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해에 수백 편의 영화가 개봉한다. 그러면 한 해에 얼마나 많은 포스터가 공개될까. 많은 시간이 흘러도 유독 기억에 남는 포스터가 있다. 포스터 카피가 특별한 경우엔 더 그렇다. 이번 포스트에선 인상적인 카피를 남긴 포스터와 보급형 포스터 카피를 소개한다.


네놈을 살려두긴 쌀이 아까워

<스트롱맨>

<스트롱맨> 비디오 표지

<스트롱맨>은 1992년 국내에 소개된 영화다. 저 포스터도 분명 오래전에 만들어졌을 것이다. 하지만 카피만큼은 인터넷이 보급화된 2000년대 초반에 퍼지면서 영원한 생명을 얻었다. 흔히 말하는 ‘밥을 축낸다’는 표현을 고급(?)스럽게 옮겼다. 척 노리스의 눈빛과 “극장 개봉작!”의 자신만만함까지 인상적이다.


무엇을 상상하든 그 이상을 보게 될 것이다!

<매트릭스 2-리로디드>

<매트릭스 2-리로디드>

20세기 말을 화려하게 장식한 <매트릭스>는 4년 후 <매트릭스 2-리로디드>로 돌아왔다. 우리나라에선 특히 포스터 카피로 주목받았다. “무엇을 상상하든 그 이상을 보게 될 것이다!”라는 카피는 수많은 패러디를 양산하기도. 반대로 개봉 당시 실망한 관객들에게 “그 이하를 보게 됐다”고 인용됐다. 릴리, 라나 워쇼스키 자매(당시 앤디, 래리 형제)가 <매트릭스> 시리즈 완결 이후 연출한 <스피드 레이서>도 유사한 카피를 사용했다. 결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처참했지만.

그 이상을 못 보여준 <스피드 레이서>


매트릭스는 잊어라!

<이퀼리브리엄>

<이퀼리브리엄>

2000년대 초반 SF 영화 포스터 카피는 <매트릭스> 타령이었다. “매트릭스 제작진의”, “매트릭스의 가상현실” 등등, <매트릭스>와 닮은 구석을 하나라도 자랑하는 듯했다. 그래서 거기에 반기를 들고 “매트릭스는 잊어라!”라고 적어 넣은 <이퀼리브리엄>은 더 돋보였다. 영화의 테마나, 주제나, 전개나 애초 <매트릭스>와 닮은 점이 없으니 거짓말도 아니었다. 액션 스타일 역시 <매트릭스>의 불릿 타임과 정반대인 빠른 템포의 건가타를 사용했고.


CG는 없다. 와이어는 가라. 스턴트는 거부한다

<옹박 - 무에타이의 후예>

<옹박 - 무에타이의 후예>

2004년 개봉한 <옹박 - 무에타이의 후예>는 리얼 액션을 표방하며 “CG는 없다. 와이어는 가라. 스턴트는 거부한다”라는 문구를 사용했다. 효과는 굉장했다. 영화의 장점을 인상적인 카피로 승화시킨 적절한 예시다. 이 영화의 성공으로 토니 자가 주연인, 혹은 태국 액션 영화는 ‘옹박’이란 타이틀이나 카피를 자주 쓴다.

토니 자의 다음 영화(원제 <똠양꿍>)도 비슷한 ‘3단 카피’를 사용했다.


무서운 장면 없이 무서운 영화!

<컨저링>

<컨저링>

<컨저링>은 <쏘우>로 데뷔한 제임스 완 감독을 호러 영화계의 왕좌에 앉힌 작품이다. 특히 한국에선

“무서운 장면 없이 무서운 영화!” 카피로 관객들에게 광역 어그로를 시전해 유독 인기를 끌었다. 물론 영화를 본 관객들의 “무서운 장면투성이”라는 후기대로 거짓말인 카피지만, 관객들의 궁금증을 자극하는 역대급 카피임은 틀림없다. 국내 개봉한 해외 공포 영화 흥행 기록을 경신하면서(226만 명) “무서운 장면 없이 무서운” 카피는 대대로 사용 중이다.

‘무서운 장면 없이 무서운’을 보면 와! 제임스 완! 하고 반가워하자 (<컨저링 2> 티저 포스터, <요로나의 저주>)


우리는 모두 누군가의 첫사랑이었다

<건축학개론>

<건축학개론>

이 카피는 거짓말일 가능성이 높으므로 다루지 않겠다.

…라며 넘어가고 싶은 흥행작 <건축학개론>의 포스터 카피. 두 남녀와 대학생 시절과 이후 재회한 모습을 그린 <건축학개론>는 현실적이면서도 설레는 ‘썸’을 그려 호평받았다. 첫사랑의 아련함과 젊은 날의 어리숙함을 모두 담아냈다. 그 아련함을 한껏 살린 “우리는 모두 누군가의 첫사랑이었다”는 관객들을 추억에 빠지도록 유도했다. 물론 일부 관객들은 “내가 이제훈(혹은 수지)면 그럴 수 있었겠지”라며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고.


신에게는 아직 12척의 배가 남아있습니다

<명량>

역대 흥행 순위 1위 <명량>은 “신에게는 아직 12척의 배가 남아있습니다”라는 대사를 포스터 카피로 사용했다. 330척의 왜군에도 결코 굴하지 않은 이순신 장군의 패기를 읽을 수 있다. 다른 영화 포스터에서 응용하기 힘든 카피지만, 특유의 비장함은 다양한 분야에서 패러디됐다. “신에게는 아직 패자부활전이 남았습니다” 같은.


이거 쓰면 포스터 카피

영화의 특징을 강조하면서 독창적인 포스터 카피들을 살펴봤다. 이번엔 포스터 카피에서 주로 사용되는, 범용성이 높은 카피들을 소개한다. 이 카피들을 알아두면 조합하는 것만으로도 재밌는 포스터를 만들 수 있을 것이다.


~이(가) 시작된다

얘는 심지어 두 번 시작했다(<해리포터와 마법사의 돌> 최초 포스터, 재개봉 포스터)

‘시작한다’는 베리에이션이 굉장히 많다. 단독 영화에서도, 시리즈에서도 사용되는데, 대체로 수동태인 ‘시작된다’로 쓴다. 마치 이런 사건들이 숙명처럼 다가오는 느낌을 주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

시리즈물의 경우 시작된다 외에도, 막이 오른다, 서막이 열린다 등을 쓴다. 이후 마지막 편은 대장정, 대서사시, 기나긴 여정이 끝난다는 식의 카피로 장식한다.

액션 영화도 (<테이큰>, <지구 최후의 날 둠스데이>)

오컬트도 (<사바하>)

스포츠 영화도 (<국가대표 2>)

천하의 디즈니도 (<정글북>, <스타워즈: 깨어난 포스>)

톨키니스트도 사용한 ‘시작된다’ (<반지의 제왕: 왕의 귀환> 포스터)

변형 기출 문제 1. 열린다, 오른다 (<황금나침반>, <헝거게임: 판엠의 불꽃>, <에반게리온: 서>)

변형 기출 문제 2. 시작에 불과했다 (<에이리언: 커버넌트>)


전 세계가 OO한

<툼 레이더>

‘시작된다’ 못지않게 자주 볼 수 있는 문장이다. 영화제에서 주목받았거나, 반대로 상업적으로 큰 성공을 거둔 경우 사용한다. ‘전 세계가 00한’에서 00에는 보통 주목, 열광이 자주 들어간다. 어디에 써도 크게 어색하지 않기 때문에 자주 사용되지만, 요즘처럼 깔끔한 디자인을 선호하는 분위기에선 점점 줄어들고 있다.

<미녀와 야수>

<맘마미아!>, <맘마미아! 2>

영화제에서 주목받은 영화들의 활용 예. (<타인의 삶>, <퍼스트 리폼드>)


폭발한다

<존 윅>

<언니>, <드라이브 앵그리>

액션 영화 한정 고인물 끝판왕. 이 폭발한다는 단어는 아마 마이클 베이의 영화 포스터에 주로 사용하다가 정착하지 않았을까. 액션 영화라면 보통 뭐든지 폭발 장면이 있다 보니 거짓말은 아니다. 굉장히 드물게 ‘폭발한다’는 카피를 사용한 로맨스 영화는 <라라랜드>다. <라라랜드>였다면 어떤 말을 넣어도 잘 됐겠지만.

<라라랜드>


뒤집힌다

<주먹왕 랄프 2: 인터넷 속으로>, <닥터 스트레인지>

‘뒤집힌다’도 표현법이 다양하다. 뒤집힌다, 뒤집어진다, 뒤집는, 뒤바뀐다 등등. 이런 유의 카피는 반전이 강렬한 스릴러나 새로운 시도가 돋보이는 블록버스터 포스터에 자주 쓴다.


~습니다

<댄서의 순정>

나왔다. 한국말의 특징, 존댓말! 영화 포스터 카피가 보통 단호한 어조로 호기심을 유발한다면, 존댓말을 사용한 멜로·드라마류 영화 포스터 카피는 아련한 감성을 자극한다. 순애보적인 사랑이나 가족 드라마가 이런 포스터 카피의 효과를 받을 수 있다.

수애 전용 포스터 카피로 보인다면 착각이다 (<가족>, <나의 결혼 원정기>, <님은 먼곳에>)


씨네플레이 성찬얼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