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이플쏘프> 개봉 소식을 듣고 먼저 떠오른 질문. 왜 하필 지금? 이 다큐멘터리가 제작된 2016년이 로버트 메이플소프 탄생 70주년이었기 때문일까? 혹시 과도하게 달궈진 PC(Political Correctness, 정치적 올바름) 문제를 반박하는 걸까? 예술계의 오만방자한 자기검열을 지적하는 걸까? 영화가 끝나고, 모든 추측이 빗나갔음을 알았다. <메이플쏘프> 사진가 메이플소프가 남긴 유산이 아닌, 인간 로버트를 기억하는 다큐멘터리였다.


로버트 메이플소프, 그리고 지금의 우리
간단히 로버트 메이플쏘프란 인물을 설명해보자면, 가장 파격적인 작품을 내놓은 사진가로 유명하다. 그는 남성의 나체, 성기를 전면으로 내세운 사진을 발표했다. 그의 이 ‘별난’ 작업물은 물론이고 스스로 동성애자임을 숨기지 않아 당시 사회적으로 상당한 논란을 모았다. 1980년대에 에이즈 판정을 받고 1989년에 사망했는데, 그의 작품들은 과거와 달리 사진 예술의 범주를 넓힌 명작들로 평가받고 있다. 

<메이플쏘프> 오프닝에서 법정에서 그의 작품을 힐난하는 제시 헬름스 상원 의원을 담는다(원제목의 부제인 “Look at the pictures!(이 사진들을 보십시오!)가 그의 말이다). 그러다 방향을 홱 돌려 메이플소프가 자란 집을 바라본다. 그리고 로버트의 누이의 인터뷰로 <메이플쏘프> 본격적인 막을 올린다.   

제시 헬름스 상원의원.

이 다큐멘터리는 오프닝에서 잠시 사진가 메이플소프가 빚은 논란을 보여줄 뿐, 그의 업적이나 미학, 영향 등에 큰 관심이 없다. 때때로 그의 작품에 찬탄하는 큐레이터들의 모습이 포착되긴 하나 대부분 지인의 인터뷰와 그가 남긴 자료 등으로 로버트가 살아온 시간을 되짚어볼 뿐이다.
 
그래서 사실, 다큐멘터리 <메이플쏘프> 자체는 평범하기 그지없다. 가족, 애인, 지인들의 인터뷰와 당시 자료화면을 엮어낸 전개는 여느 다큐멘터리와 크게 다르지 않다. 로버트를 잘 아는 관객이라면 이 다큐멘터리가 무의미한 동어반복이라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럼에도 <메이플쏘프> 무척 특별한 잔상을 남기는데, 헐벗은 남성들의 몸(과 성기)을 쏟아내듯 스크린에 그린다는 점, 인간 로버트의 매력과 결함을 모두 담았다는 점 때문이다.

토마스 / 켄 무디

당시 사회상이 어땠으며, 로버트의 파격적인 작품들(남성의 성기, 본디지를 비롯한 사도마조히즘, 동성애적 페티시 등)이 어떻게 파장을 불러일으켰는지 접근해보는 것도 흥미로울 것이다. 하지만 <메이플쏘프> 그런 시각을 거의 생략한다. 대신 로버트의 작업이 그의 삶과 함께 어떻게 변화했는지 집중한다. 로버트는 게이 포르노 잡지를 보다 성적 정체성을 자각해 콜라주 작업을 시작했고, 사랑에 빠진 애인을 담고자 본격적으로 사진을 시작했으며, 당시 유행한 SM 클럽에 빠졌기 때문에 사도마조히즘적 작품을 남겼다. 요컨대 그의 작품은 골머리를 앓으며 떠올린 예술적 전략이 아니라, 스스로 사랑하는 삶의 파편들을 담은 것이다. “예술가는 작품으로 표현할 때 자신에 대해 알아가게 된다 그의 말은 진심이고 경험담인 셈이다.

켄 무디와 로버트 셔먼.

거기에 그는 고매한 성질의 예술가가 아니었다. (인터뷰이들의 말을 빌리자면) 엄청난 야망을 품은, 언제나 타인의 관심을 받길 바라는 인간에 가까웠다. 전시회 명단에서 알파벳 순서로 동생 에드워드가 먼저 배치되자 길길이 화를 내며 개명을 요구하고, ‘생을 마감하기 전까지 앤디 워홀보다 돈을 많이 벌수 있겠냐’고 묻고, 자신이 에이즈로 죽어가기 때문에 열린 회고전에 참석하고. <메이플쏘프> 로버트의 관심을 갈구하는 기질을 감추지 않고 드러낸다. 그의 (여장을 하거나, 악마를 상징하는 거꾸로 달린 별 앞에서 총기를 들거나, 항문에 채찍을 꽂은) 자화상에서 엿보이는 무한한 자신감과 자기 신뢰처럼.

메이플소프의 ‘자화상’들.

<메이플쏘프> 핵심은 사진이 아닌, 로버트의 이런 성격에 있는 게 아닐까 싶다. 뻔뻔하리만큼 자기애에 가득 찬, 그걸 사진으로 승화한 로버트의 삶은 지금 자주 언급되는 ‘자존감’이란 단어를 떠올리게 한다. 학계에서 지적하듯 현대인들은 경쟁사회와 SNS에서 타인과 비교하는 행위를 반복하면서 자기혐오나 낮은 자존감 등을 경험하고 있다. <메이플쏘프>는 더 우아하거나 고상한 예술가가 아닌 로버트 메이플소프를 다룸으로써 자기 확신에 가득찬 이가 어떤 걸 성취하며 어떻게 아름다울 수 있을지를 시사한다. 비록 전면에 그런 문제를 다루는 건 아니지만, 극장 문을 나설 때 기묘한 환희를 느낀다면 이 때문이리라.


물론 <메이플쏘프> 극장에서 봐야 하는 이유는 이외에도 많다. 먼저 109분의 시간 동안 로버트의 작품을 쉴 틈 없이 만날 수 있다. 로버트 메이플소프는 생전 12만 점 이상의 작품을 남겼는데, <메이플쏘프>에서 그중 대표작으로 손꼽히는 사진들을 만날 수 있다. 전시회 초대장으로 사용한 자신의 성기(!) 사진은 물론이고 <폴리에스테르 양복을 입은 남자>, 수많은 자화상과 유명인사들을 촬영한 사진 등 거대한 스크린으로 소환된 아름다움을 만끽할 수 있다.

메이플소프가 작업한 꽃 사진들.

그의 작품 수위’에 덜컥 겁이 날 수도 있지만, 그가 늘 강렬한 소재를 선택한 건 아니다. 로버트는 꽃을 촬영한 작품으로도 유명하다. 로버트가 인물에게서 잠깐의 찰나를 포착했다면, 꽃에서는 새로운 시각을 곁들여 고요하게 생동하는 아름다운 피사체를 담아냈다. 수많은 명사들의 사진 역시, 브룩 쉴즈가 메이플소프를 처음으로 자신의 옆모습을 찍은 작가라고 말하듯 인물의 전혀 새로운 면을 부각시키며 다양한 이미지를 선사했다. 대상이 꽃이든 사람이든 사진에서 포착되는 묘한 에로티시즘이 로버트 메이플소프라는 인장처럼 느껴진다.

메이플소프가 촬영한 브룩 쉴즈(왼쪽), 앤디 워홀
메이플소프가 촬영한 이기 팝.
메이플소프가 촬영한 미술품 수집가 홀리 솔로몬

다큐멘터리로서 결코 무시해선 안 되는 사료적인 측면에서도 <메이플쏘프> 합격점이다. 로버트의 실제 인터뷰 녹취, 그가 직접 사진 촬영을 시작하기 전의 콜라주 작업, 사적인 자리에서의 모습까지 미술관에서 접할 수 없는 이 다큐멘터리만의 자료들은 로버트 메이플소프라는 인물의 연대기를 천천히 훑어가는 과정에서 그의 작품들과 만나 더욱 입체적으로 그의 작품관을 읽을 수 있는 기반이 된다.


사망한 작가의 전기를 재구성한 작품이 빠질 수 있는 함정은 많다. 대상에게 예의를 지키느라 너무 무난하거나과욕을 부려 너무 무례해지거나. 적어도 <메이플쏘프> 그 함정들을 피해 갔다. 예술계에 족적을 남긴 이 관종(그의 작품처럼) 천사로도, 악마로도 읽힐 수 있게 설계했다. 재밌게도 조만간 맷 스미스가 주연을 맡은 전기영화 <메이플소프>도 공개될 것이다. 이 영화는 그를 또 어떻게 그릴 것인가. 이 일련의 풍경을 보며, 로버트 메이플소프가 얼마나 기뻐하고 있을지 상상하는 건 그리 어렵지 않을 것이다.

메이플쏘프

감독 랜디 바바토, 펜튼 베일리

출연 로버트 메이플쏘프

개봉 2016 미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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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네플레이 성찬얼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