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러 장르에서의 여성의 ‘전통적’ 역할
웨스 크레이븐의 <왼편 마지막 집>(1972), 토브 후퍼의 <텍사스 전기톱 학살>(1974)을 거쳐 1978년 탄생한 존 카펜터의 <할로윈>은 장르 공식을 정리한 걸작이었다. 술과 섹스를 즐기는 10대, 복면을 쓴 살인마, 그리고 최후에 살아남는 여성 등 슬래셔 장르의 주요 클리셰가 대중에게 각인됐다. 이후 <13일의 금요일>(1980), <나이트메어>(1984), <헬레이저>(1987) 등이 80년대 슬래셔 무비의 전성기를 이끌었지만, 고민 없이 양산된 후속작의 형편없는 완성도는 한동안 이 장르를 소수 마니아의 전유물로 전락시켰다. 한편 학계에서는 슬래셔 무비의 미소지니가 정량적으로 분석되면서 페미니스트들의 비판이 지속적으로 제기됐다. 가령 여성이 살인마에게 시달리는 장면은 남성의 그것보다 더 길게 묘사되는 경향이 있고, 남성적 시선으로 여성을 ‘눈요기’ 취급하는 컷이 맥락없이 등장한다는 것이다. 특히 <할로윈>의 마지막 생존자 로리로 대표되는 ‘파이널 걸’(final girl) 캐릭터와 섹스 여부의 유관성은 캐럴 J. 클로버의 <남성, 여성, 그리고 전기톱: 현대 호러영화 속 젠더>(Men, Women, and Chainsaws: Gender in the Modern Horror Film, 1992) 등을 비롯한 연구에서 꾸준히 지적됐다. 그 밖에 무기를 가진 남자 캐릭터의 등장으로 비로소 여자주인공이 마지막 안전을 보장받는 경향도 관찰됐다. 제이미 리 커티스를 ‘스크림 퀸’(scream queen)으로 등극시킨 원작 <할로윈>은 마이클 마이어스의 누나 주디 마이어스가 애인과 성관계를 맺은 직후 나체로 살해당하며 문을 연다. 술과 섹스를 즐긴 로리의 친구들은 죽음을 맞이했고, 베이비시터로서 아이를 돌보는 본분에 충실한 로리만이 생존자의 자격을 부여받았다. 그는 총을 가진 닥터 루미스(도널드 플레젠스)의 등장으로 마지막 위기에서 벗어난다.(<할로윈>을 향한 페미니스트 비평가들의 쓴소리는 최근 존 카펜터가 <뉴욕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다시 언급하기도 했다. “내 인생 최대 실수는 여성영화제에 상을 받으러 간 것이었다. 관객에게 야유를 받았다. 그럴 만했다.”)
소수 팬들만의 시장이 되어가던 슬래셔 무비의 인기를 재점화한 것은 공포영화에 관한 공포영화, 웨스 크레이븐의 <스크림>(1996)이다. 처녀성과 술·마약, 생존의 관계를 노골적으로 대사에 등장시킨 <스크림>(원작 <할로윈>의 제이미 리 커티스는 가슴을 노출하지 않아 살아남았다는 대사도 등장한다)은 장르의 여성 혐오적인 면을 위트 있게 비꼰 동시에 그 법칙을 보란 듯이 깼다. 주인공 시드니(니브 캠벨)는 나중에 살인마로 밝혀지는 남자친구 빌리(스킷 울리치)와 자신이 원해서 섹스를 했고, 주변 남자의 도움 없이 그를 처단한다. 하지만 <스크림>은 화장실에서 시드니와 그의 엄마의 문란함을 헐뜯는 또래 여성들을 등장시켜 ‘여성의 적은 여성’ 구도를 여전히 고집한다. 또한 “살인에 어떤 이유가 있을 리가 있냐”는 범인의 대사가 무색하게 <스크림> 시리즈는 내내 시드니 엄마의 외도를 대규모 살육의 원인으로 묘사한다. 신선하지만 아쉬움이 남는 <스크림> 이후 반짝인기를 누린 <나는 네가 지난 여름에 한 일을 알고 있다>(1997) 등의 하이틴 호러는 결국 과거 슬래셔 무비의 실수를 반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