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 제한적 기능을 수행하다
학수의 아버지는 잘 사는 게 복수라고 말한다. 지금껏 한국영화에서 아들이 아버지의 얼굴에 이렇듯 노골적으로 주먹을 날리는 영화가 또 있었던가 싶기도 하다. 이준익 감독은 영화 속 몇몇 설정을 통해 청년세대에게 자신들을 88만원세대, 삼포세대, 헬조선으로 몰아넣은 기성세대에게 분노의 주먹을 날리라고 이야기하는 것처럼 보인다. <변산>이 현재를 배경으로 하는 영화인데도 불구하고, 서울에서 변산으로의 공간 이동은 마치 타임슬립 영화처럼 시간을 과거로 되돌리는 듯한 느낌을 준다. 과거의 어느 시간에 던져진 듯한 ‘변산’의 학수 앞에 놓인 삶의 문제들은 오로지 과거와 관련된 것들이다. <변산>은 (아버지로 대변되는) 학수의 모든 문제는 현재가 아닌 과거에 있다는, 그렇기에 현재를 바꾸기 위해서는 과거의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백 투 더 퓨처>의 가르침을 반복한다.
하지만 <변산>에서 중요한 인물 관계는 학수와 아버지보다 학수와 선미(김고은)의 관계다. 학수가 변산으로 내려오는 계기였던 선미는 이상하리만치 과거 그대로의 이미지를 간직하고 있다. 선미는 고향을 외면하고 지내왔던 학수가 잊어버린, 또는 잃어버린 삶의 가치를 고스란히 간직한 채 그곳(또는 그 시간)에 머물러 있다. 선미는 현재의 시간에 놓인 여성이라기보다 학수가 과거로 타임슬립할 때 만날 수 있는 여성에 가깝다. 그러니까 그녀의 순수성은 현재의 시간성을 삭제한 대가다. 그렇다면 선미는 왜, 그리고 무엇을 위해 변하지 않고 남아 있는 ‘과거 그 자체’로서 그곳에 남아 있어야 하는 것일까? 선미는 자기 자신을 위해 존재하는 인물이 아니다. 그녀는 오로지 어두운 기억 속에 가장 빛나는 순간을 학수가 자각하도록 하기 위해 과거 그 자체로 남아 있어야 하는 존재다. 선미는 ‘결핍이 결여’된 충만한 존재처럼 보이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존재의 충만함으로 인해 서사적으로 ‘제한적 기능’만을 수행할 수 있을 뿐이다.
리타 펠스키는 서사적 전통 속에서 남성이 직선적 시간의 궤도 속에서 앞으로 나아가는 반면에, 여성은 늘 같은 시간에 붙박이로 머무는 존재로 곧잘 묘사되어왔음을 지적한다. 철없고 타락한 남성에 비해 순수하고 성숙한 여성이라는 구도. 그 결과, 시간의 속도에 지친 질식 직전의 남성은 시간을 되돌려 숨을 크게 쉴 수 있는 향수의 대상으로 여성을 갖게 된다. 실제로 <변산>의 영화적 계보는 청춘영화가 아니라 2000년대 초·중반 한국영화의 주된 흐름이었던 일련의 향수영화의 계열과 맞닿아 있다. <박하사탕>(1999), <파이란>(2001) 등은 타락한 남성과 순수한 여성, 그리고 직선적 시간을 사는 남성과 제자리에 머물며 타락 이전의 가치를 온전히 간직한 여성이라는 이분법적 구도를 반복했다. 변산이라는 타임슬립된 시공간에 도착한 청년들 역시 바로 이 도식에 갇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