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각적 불화의 포화상태에 다다른 영화가 되돌아올 수 있는 유일한 장소는 다중의 거울 앞에 분열된 몸을 의탁할 수 있는 호텔 방일 것이다. 유미는 무라키에게 내일도 만나줄 것을 요청한다. 그러나 결코 그들은 미래의 시간을 이야기할 수 없다. 그 순간, 시점의 굴절이 유미의 신체에 기입된다. 유미는 갑자기 감기약 기운이 돌아 몽롱하다고 말한다. 그런데 유미가 감기약을 먹은 것은 전날 밤의 일이다. 시차를 두고 작용한 약의 기능으로 인해 유미는 움직임을 멈추고 섹스를 중단한다. 잠깐이지만 흡사 시체가 돼버린 듯 모든 인간적인 활동을 멈춘다. 달리 말할 수 없는, 사랑과 시간의 중단에 대한 신체의 즉물적인 반응이다.
소마이만큼 움직임을 멈춘 인간의 몸이라는 제재에 몰두한 연출자도 없을 것이다. <세일러복과 기관총>(1981)에서 본의 아니게 야쿠자들의 세계에 들어와버린 고등학생 이즈미는 총격전으로 살해당한 수많은 시체를 바라보며 “왜 이렇게 많은 사람이 죽어야 할까…”라고 중얼거리는데, 이는 연출자가 스스로에게 제기하는 자문처럼 들린다. 필모그래피를 통틀어 소마이는 끊임없이 시체를 관찰한다. 각도를 바꾸고 크기를 달리하면서 시신을 렌즈에 담아내기를 몇번이고 반복한다. <물고기 떼>(1983)에서는 단순히 시체를 보여주는 것에 그치지 않고 살아 숨 쉬던 인간의 몸이 천천히 호흡을 멈추고 죽음에 이르는 과정을 거리낌 없이 드러낸다. 시체를 묘사하는 게 여의치 않다면 프리즈 프레임을 동원하면서 어떻게든 몸의 움직임을 멈춰버리는 것으로 영화를 끝낸다(<숀벤 라이더>, <빛나는 여자>(1987), <도쿄 하늘 반갑습니다>). 그는 생동하는 육체에 매혹된 만큼이나 움직임을 멈춘 시체에 중독되어 있다.
부동 상태를 연기하는 유미의 몸은 그런 의미에서 몹시 특권적인 장소로 형상화된다. 그것은 신체와 시체, 운동과 경직, 생명과 죽음의 경계에 자리 잡은 픽션의 양면에 이중적으로 접속하는 매개로서의 몸이다. 유미는 그녀의 삶을 포획하던 다면 거울 앞에서 움직임을 멈추는 행위로 저항한다. 정지한 피사체의 침묵은 육체의 움직임이란 필름의 표면 위에서 잠시 동안 연속적으로 결합하는 허구적 질서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폭로한다. 이는 섹스를 치르던 무라키가 고개를 들고 네면의 거울을 바라보는 순간에 문득 깨닫는 것이다. 충만함으로 가득한 그들의 섹스는 스크린의 한 조각을 이루는 잠정적인 부분에 불과할 뿐이다. 남자는 떠나고, 여자는 또다시 도시를 배회할 것이다. 그걸 확인하는 순간 섹스는 끝나고 두사람이 추동한 재회의 시간도 끝난다. 거울 앞에 머무른 뒤 순간적으로 사라지는, 스크린 위를 떠도는 일종의 유령처럼 그들은 자신들의 운명을 직시한다.
그러고 나면 잊을 수 없는 결말의 무대가 우리를 기다린다. 유미는 기대감을 안고 무라키의 집을 찾아가지만, 그곳엔 아무도 없다. 왔던 길로 발걸음을 되돌리면 무라키의 아내가 계단을 내려가는 것이 보인다. 두 여자는 불현듯 서로를 돌아보고 다시 각자의 걸음을 지속한다. 터무니없을 만큼 과도한 벚꽃이 쏟아져 내리고 카메라의 시야 바깥에서 들려오던 아이들의 소란과 환호성이 화면 가득 채워진다. 이 순간에 유미는 프레임으로부터 추방당하고 없다. 이것은 필연적인 집행에 다름 아니다. 아이들이 화면에 포착되면 유미는 퇴장할 수 밖에 없다. 겨울이 끝나고 봄이 도래했다는 시간의 흐름이 감지되면 영화는 끝날 수밖에 없다. 이들은 끝내 세계의 균일한 질서와 화해할 수 없다. 이것이 <러브 호텔>이 도달한 영화적 역학의 실행이다.
벚꽃이 무수히 떨어진다. 봄이었던가? 시간의 이탈이라는 조건 속에서 재회한 무라키와 유미의 관계가 불능으로 치닫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겨울에서 봄으로의 계절의 변화가 다급하게 실현되고 있다. 돌출적 시간이 끝나고 정상의 속도로 복귀하는 엄중한 시간의 흐름 위에 무라키와 유미를 위한 장소는 없을 것이다. 이 결말에서는 단지 언제나 우리를 무심하게 앞서가는 세계의 속도가, 우리의 좌절에 조금도 신경 쓰지 않는 세계의 아름다움이 아이들의 환희와 함께 무람없이 과시되고 있다. 카메라는 계단을 올라가는 유미와 내려오는 무라키의 아내의 짧은 마주침을 비춘다. 거울에 비친 자신의 벌거벗은 몸을 목격하던 두 인물은 아마도 유사한 궤적과 동선으로 이 자리에서 마주쳤을 것이다. 영화는 마지막 무대를 장식하는 모든 질료들이 화면에서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숏을 지속한다. 여인들은 프레임의 바깥으로 걸음을 재촉하고, 아이들마저 이내 사라지고 없다. 벚꽃은 곧 그칠 것이다. 봄이 도착한 시기에 소마이의 영화를 이루던 움직임의 소멸이 우리의 눈앞에 스쳐 지나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