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나와 아이히만
아이히만의 재판 당시 피고측의 무죄 주장 근거는 “피고가 당시 존재하던 나치 법률 체계 하에서는 아무런 잘못도 하지 않았고, 그가 기소당한 내용은 범죄가 아니라 ‘국가적 공식 행위’이므로 여기에 대해서는 어떤 다른 나라도 재판권을 행사할 수 없”(한나 아렌트, <예루살렘의 아이히만>)다는 점이었다. 말하자면 아이히만은 당시 제3제국의 법체계 안에서는 합법적인 ‘업무’를 수행했다는 것이 변론의 요지다. 그렇다면 한나 슈미츠 역시 아이히만과 동궤의 인물일까? 왜냐하면 그녀도 유대인 여성들을 아우슈비츠로 보내고, 수백 명의 죽음(화재 사고)을 방조한 죄를 묻는 판사에게 이렇게 답하기 때문이다.
판사 : 피고가 돌려보낸 수감자들이 죽을 거라는 걸 알고 있었습니까?
한나 : 네, 하지만 새 수감자들이 계속 들어왔고 그들이 지낼 공간을 마련해 줘야 했어요.
판사 : 이해 못하셨나 본데
한나 : 다 같이 지내기엔 수용소가 너무 좁았어요.
판사 : (다소 당황하며) 내 말은…… 다시 묻죠, 수용소가 좁아서 사람들을 선별해 가스실로 보냈다는 겁니까?
한나 : 판사님이라면 어떻게 하셨겠어요? 감시원에 지원한 게 잘못인가요?
판사 : (당황해서 말문을 잃은 듯한 표정)
(다음 재판에서)
판사 : 왜 문을 열어주지 않았습니까?
한나 : 열 수 없었어요. 수감자들을 감시해야 했죠. 수감자들 감시가 우리 임무였어요.
답변들 속에서 한나는 수용소가 비좁았고 새 수감자들이 계속 들어왔으므로 그들 중 60명씩을 정기적으로 선발해 아우슈비츠로 보내는 것이 감시원의 ‘임무’였다고 말한다. 아이히만처럼 유대인들을 아우슈비츠로 보내는 일을 ‘일과’나 ‘업무’라 여겼던 셈이다. 그렇다면 그녀 역시 아이히만과 나란히 ‘악의 평범성’ 테제에 대한 증거로 인용될 만한 인물 아닌가! 그러나 아닌 듯하다. 한나와 아이히만은 다르다.
범법과 무법
단순히 범죄의 질이나 크기를 두고(아이히만은 수만 명을 죽게 했고, 한나는 그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적은 숫자인 수백 명을 죽게 했다) 이런 말을 하는 것은 아니다. 또 아이히만은 끊임없이 진부한 말로 자신의 행위를 정당화하거나 치장했지만 한나는 순순히 자신의 행위를 (자신이 하지 않은 행위까지도) 인정했다는 이유로 이런 말을 하는 것도 아니다. 둘의 본질적인 차이는 ‘범법자’와 ‘무법자’의 차이와 같다.
아이히만은 범법자였다. 그는 제 3제국의 법(정확히는 히틀러의 ‘말’)에 따라 국제법(인류 전체에 대한 죄) 혹은 이스라엘의 법(유대인에 대한 죄)을 범한 범법자였다. 즉 그는 법 안에서 법의 이름으로 법을 어겼다. 그러나 한나는 무법자다. 그녀는 법을 모르는 채로 법 바깥에서 법을 (어겼다고 말할 수 없는 방식으로) 어겼다. 따라서 한나가 판사의 질문에 “판사님이라면 어떻게 하셨겠어요?”라고 물을 때 그녀의 이 질문은 ‘판사님이라도 그런 상황에서라면 그렇게 하셨을 거예요’란 의미의 항변이 아니다. 그녀는 정말로 의아하고 궁금하다. 그런 상황에서 자신이 어떻게 했어야 하는지 그녀는 실제로 모른다. 시쳇말로 ‘법 없이 살아 온’ 한나는 판사에게 법에 따라 행동한다는 것이 도대체 무엇인지 묻고 있다.
한나가 법 바깥의 인물이란 말은 무슨 의미인가? 영화 중반부가 지나서야 밝혀지지만 한나는 ‘문자’를 모른다. 그런데 문자 중의 문자, 그것이 바로 ‘법’이다. 시나이 산에서 신의 문자로 모세의 석판에 새겨진 율법을 예로 들어도 좋고, 라캉의 이른바 ‘상징계’나 ‘대타자’를 거론해도 좋겠다. 법은 문자다. 금기나 법률이 문자로 성문화되기 마련이라는 의미에서만 아니라, 그것이 우리가 사는 법적 세계(Nomos)의 구성 원리 그 자체라는 의미에서도 그렇다.
그런 점에서 무죄를 주장하는 범법자는 재판관을 화나게 할 수 있을지언정 그를 당황하게 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그가 제 아무리 자신의 죄를 극렬하게 부인한다 하더라도 법 안에서 그렇게 하기 때문이다. 법 안에 있는 자는 어찌 되었든 법의 심판을 받게 할 수 있다. 그러나 무법자는 다르다. 법을 모르는 자를 법의 이름으로 심판하는 일은 일종의 역설이자 모순이다. 법을 모르므로 엄밀한 의미에서는 법을 어겨본 적 없는 자 앞에서만 재판관은 당황한다. 따라서 한나의 “판사님이라면 어떻게 하셨겠어요?”(독일 법정에서는 피고인인 판사에게 질문할 수 없다고 한다. 그녀는 법정에서 진행 중인 게임의 규칙 자체를 모르고 있는 것이다)라는 질문 앞에서 보인 판사의 태도는 분노가 아니다. 노예가 없는 주인에게서 주인으로서의 권위가 사라지듯, 무법자 앞에서 법의 수호자는 자신의 권위를 잃는다. 법은 당황한다. 그리고 당황했으므로 그녀를 과잉 징벌한다. 그리하여 재판이 끝날 때쯤, 모든 죄는 게임의 규칙을 모르는 한나의 몫으로 돌아간다. (문자를 모르는 데도) 한나는 최종 서류 작성자가 되고, 살해의 주도자가 된다. 그녀의 형량은 최종적으로 ‘무기징역’이다.
물론 그녀는 자신이 문자를 모른다는 사실을 고백함으로써(서류 작성자가 아니란 사실이 증명될 테니) 과잉처벌을 면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그렇게 하지 않는다. 영화에서는 등장하지 않지만 베른하르트 슐링크의 원작 소설에서 철학자인 마이클의 아버지는 그녀의 선택을 ‘품위와 자유’의 문제로 규정한다. 아이히만과 달리 그녀는 자신의 품위를 지키기 위해 자유의지에 따라 스스로 과잉처벌을 받아들인다.
욕조 안에서
재판정에 서기 오래 전, 마이클과 사랑을 나누던 한나의 방은 아마도 무법의 세계여서 그토록 격렬하고 아늑하고 감미로웠으리라. 샤워와 낭독과 섹스, 다시 샤워와 낭독과 섹스……. 열다섯 소년과 서른여섯 살의 전범이 나누는 기이한 사랑이라지만 그들의 사랑은 전혀 추하거나 역겹지 않다. 최소한 그 방에서 이루어지는 일들에 관한 한 관객들 또한 법의 시각에서 자유로워진다. 대체로 알몸이지만 한나는 기품 있고, 마이클은 당당하다.
양수처럼 따뜻한 목욕물로 채워진 욕조가 있고, 함께 누워 사랑하고 책을 읽을 수 있는 침대가 있는 그 방에서 한나와 마이클이 누린 충만감은, 당시 마이클이 쓴 시 한 편으로 요약 가능할 듯싶다(원작 소설에 등장하는 이 시는 영화의 경우 현재의 마이클이 펼쳐 든 노트에서 잠깐 모습을 드러내지만 읽지 않아 그 내용을 알 수 없다)
우리가 서로를 열면 / 나는 너를 내게 그리고 나는 나를 네게, / 우리가 깊이 빠져들면 / 너는 내 안으로 그리고 나는 네 안으로, / 우리가 사라지면 / 너는 내 안으로 그리고 나는 네 안으로, // 그러면 / 나는 나 / 그리고 너는 너.(베른하르트 슐링크, <책 읽어주는 남자>, 김재혁 옮김, 시공사, pp.78~79)
이 시를 미학적으로 좋은 시라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 시가 인간이 최초에 누렸다는 ‘이자적 관계’(오로지 나와 나의 대상만이 존재하는)의 충만함에 대한 시라는 점은 확실하다. 그러나 나와 내가 사랑하는 대상만이 존재하는 이 세계가 오래갈 수는 없다. 제3항, 곧 문자가 침입한다.
검표원 한나에게 ‘사무직’ 승진 발령이 통보된다. 사무직은 물론 문자를 모르는 이로서는 수행할 수 없는 업무다. 때마침 소년 마이클에게도 이 이자적 관계를 청산해야 할 시기가 도래한다. 친구들(사회적 관계)이 생기고, 소피를 만났으니 그는 이제 법으로 이루어진 성인들의 세계에 들어서야 한다. 그러고 보면 그가 결국 문자화된 법을 다루는 변호사(원작 소설에서는 작가이자 법제사가)가 되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해 보인다.
한나는 결연히 떠나고 영영 돌아오지 않는다. 그러나 상처는 남아서 마이클은 자신의 감정을 타인에게 열어 보일 수 없는 차가운 성정의 남자로 성장한다. 법의 온도가 대체로 그렇다.
책 더미 위에서 죽다
투옥 후 18년, 사면된 한나가 출소하기 일주일 전 마이클이 방문했고(그 사이 그는 한나를 찾지 않았다. 그러나 그녀에게 그들이 사랑하던 시절 그랬던 것처럼 책들을 읽고 녹음해 보내 준다. 한나는 그 목소리들을 따라 문자를 배웠다), 이후의 거취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러나 극적인 해후의 날, 그는 마치 ‘법처럼’ 한나를 대하는데, 한나가 쥔 손을 거절했고, 출소 후 그녀의 거처와 직업과 사회교육 프로그램에 대해 사무적인 어투로 일관했다. 그리고 그가 한나에게 던진 “옛 일들 생각 많이 했어요?”라는 질문은 그녀의 기대와 달리 욕조가 있던 그 방의 기억에 대한 것이 아니라 그녀의 범죄에 대한 것이었다. 그러니까 말하자면 ‘아직 사랑하나요?’가 아니라 ‘충분히 속죄했나요?’
물론 마이클의 이와 같은 태도도 이해 못할 바는 아니다. 이별에 대한 일언반구의 암시도 없이 돌연 떠나버린 연인, 수백 명의 유대인 여성들을 죽음에 몰아넣은 전범, 그러나 너무도 순수하고 기품 있어서 평생 잊을 수 없었던 유일한 사랑이기도 한 이 여자 앞에서, 그가 달리 어떤 태도를 취할 수 있었을까? 게다가 이 영화를 독일의 아우슈비츠 세대(대부분 죄가 없다고는 말할 수 없는)와 전후 세대(68년의 혁명을 겪어 정의에 아주 민감한) 간의 애증에 대한 알레고리로 읽는다면, 그의 주저는 더더욱 이해할 만하다.
그러나 한나의 입장으로 돌아가 보자. 지상에 존재하는 유일한 끈이 끊어졌다. 자신이 사랑하는 단 한 사람이 거의 30년만의 해후에서 자신과의 추억을 묻는 게 아니라 이미 속죄했다고 생각한 자신의 죄를 다시 묻는다. 결국 사면되어 출소하기로 되었던 날, 한나는 책더미 위에서 목을 매달아 자살한다. 그녀가 딛고 선 책들은 릴케의 시집과 <오디세이아>와 <전쟁과 평화>다. 모두 마이클이 즐겨 읽어주던 책들이다.
법 너머로 죽다
한나는 왜 자살했을까? 몇 가지 이유들이 떠오른다. 나가서 맞서야 할 새로운 세계(그 세계는 당연히 ‘문자-법’이 지배하는 세계일 것이다)에 대한 두려움? 사랑하는 사람에게 더 이상 사랑받을 수 없게 되었다는 절망감(그로 인해 그녀는 문자를 배웠다)? 아니면 18년간 치러온 속죄를 스스로는 끝내 인정하지 못한 자의 마지막 윤리(법 너머의 법)……?
첫 번째의 이유는 영화에서도 소설에서도 그다지 크게 부각되지 않는다. 한나는 감옥에서 성실하게 직업 훈련을 받았고 누구보다 모범적으로 생활했다. 그리고 바깥 세계에 나가더라도 직업과 거처가 이미 마련되어 있다.
스티븐 달드리 감독의 해석은 두 번째 이유였던 듯하다. 영화에서 한나는 마이클이 읽어주던 책들 위에서 자살한다(소설에서는 그런 언급이 없다). 속죄는 사랑하는 이를 향해 있다. 감독은 이 영화가 ‘거대한 속죄’보다는 ‘거대한 사랑’에 관한 영화가 되기를 바랐던 듯하다. 그러나 나로서는 달드리 감독이 이 영화를 만들면서 범한 유일한, 그러나 치명적인 실수가 바로 이 한나의 자살 장면이란 아쉬움을 떨치기가 힘들다. 슐링크의 원작 소설은 한나의 자살 직후, 마이클의 눈에 비친 그녀의 감방 모습을 이렇게 묘사한다.
나는 책꽂이 앞으로 다가갔다. 프리모 레비, 엘리 비젤, 타데우시 보로프스키, 장 아메리 등 희생자들이 쓴 글과 그 옆에는 루돌프 회스가 쓴 자서전적인 글들,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 대한 한나 아렌트의 보고서 그리고 강제수용소에 대한 학술적인 글들이 있었다.(<책 읽어주는 남자>, p.256)
프리모 레비, 엘리 비젤, 타데우시 보로프스키, 장 아메리 등은 모두 수용소에서 살아남아 그 경험을 기록으로 남긴 작가들이다. 한나는 문자를 읽을 수 있게 된 후, 집요하게 강제수용소에 대한 문헌들을 읽었던 것이다. 자신이 저지른 죄의 정체를 그녀는 뒤늦게 감옥에 가서야 알았다. 그런데 문자는 법이라고 했으니 말을 이렇게 고쳐도 무방하겠다. 한나는 글을 배움으로써 법의 세계에 진입했고, 법 속에서 줄곧 자신의 죄에 대해 이해하려고 시도했다. 말하자면 그녀는 18년 동안 ‘법적으로’ 속죄했다. 그런 그녀에게 마이클은 다시 이렇게 물었던 셈이다. ‘당신은 충분히 속죄했나요?’
법적인 속죄는 최대한의 속죄일까? 물론 법적인 견지에서, 한나는 속죄했다. 법이 정한 (과잉)형기를 모두 마쳤기 때문이다. 법에 따르면 이제 그녀는 죄과를 다 치렀다. 그러나 한나는 애초에 법 밖의 존재, 죄과를 다 치르고 난 그녀는 왜 자살했을까? 마치 안티고네의 ‘인륜’처럼, 법이 닿지 않는 곳에서 그녀에게 속죄를 명하는 소리가 있었으리라. 말하자면 그것은 법률 너머에서 양심에 작용하는 정언명령 같은 것이었을 텐데, 아마도 그것이 한나가 택한 최후의 선택은 아니었을까? 법에 의해 가해지는 산술화된 처벌이 아니라 자신의 양심에 따른 윤리적 죽음 말이다.
그러니까 그녀는 (달드리 감독의 해석과는 달리) 단순히 사랑하는 이가 읽어주던 책 더미 위에서 죽은 것이 아니다. 그녀는 법 위에서, 아니 ‘법 너머로’ 죽었다. 그리고 그런 죽음은 아이히만(혹은 전두환 같은 이들)으로서는 꿈도 꾸지 못할 (그러나 노무현이나 노회찬처럼 정치를 시 쓰기처럼 하려던 이들에게는 종종 찾아오는) 죽음이다. 누군가는 ‘법 뒤에서’ 살아남고 누군가는 ‘법 너머’로 죽는다. 나는 역사주의자는 아니지만 역사가 그 둘을 어떻게 기억할지에 대해서는 관심이 많다.
속죄(atonement)하는 글쓰기
슐링크는 소설 말미 마이클의 입을 빌려 한나의 이야기를 오랫동안, 여러 차례, 다양한 판본으로 썼음을 고백한다. 그리고는 “어쩌면 나는 우리의 이야기를 비록 그것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날 수는 없지만 그래도 벗어나고 싶었기 때문에 썼는지도 모른다”(<책 읽어주는 남자> p.273)고 토로한다. 미루어보건대, 그녀의 죽음에 책임이 없지 않았으니 마이클 역시 한나의 이야기를 쓰면서 사력을 다해 속죄했으리라. 자신의 ‘법’ 너머로 죽은 저 윤리적 주체 한나에게. 글쓰기에는 분명 어떤 속죄의 속성이 있게 마련이니까. 이제 그 ‘속죄’(atonement) 이야기를 해보자.
저자 | 김형중
1968년 광주에서 태어나 전남대학교 영문학과를 졸업하고 동대학원 국문학과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2000년 문학동네신인상 평론 부문에 당선되어 문단에 나왔다. 평론집 《켄타우로스의 비평》 《변장한 유토피아》 《단 한 권의 책》 《살아 있는 시체들의 밤》 《후르비네크의 혀》 등과 에세이 《평론가 K는 광주에서만 살았다》가 있으며, 소천비평문학상(2008), 팔봉비평문학상(2017)을 수상했다. 현재 조선대학교 국문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