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이 좋았다. 추운 날씨를 좋아하는 건 아니지만 겨울에만 만날 수 있는 눈 때문이었다. 하늘하늘 내려앉는 그 차가운 눈송이가 쌓일 때, 온 세상이 하얗게 변하고 땅을 밟는 감각이 달라지는 게 좋았다. 이번 주는 눈이 나오는 영화들을 준비했다. 수많은 감정들을 담아낸 눈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환희
블랙
Black, 2005

감독 산제이 릴라 반살리|출연 라니 무케르지, 아미타브 밧찬|124분|전체 관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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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랙>은 헬렌 켈러와 설리반 선생님의 이야기를 각색한 영화다. 유아기에 시각과 청각을 잃은 미셸(라니 무케르지)은 짐승처럼 자란다. 그를 맡으러 온 사하이 선생님(아미타브 밧찬)은 끝끝내 미셸을 포기하지 않고 언어(단어)와 의미(단어의 뜻)를 이해시킨다. 그에게 빛을 보여준다. <블랙>은 그 일화에서 한 발 더 나아간다. 미셸은, 사하이 선생님은 대학 졸업을 꿈꾼다. 두 사람은 함께 수업을 듣고 차근차근 세계에 발을 내딛는다. 그러던 어느 날, 사하이 선생님이 사라진다.

영화 속 한 장면, 미셸에게 책 내용을 수화로 옮기느라 손을 바삐 움직이는 사하이 선생님과 달리 미셸은 어딘가 들떠있다. 사하이 선생님은 “눈은 안 올거야”라며 퉁명스럽게 미셸을 타박하지만 이내 눈이 미셸의 손에, 얼굴에, 닿을 수 있는 구석구석에 내려앉는다. 미셸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덩실덩실 춤춘다. 황급히 우산을 편 사하이 선생님도 이내 미셸의 춤사위에 맞춰 몸을 흔든다. 볼 수도, 들을 수도 없는 미셸의 세계에서 촉감은 외부 세계가 존재한다는 증거다. 그를 깨우친 물도, 선생님과 즐겁게 춤추게 해준 눈도 그의 피부에 스며들어 혼자가 아님을 깨닫게 한다. <블랙>의 눈은 누군가와 함께 한다는 환희의 증거다.

블랙

감독 산제이 릴라 반살리

출연 라니 무케르지, 아미타브 밧찬

개봉 2009.08.27. / 2017.11.22. 재개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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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독
렛 미 인
Låt den rätte komma in, 2008

감독 토마스 알프레드슨|출연 카레, 헤레브란트, 리나 레안데르손|114분|15세 관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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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이 내린다. 정적이 감싼 순간, 속옷만 입은 사내아이의 모습이 반사된다. “돼지처럼 꽥꽥거려봐.” 오스칼(카레 헤레브란트)은 밤마다 자신을 괴롭히는 욘니 형제의 말을 되뇌며 분노를 삭힌다. 욘니 형제를 죽이고 싶다는 마음에 휩싸여 나무를 찌르던 날, 옆집에 이사온 이엘리(리나 레안데르손)를 만나게 된다. 한때 인간이었으나 지금은 흡혈귀인 존재를.

눈에서 시작해서 눈으로 끝난다. 당연하다. <렛 미 인>은 북유럽 스웨덴이 배경이니까. 그렇지만 <렛 미 인>의 눈은 그저 배경이 아니다. 영화의 오프닝과 엔딩 직전 마지막 컷을 눈에게 양보하며 차가운 시각적 감각부터 언젠가 사그라들 무언가, 반복되듯 쏟아져도 늘 다른 무언가 등 <렛 미 인>을 관통하는 정서를 눈으로 축약한다. 눈이 오는 장면과 영원을 장담할 수 없지만 약속하려는 오스칼과 이엘리의 관계는, 그래서 의미심장하다.

렛 미 인

감독 토마스 알프레드슨

출연 카레 헤레브란트, 리나 레안데르손, 카린 베그퀴스트

개봉 2008.11.13. / 2015.12.03. 재개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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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존
윈드 리버
Wind River, 2016

감독 테일러 쉐리던|출연 제레미 레너, 엘리자베스 올슨|111분 |15세 관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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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여성이 설원에서 시체로 발견된다. 퓨마를 잡으러 온 야생동물보호국의 코리(제레미 레너)는 시체를 발견하고, 신입 FBI 요원 제인(엘리자베스 올슨)에게 협조하기로 한다. 사방이 눈뿐이고, 갑자기 눈보라가 휘몰아치는 게 일상인 ‘윈드 리버’에서 두 사람은 범인을 찾아 나선다.

<윈드 리버>의 스토리는 간략하다. 사라진 여성, 발견된 시체,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수수께끼. 하지만 <윈드 리버>는 미스터리를 억지로 직조하지 않는다. 2인조 스릴러 영화 특유의 버디무비적 요소도 거의 없다. <윈드 리버>의 인물들은 성장하지 않는다. 알아갈 뿐이다. 우리가 해결하지 못하는 이 세상의 실체를.

‘윈드 리버’의 눈은 그걸 상징한다. 누구도 이 지역의 눈을 통제하거나 제어할 수 없다. 그것은 그저 벌어지는 일이며 인간은 대항할 수 없다. 그저 눈보라가 지나길 기도할 뿐이다. 코리는 말한다. “강해서 살아남는 거예요.” 그래서 <윈드 리버>엔 승리자의 희열이 없다. 간신히 살아남았다는 안도감과 씁쓸함만이 남는다. 우리는 그저 눈을 피해 몸을 숨기고, 살아남아야 할 뿐이다.

윈드 리버

감독 테일러 쉐리던

출연 엘리자베스 올슨, 제레미 레너

개봉 2017.09.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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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움
철도원
鐵道員: ぽっぽや, 1999

감독 후루하타 야스오|출연 다카쿠라 켄, 오타케 시노부, 히로스에 료코|112분 |전체 관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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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토 오토마츠(다카무라 켄)는 호로마이 역의 역장이다. 그는 기관사로 일을 시작해 역장까지 오른, 모범적이고 성실한 철도원의 삶을 살았다. 하지만 그의 평생을 함께 한 오로마이 역은 내년 폐쇄된다고 한다. 그의 친구 센(코바야시 넨지)은 자신의 새 직장으로 오라고 권유하지만, 사토는 차마 호로마이를 떠날 수 없다. 일찍 세상을 떠난 아내 시즈에(오타케 시노부)와 유키코의 기억이 남겨진 곳이기에.

눈이 하염없이 내리는 날도 사토는 철도원 업무를 위해 플랫폼에 서있는다. 동료들은 그의 모습을 보며 “언제 봐도 한 폭의 그림 같아요”라고 말하지만, 사토에게 눈은 그처럼 아름답지 못할 것이다. 어린 나이에 그의 곁을 떠난 딸의 이름은 유키코. 눈이 내리는 날 낳았다고 ‘눈의 아이’란 이름을 붙여줬다. 그런 딸을 독감으로 떠나보낸 아버지의 시선으로 눈을 본다면……. 사토가 어떤 마음일지 누구도 쉽게 생각할 수 없다. 

철도원

감독 후루하타 야스오

출연 다카쿠라 켄, 코바야시 넨지, 오타케 시노부, 히로스에 료코

개봉 2000.02.04. / 2015.02.04. 재개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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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
가위손
Edward Scissorhands, 1990

감독 팀 버튼|출연 조니 뎁, 위노나 라이더, 다이앤 위스트|100분 |15세 관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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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장품 외판원 펙(다이앤 위스트)은 화장품 팔아보겠다고 고성에 갔다가 에드워드(조니 뎁)를 만난다. 에드워드는 손이 가위다. 그를 만든 발명가가 손을 바꿔주지 못한 채 사망했기 때문. 펙은 에드워드의 외로움을 느끼고 마을로 데려온다. 이 괴상하지만 순박한 이방인 에드워드는 펙의 딸 킴(위노나 라이더)에게 사랑을 느낀다. 하지만 마을 사람들의 호기심에 에드워드는 점점 상처받게 된다.

<가위손>은 영화라서 슬픈 이야기다. 카메라가 포착한 전경은 무척 아름답지만, 그 안의 캐릭터들은 대개 이기적이다. 타인의 표정과 진심의 차이를 구별할 줄 모르는 에드워드는 사회에서 쫓겨나고 만다. (에드워드와 달리 순박하지 않은) 우리는 그에게 벌어질 일을 예감하면서도 그저 바라볼 수밖에 없다. <가위손>의 눈을 설명하고 싶지 않다. 설명하면, 영화를 보지 않은 관객들이 경험할 아름답고도 처연한 순간을 날리는 셈이니까. 다만, <가위손>을 보고 난 후 눈을 본다면, 그대의 마음에 작은 사랑이 피어 꽃내음을 풍기리라.

가위손

감독 팀 버튼

출연 조니 뎁, 위노나 라이더, 다이앤 위스트, 안소니 마이클 홀, 케시 베이커, 로버트 올리버리

개봉 1991.06.29. / 2014.05.22. 재개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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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네플레이 성찬얼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