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 한국 최고의 음악가가 누구냐 물어온다면 고민하지 않고 조동익을 택할 것이다. 1980년대 그가 만든 밴드 ‘어떤날’ 두 장의 앨범이 조금의 바램도 없이 여전히 빛나고 있고, 1990년대 그가 편곡과 프로듀싱으로 참여해 만든 수많이 앨범이 있기 때문이다. 20대 시절 그는 풋풋한 청년의 모습으로 ‘어떤날’이라는 위대한 유산을 만들어냈고, 30대가 되어서는 능숙한 편곡가·프로듀서로 수많은 앨범에 참여해 앨범의 주인공들을 빛나게 해주었다.
재능이 넘쳐흐르던 그에게 작업 의뢰가 많이 들어오는 건 물론이었다. 한국 대중음악의 황금기라 불리는 1990년대의 그 수많은 앨범에 그는 편곡가로, 프로듀서로, 베이스 연주자로 참여했다. 의뢰 가운데는 영화음악 작업도 있었다. 당시 시장 구조에서 영화를 위해 만들어진 스코어는 영화 안에서만 소비된 채 기록으로 존재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조동익의 <Movie>는 그런 상황에서 만들어진, 또는 그런 상황이 만든 앨범이었다.
<Movie>는 이상한 앨범이다. 누군가는 이 앨범을 조동익 2집이라 명명하지만 <Movie>를 정규 앨범으로 보긴 어렵다. <Movie>는 영화 <장미빛 인생>(1994)과 <넘버 3>(1997)의 스코어를 모아 만든 일종의 편집 앨범이다. <넘버 3>는 아예 사운드트랙이 만들어지지 않았고, <장미빛 인생>은 1994년 사운드트랙이 발매됐지만 구하기가 하늘의 별 따기다. 음원으로도 들을 수 없다. 조동익은 두 영화의 주요 테마와 주제가를 고르고 재배치해 제목 그대로의 <Movie>를 만들었다.
<장미빛 인생>을 연출한 김홍준 감독과 <넘버 3>의 송능한 감독은 모두 영화음악에도 많이 신경 쓰는 감독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김홍준 감독은 이후 아예 음악가들의 삶을 다룬 <정글스토리>를 만들어 신해철에게 영화음악을 맡겼고, 송능한 감독 역시 <세기말>의 사운드트랙을 신해철에게 맡겼다. 이처럼 영화음악의 중요성을 진작부터 알고 있던 두 감독이 데뷔작의 영화음악 적임자로 낙점한 이가 조동익이다.
조동익이 만든 스코어는 각각의 영화와 닮아있다. 뒤틀린 유머와 냉소가 가득했던 <넘버 3>에선 전자 프로그래밍 사운드를 전면에 등장시키며 숨 가쁘게 영화의 각 컷들을 쫓고, 가리봉동의 심야 만화방을 중심으로 다양한 인간 군상의 모습을 담은 <장미빛 인생>에는 영화에서 전해지는 따뜻한 기운처럼 서정적인 소품이 가득 자리하고 있다.
그는 영화라는 매체를 빌어 장르에 구애받지 않는 다양한 시도를 두 영화 사운드트랙 안에서 할 수 있었다고 밝혔다. 가령 ‘현기증’이나 ‘이탈’에선 박용준에게 프로그래밍을 맡기며 그동안 조동익의 음악에선 들을 수 없던 전자 사운드를 들려준다. 이 전자 사운드마저도 ‘조동익식 일렉트로닉’이라 해도 좋을 일관된 정서를 담고 있다. <장미빛 인생>에선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조동익의 서정이 펼쳐진다. 박용준과 김광민의 피아노를 중심으로 한 아름다운 멜로디가 있고, 당시엔 정말 상처 입은 짐승 같았던 김장훈의 목소리가 아프게 울려 퍼지는 주제가 ‘아침을 맞으러’가 있다. 비록 온전하게 사운드트랙 전체가 전해지진 못하지만 이 노래가 이렇게나마 기록으로 남은 건 다행스러운 일이다.
이제 더 이상 조동익은 1990년대처럼 활발하게 활동하지 않는다. 장필순의 앨범을 비롯해 가깝게 지내는 동료·후배의 작업을 가끔씩 도울 뿐이다. 지금 그의 작업을 살펴보면 <Movie>가 일종의 전조처럼 들리기도 한다. 제주에 머무는 그는 이제 <Movie>에서 조금씩 시도해보았던 전자 사운드와 프로그래밍을 스스로 해내며 치열하게 소리의 세계를 쌓고 있다. 곧 발매될 장필순의 8집에서도 <Movie>에서부터 시작된 그의 일렉트로닉 사운드를 경험할 수 있다. 한국 영화음악의 측면에서도, 조동익이라는 위대한 음악가의 자취를 쫓는 의미에서도 <Movie>는 충분한 가치가 있다.

- 넘버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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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 송능한
출연 한석규, 최민식, 이미연
개봉 1997 대한민국

- 장미빛 인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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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 김홍준
출연 최명길, 최재성
개봉 1994 대한민국
김학선 대중음악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