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오래된 공화국이란 타이틀을 가진 대만(타이완)의 역사는 파란만장했다. 한국인의 눈에는 대만, 홍콩, 마카오와 중국의 관계가 단숨에 그려지진 않을 것이다. 간단히 설명하기 어려운 역사를 간단히 말해보자면 과거 영국의 식민지였던 홍콩이 중국에 반환됐고, 포르투갈의 식민지였던 마카오도 중국에 반환됐다. 본토로의 반환이 일어나는 시기  대만 국민들의 혼란스러운 정서는 그 시절을 그린 영화들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대만인의 정체성
(왼쪽부터) 중국, 대만의 국기

그러나 대만의 경우에는 사정이 조금 다르다. 대만에도 스페인, 네덜란드, 청나라, 일본 등 외세로부터 이어진 식민의 역사가 있었지만 대만이라는 국가의 탄생은 정치적 상황이 빚은 결과였다. 1949년 중국의 국공내전에서 공산당에게 패배한 국민당이 도주해 세운 독립정부가 바로 대만이 된 것이다. 중국은 여전히 하나의 중국그리고 패배한 이념이라는 논리에 의해 대만을 중국의 일부로 여기는 반면, 대만의 국민들은 독립 국가라는 주장을 펴고 있다. 1992년 양국은 하나의 중국이 되자는 합의에 이르기도 했지만 각자의 입장에서 내용을 해석해 여전히 불안정한 상황이 지속되고 있다.

대만으로 가는 배에 탑승 중인 국민당 군대.

이 같은 역사의 바탕 위에 지어진 나라 대만은 정체성의 문제를 고질적으로 안고 있다. 그리고 대만의 영화들은 이런 문제를 필연적으로 품을 수 밖에 없는 것이다. 말하자면 "나는 중국인인가 대만인인가. 혹은 본성인인가 외성인인가?"의 문제 말이다.(본성인은 17세기 이후로 대만으로 이주, 외성인은 정치적 내란을 이유로 이주한 사람들이다.)


대만의 뉴 웨이브

영화 발전의 역사에는 새로운 물결(New Wave)이 존재했다. 프랑스의 누벨바그’, 이탈리아의 네오 리얼리즘’, 덴마크의 도그마 95’, 미국의 뉴 아메리칸 시네마처럼 대만 영화계에서도 하나의 물결이 일었다. 뉴 웨이브의 바람이 불기 전까지 대만영화는 주로 할리우드 영화나 홍콩 오락영화 일색이었다. 천편일률적인 줄거리와 조악한 기술력으로 만들어진 당대의 대만영화는 관객들에게 외면받기 쉬웠다. 1980년대 초에 이르러 젊은 영화감독들이 기존 주류영화에서 볼 수 없었던 스타일의 영화를 내놓는다. 뉴 웨이브의 태동이다.

에드워드 양 감독

에드워드 양(양덕창), 타오더쳉, 커이쳉, 장이 네 명의 감독이 1982 <광음적고사>라는 옴니버스 영화를 발표한 때를 보통 대만 뉴웨이브의 탄생으로 일컫는다. 민중의 삶 가까이에 천착해 날 것 그대로의 사실적인 묘사가 특징적인 대만 뉴웨이브 영화들은 기존 영화를 답습하던 영화계에 충격을 안겼다. 이 사조에 힘입어 예술영화의 부흥을 이끈 감독은 에드워드 양, 허우 샤오시엔 두 명의 감독이 대표적이다. 이들은 민중의 생명력, 대만 역사와 개인의 관계성, 도시와 경제에 대한 분석을 담담한 카메라로 서술하며 대만 영화사에 큰 획을 그었다.

허우 샤오시엔 감독

한편, 1990년대에 이르러서는 뉴 웨이브의 사조가 점차 힘을 잃어가고 개인에 집중한 이야기를 독특하게 펼쳐놓은 신진 감독들의 영화가 활력을 띤다. 이와 같은 흐름을 뉴 웨이브의 소멸이 아닌 뉴 웨이브 2기에 접어들었다고 보는 관점도 있다. 현역으로 여전히 세계의 주목을 받고 있는 차이밍 량, 이안 감독이 뉴 웨이브 2기를 이끌고 있는 셈이다.

광음적고사

감독 에드워드 양

출연 실비아 창

개봉 1982 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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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드워드 양, 그리고 허우 샤오시엔
에드워드 양 <고령가 소년 살인사건>

최근 국내에서는 <고령가 소년 살인사건>(1991)의 성공적 개봉에 힘입어 에드워드 양의 작품들이 한국 관객들에게 꾸준히 소환되고 있다. 개봉을 앞둔 <하나 그리고 둘>(2000) 2007년 타계한 에드워드 양이 남긴 마지막 영화이자 걸작이다. 이 영화로 “21세기에 나온 최고의 영화라는 찬사와 함께 칸영화제에서 감독상을 거머쥐었다. 60세의 이른 나이에 생을 마감한 그인지라 남긴 영화도 7편 밖에 되지 않는다. <타이페이 스토리>(1985) <공포분자>(1986), <독립시대>(1994) 역시 에드워드 양의 필견 작품들이다.

에드워드 양 <하나 그리고 둘>

<자객 섭은낭>으로 2015년 칸영화제 감독상을 받을 만큼 여전한 위세를 보여주는 거장 허우 샤오시엔도 있다. <펑꾸이에서 온 소년>(1983)을 시작으로 <동동의 여름방학>(1984), <동년왕사>(1985), <연연풍진>(1986)에 이르는 성장 4부작 <비정성시>(1989), <희몽인생>(1993), <호남호녀>(1995)에 이르는 대만 현대사 3부작모두 그의 작품이다. 그 외에도 <남국재견>(1996), <밀레니엄 맘보>(2001) 등의 작품을 통해 텅 빈 청춘들의 쓸쓸한 기록을 남겼다.

허우 샤오시엔 <비정성시>
고령가 소년 살인사건

감독 에드워드 양

출연 장첸, 양정이

개봉 1991 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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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 그리고 둘

감독 에드워드 양

출연 오념진, 금연령, 이세이 오가타, 조나단 창, 켈리 리, 진희성

개봉 2000 대만, 일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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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정성시

감독 허우 샤오시엔

출연 양조위, 진송용

개봉 1989 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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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안, 그리고 차이밍 량
이안 <브로크백 마운틴>

대만 출신의 이안 감독은 세계 영화계에서 가장 유명한 아시아계 감독으로 불린다. 대만에서 몇 편의 초기작을 찍은 뒤 할리우드로 건너간 그는 <센스 앤 센서빌리티>(1995)로 호평 받으며 단번에 이름을 떨친다. 그 외에도 할리우드 히어로 무비 <헐크>(2003), 퀴어 영화의 정석적인 작품 <브로크백 마운틴>(2005), 사랑과 에로티시즘을 결합한 시대극 <, >(2007), 우드스탁 락 페스티벌의 젊음과 향락을 그린 <테이킹 우드스탁>(2009), 유명 소설 <파이 이야기>를 재해석한 <라이프 오브 파이>(2012) 등 다채로운 작품들로 관객과 평단 모두의 환호를 받았다.

이안 <라이프 오브 파이>

이안 감독이 대중성과 작품성을 고루 갖춘 감독이라면 차이밍 량은 예술성이 두드러지는 작가주의 영화를 만들어 왔다. <애정만세> 94년 베니스영화제에서 황금사자상을 받으며 주목을 받기 시작한 그는 배우 이강생과 대부분의 작품에서 페르소나로 협업하고 있다.

차이밍 량 <흔들리는 구름>

엇갈리는 두 남자와 한 여자를 통해 현대사회의 우울을 그린 <애정만세>를 비롯해 그의 가장 우울한 비전을 보여준 <하류>(1997), 사랑을 갈구하는 남녀 이야기의 판타지적 승화가 돋보인 <구멍>(1998), 오래된 소극장이 문을 닫기 전날의 이야기 <안녕, 용문객잔>(2003), 갈증과 소외의 이미지를 엮은 실험적 뮤지컬 <흔들리는 구름>(2005), 도시의 변두리에서 인간 광고판으로 일하는 아버지와 아이들의 이야기 <떠돌이 개>(2013) 등이 주요 작품으로 손꼽히고 있다. 도시의 젊은 남녀들을 비추며 소외와 갈망에 대한 이미지를 독특하게 구축해 온 차이밍 량은 여전히 진행형인 대만 영화계의 보물 같은 감독 중 하나다.

브로크백 마운틴

감독 이안

출연 제이크 질렌할, 히스 레저

개봉 2005 미국, 캐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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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프 오브 파이

감독 이안

출연 수라즈 샤르마, 이르판 칸

개봉 2012 미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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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들리는 구름

감독 차이밍량

출연 이강생

개봉 2005 대만, 프랑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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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만 발 청춘 로맨스의 국내 흥행사
구파도 <그 시절, 우리가 좋아했던 소녀>

사실 국내 관객들에게 대만의 영화는 생소하기 그지없었다. 그러나 최근 극장 풍경을 보면 대만발 청춘 로맨스물의 인기가 눈에 띈다. 구파도 감독의 <그 시절, 우리가 좋아했던 소녀>(2011), 프랭키 첸의 <나의 소녀시대>(2015), 오자운의 <카페 6>(2016), 사준의의 <안녕, 나의 소녀>(2017)까지 줄개봉을 했다. 주걸륜이 감독, 주연을 겸한 2007년 작 <말할 수 없는 비밀>2015년에 재개봉을 하기도 했다.

주걸륜 <말할 수 없는 비밀>

대만의 로맨스 영화가 특히 국내에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2000년대 초였다. 레스티 첸의 <영원한 여름>(2006), 주걸륜의 <말할 수 없는 비밀>(2007), 청펀펀의 <청설>(2009) 등 생각보다 많은 한국 관객들이 이 영화들로 대만을 기억하고 있었다. 본격적으로 현재 대만 청춘 로맨스의 인기 현상이 도드라진 건 구파도 감독의 <그 시절, 우리가 좋아했던 소녀>가 입소문을 타고 관객몰이를 하면서부터다.

프랭키 첸 <나의 소녀시대>

범죄, 누아르 장르가 유독 강세인 한국의 영화판에선 로맨스 영화가 드물게 나오기는 했지만 흥행 성적은 그다지 좋지 못했다. 풋풋한 감성이 매력적인 대만의 청춘 로맨스 무비가 오히려 대안적 역할을 하기 시작한 것이다. 한국의 로맨스와는 또 다른 무드를 보여주는 대만발 로맨스에 관객들은 매료됐다. <그 시절, 우리가 좋아했던 소녀>의 주인공 가진동, <나의 소녀시대>의 주인공 왕대륙이 한국에서 큰 인기를 얻기도 했다.

그 시절, 우리가 좋아했던 소녀

감독 구파도

출연 가진동, 천옌시

개봉 2011 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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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할 수 없는 비밀

감독 주걸륜

출연 주걸륜, 계륜미, 황추생, 증개현

개봉 2007 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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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소녀시대

감독 프랭키 첸

출연 송운화, 왕대륙, 이옥새, 간정예

개봉 2015 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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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만 로맨스 흥행은 계속될까
(왼쪽부터) <그 시절, 우리가 좋아했던 소녀>, <나의 소녀시대>, <안녕, 나의 소녀> 포스터

하지만 이러한 흥행이 대만영화 하면 청춘 로맨스라는 공식으로 굳어지면서, 엇비슷한 성격의 영화들만이 일제히 극장에 유입됐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다. ‘소녀라는 단어가 주는 풋풋함과 첫사랑의 이미지를 다른 대만영화의 제목에 계속해서 가져가는 현상도 드러났다. ‘소녀가 들어간 영화 제목만 봐도 대만영화라는 예측으로 기울 정도가 됐으니까 말이다. 이대로라면 대만영화의 국내 흥행은 갈수록 힘을 잃어갈 가능성이 높다. 영화를 보기도 전에 어떤 영화일지 눈앞에 그려진다는 건 치명적인 약점일 수 있다.

양야체 <대담하거나, 타락하거나, 아름다운>

그렇다면 다른 장르로 눈을 돌려보는 건 어떨까. 생경한 대만의 영화들은 주로 영화제를 통해 한국 관객들에게 첫 선을 보이며 좋은 평가를 받았던 작품들이 입소문을 탔다. 실제로 국내의 여러 영화제들은 아시아의 영화와 감독을 발굴하는 데 심혈을 기울이고 있는데, 지난 해 제22회 부산국제영화제를 통해 소개돼 좋은 평가를 들었던 두 편의 영화도 눈여겨볼만하다. <여친남친>(2012)으로 알려진 양야체 감독의 <대담하거나, 타락하거나, 아름다운>, 그리고 신 야오 후앙(청몽홍) 감독의 <대불+>. 두 영화는 비교적 알려지지 않은 신진 대만감독의 작품이지만 뛰어난 현실 포착과 명민한 시선으로 관객들을 감동시켰다. 앞서 소개한 대만의 거장 감독들의 뒤를 이을 차세대 주자들은 계속해서 나오고 있다.

대담하거나, 타락하거나, 아름다운

감독 양야체

출연 혜영홍, 커-시 우

개봉 2017 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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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불+

감독 신 야오 후앙

출연 대립인, 장소회

개봉 2017 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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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네플레이 인턴 기자 심미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