017)
by 칸노 유고 (호타루의 빛 / 3월의 라이언 / 카이지)
칸노 유고

죽어도 되살아나는 신인류 아인을 통해 현생 인간에 대한 냉소적인 시각을 엿볼 수 있는 사쿠라이 가몬의 SF 액션 만화로, 2012년 연재돼 빠른 시간 안에 TV 애니와 실사판이 만들어진 작품이다. <춤추는 대수사선> 시리즈로 잘 알려진 모토히로 카츠유키 감독이 연출을 맡고, 그와 일드 <SP>부터 함께 해온 칸노 유고가 음악을 담당했다. 대학 재학 시절부터 영화와 애니, TV, CF 등에서 다방면으로 활약할 만큼 그의 재능과 센스가 빛났다.

<아인> OST.

일렉트릭 테크노를 기반으로 오케스트레이션과 실험적인 음향, 코러스까지 곁들이며 스타일리쉬한 스코어를 들려주는 그의 색깔은 <아인>에서도 유효한데, 독특하게도 TV 애니판과 실사영화의 음악 모두 자신이 담당했다. 다크하면서도 화려하고 강렬한 사운드를 들려준다는 점에서 그와 모토히토 감독이 작업한 애니 <싸이코-패스> 연상시키기도 한다. 워커홀릭이라 할 만큼 다작에 능하며, 공동 작업에도 거리낌이 없고, 성공한 TV 시리즈가 굉장히 많다. 장르와 매체에 대한 이해도가 높지만, 스타일이 강조되다 보니 다소 비슷하게 느껴지는 감도 없지 않다.

아인

감독 모토히로 카츠유키

출연 사토 타케루, 아야노 고

개봉 2017 일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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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타루의 빛

감독 요시노 히로시

출연 아야세 하루카, 후지키 나오히토, 야스다 켄, 이타야 유카, 마츠유키 야스코, 테고시 유야

개봉 2011 일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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죠죠의 기묘한 모험: 다이아몬드는 부서지지 않는다 제1장 (2017)
by 엔도 코지 (테라포마스 / 무한의 주인 / 비밀의 아코짱 / 두더지의 노래: 잠입탐정 레이지 / 신이 말하는 대로)
엔도 코지 (오른쪽)

아라키 히로히코가 그린, 연재 30년을 넘긴 일본의 대표적인 인기 만화 <죠죠의 기묘한 모험> 4부를 미이케 다카시 감독이 실사화한 작품으로, 음악은 그의 단짝인 엔도 코지가 담당했다. 최근 만화 원작의 실사화 전문 감독이 되어가는 듯한 미이케 감독만큼이나 엔도 코지도 전문 작곡가가 되어가는 느낌인데, 정작 그는 애니메이션 음악을 맡은 경우가 거의 없다. 그도 그럴 것이 1년에 4편 이상의 다작을 소화하는 터라 시간적 여유조차 없기 때문으로 보인다.
 

<죠죠의 기묘한 모험: 다이아몬드는 부서지지 않는다 제1장>

데뷔 초기 락킹한 사운드를 바탕으로 다양한 실험과 독특한 악기 선택을 멈추지 않았던 엔도 코지는 여전히 새로운 스타일의 접목을 꾀하고 있다. <스키야키 웨스턴: 장고>의 서부음악, <악의 교전>의 재즈, <바람에 맞선 사자>의 아프로 사운드, <무한의 주인>에선 한국 전통의 국악과의 교류를 시도하더니, 이번 <죠죠의 기묘한 모험>에선 그레고리안 스타일을 가미했다. 국적 불명의 짬뽕 사운드가 만들어내는 이색적인 색채는 만화 원작임을 숨기지 않으며, 미이케 타카시 감독만의 고유한 지장과 재미를 부각시킨다. 엔도 코지의 역할이 그래서 중요하다.

죠죠의 기묘한 모험 : 다이아몬드는 부서지지 않는다 제1장

감독 미이케 다카시

출연 야마자키 켄토, 카미키 류노스케, 고마츠 나나, 오카다 마사키

개봉 2017 일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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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한의 주인

감독 미이케 다카시

출연 기무라 타쿠야, 스기사키 하나, 후쿠시 소우타, 이치하라 하야토, 토다 에리카

개봉 2017 일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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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누야시키 (2018)
by 야마다 유타카 (일주일 친구 / 데스노트 / 블리치)
이누야시키

<이누야시키> <간츠>로 잘 알려진 오쿠 히로야가 2014년부터 17년까지 그린 SF 만화로, <간츠>와 또 다른 만화 원작의 <아이 엠 히어로>, 새로운 <데스노트:더 뉴 월드>를 연출했던 사토 신스케가 실사화한 작품이다. 몇 편의 일드와 TV 애니 <도쿄 구울>로 지명도를 높인, 서른이 채 안된 젊은 작곡가 야마다 유타카가 음악을 맡았다. 비교적 짧은 경력임에도 굵직굵직한 대작들의 크레딧을 꿰차며 최근 가장 주목받는 신성으로 떠올랐다.
 

<이누야시키> / <도쿄 구울> OST.

화려하고 세련된 감각으로 일드 주제곡과 <도쿄 구울>에 삽입된 보컬 곡을 다루며 인기를 얻었지만, 그의 진가가 발휘되는 건 폭풍처럼 휘몰아치는 클래시컬하면서 전위적인 사운드에서다. 섬세한 피아노와 팝적인 접근법, 여기에 압도적인 오라토리오에, 긴장감 넘치는 일탈이 만들어내는 그의 악곡은 쉬 잊히지 않는 전율과 감동을 안긴다. <이누야시키>에서도 이런 <도쿄 구울>의 색채가 고스란히 이어지고, 초월적인 힘을 얻은 보잘 것 없는 인간의 나약함을 대비해 표현한다. 차기작으로 대기 중인 <블리치>에서도 그 위압감 넘치는 소리들을 기대해본다.

<블리치>
이누야시키

감독 사토 신스케

출연 사토 타케루, 키나시 노리타케

개봉 2018 일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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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리치

감독 사토 신스케

출연 후쿠시 소우타

개봉 2018 일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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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운드트랙스 / 영화음악 애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