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계에서 리메이크는 흔한 일이다. 오래된 명작을 다시 조명하거나, 어떤 나라에서 크게 성공한 작품을 타국에서 만드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범위를 확 좁혀, 자신의 작품을 다시 한번 만든 감독들의 사례를 모아봤다.
알프레드 히치콕
나는 비밀을 알고 있다
(The Man Who Knew Too Much,
1934 / 1956)
알프레드 히치콕은 영국에서 내놓은 <나는 비밀을 알고 있다>를 미국으로 건너간 1941년 리메이크 하기로 고려했지만 결국 22년이 지난 1956년에야 만들었다. <이창>(1954), <나는 결백하다>(1955) 등을 연이어 작업하던 각본가 존 마이클 헤이즈는 히치콕에게서 1932년 판은 영화는 물론 시나리오도 보지 말라고 요청 받고는, 오로지 그가 들려준 플롯에 의지해 시나리오를 써나갔다. 덕분에 분위기도 이야기도 상당히 다른 리메이크가 탄생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로 닿는 부분은 분명 있으니, 그걸 중심으로 두 영화를 뜯어보는 것도 흥미로운 감상이 될 것이다. 히치콕은 프랑수아 트뤼포와의 인터뷰에서 영국판은 "재능 있는 아마추어"의 작품이고, 미국판은 "전문가가 만든" 것이라고 자평했다.
마이클 만
L.A. 테이크다운
(L.A. Takedown, 1989)
히트
(Heat, 1995)
<히트>가 <L.A. 테이크다운>의 리메이크라기보단, <L.A. 테이크다운>이 <히트>의 연습판에 가깝다. 마이클 만은 1979년에 <히트>의 180쪽 짜리 원안을 썼고, 늘 이 작품을 만들 수 있기를 염원했다. 1989년 NBC의 텔레비전 시리즈로 오랜 친구이자 강력반 형사였던 책 애덤슨과 범죄자 닐 맥컬린의 이야기를 영화화 한 <L.A. 테이크다운>을 만들지만 파일럿에 그쳐 90분 남짓한 TV용 영화로 완성됐다. 다니엘 데이 루이스 주연의 <라스트 모히칸>(1992)의 큰 성공을 거두게 되면서, 마이클 만은 로버트 드 니로와 알 파치노를 기용해 90년대 최고의 액션 영화로 손꼽히는 <히트>를 연출하게 됐다. <히트>의 명장면인 두 주인공의 카페 대면 신이나 시가지 전투 신은 <L.A. 테이크다운>에도 포함돼 있었다.
오즈 야스지로
부초 이야기
(浮草物語, 1934)
부초
(浮草, 1959)
단순히 서사의 측면으로 보자면 오즈 야스지로의 작품은 그 얘기가 그 얘기인 것처럼 들린다. 그래서 시간차를 두고 만들어진 리메이크인 양 보이는 작품들이 왕왕 있다. 부모에게 대항해 단식 투쟁을 벌이는 <태어나기는 했지만>(1932)과 <안녕하세요>(1959), 배우자 없이 살아가는 부모가 혼기가 찬 딸을 시집 보내려는 <만춘>(1949)과 <가을햇살>(1960)는 서로 아주 닮았다. 한편 <부초>는 <부초 이야기>는 리메이크로 만들어진 작품이다. 두 스틸컷만 봐도 명징한 차이가 보인다. <부초 이야기>는 흑백영화고, <부초>는 컬러영화다. 또 다른 다름. 전자는 무성영화고, 후자는 유성영화다. 오즈 야스지로가 1958년에야 컬러영화를 받아들이며, 자신의 작품 가운데서 꾸준히 편애를 드러냈던 <부초 이야기>의 이야기를 변주했다는 점은 의미심장하다.
세실 B. 드밀
십계
(The Ten Commandments,
1923 / 1956)
세실 B. 드밀의 <십계>는 '무성/흑백'영화가 '유성/컬러'로 리메이크 된 또 다른 사례다. 성서영화만 무려 6편을 만든 드밀은 첫 번째 성서영화인 <십계>를 보다 거대한 규모로 다시 만들며 그 애정을 과시했다. 1950년대 중반 당시 어마어마한 금액이었던 1300만 달러를 쏟아부은 영화는 첨단 기술로 구현한 특수효과로 구현한 이미지로 '스펙터클'의 보여줬다. 그해 최고 수익을 거두었을 뿐만 아니라, 50년대 통틀어 두 번째로 큰 성공을 거둔 영화로 기록됐다. 두 판본의 결정적인 차이는 따로 있다. 1923년 판 <십계>가 고대 이집트를 배경으로 한 과거와 현대 두 파트로 나눠져 있다면, 1956년 판 <십계>는 철저히 모세가 살았던 과거로만 220분의 대서사시를 채웠다.
미카엘 하네케
퍼니 게임
(Funny Games,
1997 / 2007)
휴가를 즐기러 온 별장에서 괴한의 침입을 받는 중산층 가정. 미카엘 하네케의 문제작 <퍼니 게임>의 주인공이다. 미디어를 경유해 '폭력'을 탐구하고자 했던 하네케는 본래 미국을 배경으로 <퍼니 게임>을 만들고자 했다. 하지만 금전적인 문제로 포기하고 우선 자국인 오스트리아에서 영화를 완성했다. 그리고 <피아니스트>(2001)와 <히든>(2005) 등의 국제적인 성공에 힘입어 제작비를 마련해, 정확히 10년 만에 미국판 <퍼니 게임>을 내놓았다. 나오미 왓츠, 팀 로스, 마이클 피트 등 유명 배우를 섭외한 것만 제외하면 두 영화는 정확히 겹쳐 있다. 하네케는 <세븐>(1997)의 촬영감독 다리우스 콘지의 카메라를 빌어 오스트리아의 <퍼니 게임>과 모든 장면을 똑같이 찍어 제 의견을 관철했다.
시미즈 타카시
주온
(呪怨, 2002)
그루지
(The Grudge, 2004)
1999년 비디오판에 이어 2002년 영화판까지 제작된 <주온>의 인기는 일본을 넘어 세계로 뻗어나갔다. 반응은 빨랐다. 미국의 많은 메이저 영화사들이 할리우드 리메이크를 원했고, 결국 소니 픽처스가 원작의 감독인 시미즈 타카시에게 리메이크의 연출까지 맡겼다. 일본판은 6개의 단편이 유기적으로 묶여 있는 구성이었지만, <나는 네가 지난 여름에 한 일을 알고 있다>(1997)와 <스크림 2>(1997)으로 호러 퀸으로 군림했던 사라 미셸 겔러를 주인공에 캐스팅한 리메이크는 한 가지 에피소드에 집중한 채 진행된다. 일본판의 명장면으로 손꼽힌 턱 빠진 소녀는 어김 없이 등장시켰다. 완성도에 대한 의견은 엇갈렸지만 흥행 성적은 꽤 준수했고, 내년 개봉할 리부트까지 할리우드에서만 4편의 <주온> 시리즈가 제작됐다.
오우삼
종횡사해
(縱橫四海, 1991)
종횡사해
(Once A Thief, 1996)
오우삼은 자신의 대표작 중 하나를 미국판으로 리메이크 한 또 다른 아시아 감독이다. <영웅본색> 시리즈, <첩혈쌍웅>(1989)으로 액션 연출에 독보적인 재능을 뽐내, 90년대를 대표하는 액션 스타 장 클로드 반담 주연의 <하드 타겟>(1993)으로 할리우드에 입성했다. 3년 후 <브로큰 애로우>까지 연달아 성공 시킨 오우삼은 방송사 폭스의 TV영화로 1991년 작 <종횡사해>를 리메이크 했다. 결과는 오우삼의 커리어에 오점으로 남았다. 주윤발, 장국영, 종초홍 3인방이 만들어내는 액션, 코미디, 로맨스의 합은 찾을 수 없었다.
조지 슬라우저
배니싱
(Spoorloos, 1988)
배니싱
(The Vanishing, 1993)
납치 당한 여자친구를 수년간 수소문 하는 남자를 그린 네덜란드 영화 <배니싱>은 특유의 염세적인 분위기로 자국을 넘어 전세계적인 주목을 이끌었다. 5년 뒤 할리우드에서 제작된 <배니싱>도 원작의 감독인 조지 슬라우저가 연출을 맡았다. 그리고 감독이 제 영화를 리메이크 한 사례들 가운데 가장 처참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영화가 나왔다. 원작을 장악했던 기묘한 뉘앙스는 온데간데 없었고, 캐릭터는 중구난방으로 많아졌다. 결정적으로 원작의 어두운 세계관을 일거에 뒤엎어버리는 해피 엔딩까지, 같은 뿌리에서 나온 영화라기에 믿을 수 없는 작품이었다.
세바스찬 렐리오
글로리아
(Gloria, 2013)
글로리아 벨
(Gloria Bell, 2019)
칠레 영화 <글로리아>는 이혼하고 자식들과 종종 왕래하며 혼자 살아가는 중년 여성의 초상을 그려내 폭넓은 극찬을 받았다. 주인공 글로리아를 연기한 폴리나 가르시아의 명연에 베를린 영화제는 여우주연상을 바쳤다. <글로리아>의 감독 세바스찬 렐리오는 여성 캐릭터를 전면에 내세운 <판타스틱 우먼>(2017)과 <디서비디언스>(2017)로 점점 이름을 알렸고, 올해 미국판 <글로리아>를 내놓았다. 폴리나 가르시아가 보여준 연기를 누가 대체할 수 있을지 의문부터 들지만, 그 자리를 줄리안 무어가 채운다면 얘기는 달라질 터. 이미 현지에서는 무어의 연기에 대한 극찬이 자자하다. 원작의 각본을 쓴 곤잘로 마사가 아닌 여성 작가 앨리스 존슨 보허의 시나리오도 '잘 만든 여성영화'에 대한 기대를 높인다.
문동명 / 씨네플레이 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