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부한 얘기지만, 아리스토텔레스는 <시학>을 통해 안타고니스트의 중요성을 침이 마르도록 강조했다. 안타고니스트가 비논리적이거나 당위성 없이 주인공을 괴롭히면 드라마는 설득력을 잃는다는 내용이다. <부산행>, <인천상륙작전>, <덕혜옹주>가 여름 시장에서 많은 관객을 불러 모을 수 있는 것도 매력적인 안타고니스트, 그러니까 악당 캐릭터가 활약했던 덕분이다. 물론 태어날 때부터 악인은 없다. 그들 나름의 사정이 있기 때문에 주인공을 못살게 구는 거다. 참, 여름 영화 4편 중 한편인 <터널>은 흥미롭게도 안타고니스트가 없다. 김해숙이 연기하는 여성 정치인도, 사람 살리는 것보다 기록 세우는데 관심이 더 있는 기자도, 돈 때문에 터널 공사를 재개해야 한다는 신도시 입주자도 엄밀히 따지면 악인은 아니다. 그저 허술한 대한민국 시스템의 일부분일 뿐이다. 안타고니스트가 없는데도 <터널>은 긴장감을 차곡차곡 쌓아올릴 줄 안다. 그건 김성훈 감독의 연출과 믿고 보는 하정우의 연기 덕분이다. 어쨌거나 <부산행>의 용석(김의성), <인천상륙작전>의 림계진(이범수), <덕혜옹주>의 한택수(윤제문) 등 세 악인의 전사(全史)를 취재해 가상 인터뷰로 재구성했다. 특히, <부산행>의 용석은 연상호 감독으로부터 들은 긴 얘기를 재구성한 것이니 참고하시길. 너무 진지하게 읽진 마시라.


<부산행>
연용석
1965년 부산 출생
혈액형은 비밀(참고로 연상호 감독은 B형)
<부산행>의 연용석

-왜 그랬어요? 다 태울 수 있었잖아요. 문이 안 열렸으면 저는 지금쯤 좀비가 됐을지도 몰라요.
=여기 있는 사람들은 살아야 될 거 아니야.
-그렇다고 문을 안 열어줘요?
=이거 봐라. 이 XX 감염됐어. 뭐? 감염 안 됐다고? 감염 안 된 거 확실하냐고. 빼애 애에 액.
-초면에 반말하시는 걸 보니 밉상이네요. 아까 수안이한테 "공부 안 하면 노숙자 된다"고 말씀하신 것도 들었어요.  
=다 잘 되라고 한 얘기야. 어릴 때 엄마한테서 '공부 열심히 안 하면 사람대접 못 받는다'는 얘기를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으며 자랐어.
-집안의 기둥이셨군요.
=위로 누나만 무려 세 명이었어. 1남 3녀 중 막내인 나는 어릴 때부터 집안을 일으킬 재목이라는 기대를 한 몸에 받고 자랐지.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
=순진한 소리. 제대로 된 교육조차 받을 기회가 없었던 우리 엄마의 자조 섞인 말이 항상 가슴에 맴돌아서 원래 꿈도 포기하고 책만 팠어. 덕분에 서울 시내의 명문대에 입학할 수 있게 됐어. 어른이 하신 말씀 중에서 틀린 얘기는 하나도 없더라고. 
-원래 꿈은 뭐였는데요.
=영화감독. KTX 꼬리칸에서 머리칸으로 혁명을 일으키는 이야기가 막 떠올랐어. 
-그건 <설국열차> 같은데... 지금은 무슨 일을 하시나요.
=에헴, 이래 봬도 천리마 고속버스 상무야.
-어깨에 힘이 들어가는 걸 보니 영화감독보다 만족하시나 봐요.
=실은 대기업에 취직하거나 좀더 그럴듯한 출세를 하고 싶었어. 남자는 꿈이 커야지. 아무렴 남잔데. 그런데 뭐가 부족했는지 취직한 곳이 지금의 중소기업이야.
-중소기업이 어때서요. 중소기업이야말로 대한민국 경제의 풀뿌리인데요.
=고향에서는 인물이 나왔다고 참 좋아했어. 그런데 내 귀에는 그 모든 칭찬이 제대로 성공하지 못한 나를 탓하는 소리로 들리더라고.
-진심으로 한 축하 인사였을 거예요. 그런데 부산에는 어쩐 일로 내려가세요.
=누나들한테서 어머니가 위독하시다는 연락을 받았어. (흐느끼면서) 우리 집 주소가 부산... 수영구...
-태어날 때부터 심성이 아주 나쁜 사람은 아닌 것 같네요. 울지 마세요.  
=... 실은 나 상무 아니고 부장이야. 몇 달 뒤에 상무 승진하는데 기분이 너무 좋아 벌써부터 상무라고 소개하며 다니고 있어. 흑흑흑.


<인천상륙작전>
림계진
1909년 7월 27일 함경남도 함흥 출생
혈액형은 B형
<인천상륙작전>의 림계진

-연합군이 어디로 올 것 같아요? 원산? 군산? 아니면 해주?
=(눈을 부라리며) 왜 인천을 뺍네까. '러시아의 붉은 여우'라 불렸던 내가 연합군의 속내를 모를 것 같소?
-인천은 조수 간만의 차가 커서 아무래도 상륙하기가... 기뢰도 많이 설치돼 있고.
=암도진찬(暗渡陳倉)이라는 말도 있지 않소. 나의 의중을 숨기고 적을 속여 우회하라. 러시아에서 배운 군사학에 나와있음네.
-사령관님, 그건 손자병법 8계 중 하나인데요.
=동무 자꾸 말대답하면 혁명의 이름으로 처단하겄어. 내가 모스크바 공산대학 군사학 으이! 수석 졸업하고 으이! 지략 하나로 낙동강 전선까지 탱크 운전해서 으이! 마 다했어. 김일성 장군님하고 밥도 먹었어. 으이! 연합군이 인천 상륙을 노리고 있다는 걸 으이! 마 모를 줄 알아?
-고향이 함경남도 함흥이라고 들었는데 방금 하신 말씀은 경상도 사투리 아닌가요.
=(순간 허리춤에 차고 있던 권총을 꺼내 장전한 뒤 총구를 겨눈다)
-아, 죄, 죄송합니다. 연합군이 인천으로 상륙하는 게 사실이라면 기뢰를 점검해야 되는 거 아닌가요. 기뢰가 위치한 곳을 알 수 있는 지도를 한번 보여주시겠어요. 요즘은 이렇게 스마트폰에서 포켓몬도 잡을 수 있고...
=(담뱃잎을 말면서) 어찌 기뢰에 고렇게 집착함메?
-어디에 묻혀 있는지 궁금하니깐요. 포켓몬 때문은 아니에요.  
=(보드카를 한 잔 들이키며) 이 동무, 참 안 되겠구먼. 이번 기회에 당성을 증명하시오. 당신은 신이 있다고 생각하네? 신이 있어? 어딨어? 이념은 피보다 진하다지 않소. Красный Достоевский. В одну сторону? Или в оба конца?
-(잠시 정적) Туда и обратно. 그런데 사령관님이 혁명 기간 중에 보드카를 마시는 건 근무태만입니다. 평양에 고자질할 거예요. 켈로부대가 쳐들어오기라도 하면...
=(보드카를 또 한 잔 들이킨 뒤 눈을 부라리며) 켈로부대든, 맥아더든 날래, 날래 오라우. 혁명의 이름으로 처단하겄어.


<덕혜옹주>
한택수
생년월일과 출생지 미상
혈액형 미상
<덕혜옹주>의 한택수

-대체 덕혜옹주가 조국 땅으로 돌아가지 못한 이유가 뭡니까? 
=이미 조선과 일본은 한 몸이야. 이곳(일본) 또한 조국이나 마찬가지니 고향이라고 생각하며 살면 되잖아.
-한때 군인이 꿈이었다는 사람 입에서 나올 수 있는 소리입니까. 얼마나 챙겨 먹은 게 많으면... 비대해진 당신의 몸에 맞는 군복은 없을 거예요.
=일본 군복 입는 거 한번 보여줘? 핏이 달라. 핏이.
-옹주 마마는 황녀이고 옹주이기 전에 병든 어미의 딸입니다. 어머니를 뵙고 싶어도 그러질 못하는 그녀의 고통을 당신이 알기나 합니까?
=허허, 이 사람 정말 말귀를 못 알아듣는구먼. 일본에서 공부를 하고, 가문 좋은 일본 청년과 결혼해 새로운 가정을 꾸려 호의호식하면 됐지, 뭐가 그리 불만이 많아.
-덕혜옹주를 이용해 입지를 다지고, 한몫 챙기려는 당신의 속셈을 모를 줄 아나 보죠. 당신이 권세를 이용한 치부에 능해 조선 귀족 중에서 가장 부유하게 살고 있다는 사실을 세상이 알고 있습니다.
=위험한 소리. 덕혜옹주가 일본에 온 건 천황의 요청이자 뜻이야. 
-덕혜옹주를 강제로 징용 당해 일본에 온 조선인 노동자 앞에서 연설 시킨 것도 사람들을 일제에 충성시키기 위한 목적이었잖아요.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올까요?
=한 번만 더 이상한 소리를 지껄였다간 덕혜옹주는 앞으로 다시는 조선 땅을 못 밟을 줄 알아. 우이씨.
-너무 흥분하지 마시고 술이나 한잔 하시지요.
=술? 그래. 나 이제 차도 팔고 없고(아흑~), 까까오택시 불러서 집에 가면 되지.
-에잇! 폭탄주나 먹어라! 대한독립 만세~! 

씨네플레이 에디터 펩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