벨기에의 명감독 다르덴 형제의 대표작 <로제타>(1999)가 한국 극장가에 걸린다. 재개봉이 아닌, 20년 만의 첫 개봉이다. 가혹한 삶을 버텨내야 하는 로제타의 절절한 일상을 스크린에서 만날 수 있는 귀중한 기회다. 다르덴 형제와 함께 영화계를 대표하는 형제 감독들을 소개한다.
장 피에르 다르덴
뤽 다르덴
대학에서 연극을 공부하던 장 피에르와 철학을 전공하던 뤽은 20대 초반 제작사를 세워 폴란드 이민자, 2차 세계대전 레지스탕스, 1960년대 총파업에 관한 다큐멘터리들을 만들었다. 극영화로 선회한 건 1987년 <거짓>을 연출하면서부터다. 세 번째 영화 <약속>(1996)로 세계적으로 주목받았다. 비전문배우를 기용해, 가정/경제적으로 위태로운 인물의 불안을 흔들리는 시선으로 따라가는 듀오의 스타일은 <약속>에서도 명확했다.
처음 칸 영화제 경쟁부문에 진출한 <로제타>로 바로 황금종려상을 받아버린 다르덴 형제는 <아들>(2002)로 남우주연상, <더 차일드>(2005)로 다시 한번 황금종려상, <로나의 침묵>(2008)으로 각본상, <자전거를 탄 소년>(2011)으로 심사위원대상 등 다섯 작품이 연거푸 주요 부문을 수상하는 쾌거를 기록했다. 무관에 그친 <내일을 위한 시간>(2014)과 <언노운 걸>(2016)에 이어, 새로운 촬영감독 베누아 데르보와 함께 처음으로 종교 문제를 다룬 신작 <영 아흐메드>(2019)로 올해 칸 영화제 감독상을 거머쥐었다.
조엘 코언
이던 코언
어릴 적 잔디를 깎아 모은 돈으로 8미리 카메라를 구입한 조엘 코엔은 동네 친구를 배우로 세워 TV에서 본 영화들을 리메이크 하며 스스로 영화를 익혔다. 뉴욕대 영화과를 졸업한 그는 샘 레이미의 데뷔작 <이블 데드>(1981)의 편집 조수로 참여하며 영화계에 이름을 올렸고, 3년 후 동생 이던과 함께 데뷔작 <블러드 심플>(1984)을 내놓았다. 흔히 코엔 형제의 영화는 공동연출작으로 알려져 있지만, 데뷔 이후 2003년까지 발표한 영화들 - <블러드 심플>, <밀러스 크로싱>(1990), <바톤 핑크>(1991), <파고>(1996), <위대한 레보스키>(1998>, <그 남자는 거기에 없었다>(2001) 등 - 은 조엘이 연출, 이던이 제작, 두 사람이 각본을 맡은 걸로 크레딧에 표기돼 있다.
최고작을 꼽는 설문에 유독 다양한 작품들이 분포돼 있는 것 역시 코엔 형제의 저력이라 할 만하다. 스릴러와 유머가 뒤엉킨 이야기가 시대도 공간도 전혀 딴판인 배경 속에서 펼쳐졌지만 '코엔 형제 스타일'이라는 수식은 언제나 유효했다.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2007), <시리어스 맨>(2009), <더 브레이브>(2010), <인사이드 르윈>(2013)가 모두 한 듀오에게서 나온 작품이 나왔다니, 그야말로 경이로운 스펙트럼 아닌가. 그들이 함께 쓴 시나리오는 샘 레이미, 안젤리나 졸리, 스티븐 스필버그, 조지 클루니 등의 연출로도 완성됐다.
오귀스트 뤼미에르
루이 뤼미에르
사실 '형제 감독'의 흔적은 영화의 역사 맨 첫머리에서 발견할 수 있다. 1895년 12월 28일 프랑스 파리의 한 카페에서 10개의 단편이 상영된 것이 영화의 시작이라고 회자되는데, 그 작품들을 만든 게 바로 뤼미에르 형제다. 사진건판 공장을 운영하는 아버지 슬하에 자란 그들은 움직이는 이미지를 만드는 데에 열중했고, 카메라와 영사기의 기능을 하는 '시네마토그래프'라는 기기를 발명했다. 그걸로 공장을 나서는 인부, 역으로 들어오는 열차, 아침식사를 하는 아기 등 지극히 일상적인 풍경을 담은 영상들을 만들었다. 파리뿐만 아니라 브뤼셀, 뭄바이, 런던, 몬트리올, 뉴욕, 부에노스 아이레스 등을 여행하며 이색적인 풍경들을 기록했다. 뤼미에르 형제의 영화 '창작'은 1900년까지 이어졌다고 전해진다.
조 루소
앤소니 루소
케이스웨스턴리저브의 대학원생이었던 루소 형제는 학생/카드 대출로 마련한 자금으로 장편 <단편들>(1997)을 만들었다. 한 영화제에서 그걸 본 스티븐 소더버그 감독은 조지 클루니와 함께 다음 작품을 제작해주겠다고 제안했다.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것이 루소 형제의 데뷔작으로 회자되는 <웰컴 투 콜린우드>(2002)다. 시장/평단의 반응 모두 좋지 않았지만 FX 네트워크 경영진의 눈에 띄어 TV시리즈 <럭키>(2003)의 파일럿의 감독을 맡았고, 그걸 마음에 들어한 론 하워드의 추천으로폭스 TV의 시리즈 <어레스티드 디벨롭먼트> 에 참여해 시즌 1,2의 일부 에피소드를 연출했다. 이 작품은 루소 형제에게 첫 번째 에미상을 안겼다.
오웬 윌슨 주연의 영화 <유, 미 앤 듀프리>(2006)로 1억3천만 불의 수익을 올린 후 시트콤 <카풀러스>, <커뮤니티>, <해피 엔딩스>에도 참여했다. 영화와 TV 시트콤을 오가며 코미디 감각을 선보인 루소 형제는 <캡틴 아메리카: 윈터 솔져>(2014)의 감독을 맡아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의 최고작이라는 찬사를 받으며, MCU의 야심작 <캡틴 아메리카: 시빌 워>(2016), <어벤져스: 인피니티 워>(2018), <어벤져스: 엔드게임>(2019)까지 연달아 연출했다. 니코 워커의 소설을 각색해 '스파이더 맨' 톰 홀랜드를 주인공에 내세운 <체리>가 차기작이다.
피터 패럴리
바비 패럴리
소설가와 TV시리즈 작가로 활동하던 피터 패럴리는 <에이스 벤츄라>(1994)와 <마스크>(1994)로 탄탄대로를 걷던 짐 캐리 주연의 <덤 앤 더머>(1994)로 제작비 대비 15배에 육박하는 수익을 거두면서 단숨에 스타 코미디 감독이 됐다. 다음 작품 <킹핀>(1996)부터 시나리오를 같이 쓴 동생 바비 패럴리와 공동연출 체제를 꾸렸다. <킹핀>은 (팬들에게 가장 웃긴 패럴리 작품으로 손꼽히는 것과 달리) 개봉 당시 그다지 반응이 좋지 않았지만, 카메론 디아즈 주연의 <메리에겐 뭔가 특별한 것이 있다>(1998)는 <라이언 일병 구하기>와 <아마겟돈>에 이어 그해 북미 박스오피스 3위를 오를 만큼 '대박'을 기록했다.
슬랩스틱과 화장실 유머가 정신 없이 쏟아지는 패럴리 형제의 장기는 <내겐 너무 가벼운 그녀>(2001), <날 미치게 하는 남자>(2005) 등 로맨틱 코미디까지 넘보게 했다. 90년대 만한 결과를 내놓지 못하던 그들은 2014년 <덤 앤 더머> 속편을 발표했고, 악평에도 불구하고 흥행 성적은 꽤 준수했다. 꽤 오랫동안 신작을 내놓지 않던 와중 피터 패럴리 혼자 연출한 소소한 드라마 <그린 북>은 여러 구설수에도 불구하고 올해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작품상을 수상했다.
래리/라나 워쇼스키
앤디/릴리 워쇼스키
워쇼스키 형제의 커리어는 코믹스에서 시작됐다. 마블 코믹스의 자회사인 '레이저라인'과 '에픽 코믹스'에서 발간한 클라이브 바커의 만화 <헬레이저>, <나이트브리드> 등의 이야기를 썼다. 영화 시나리오 <어쌔신>을 썼지만, 감독의 지시로 다른 작가가 그걸 모조리 수정하는 수모를 겪고, 감독이 되기로 결심했다고 한다. 그렇게 2년 만에 여성 주연의 누아르 <바운드>를 만들면서 화려하게 데뷔 했다. 첫 영화의 성공은 <어쌔신>, <바운드>와 비슷하게 시기에 쓴 SF 시나리오 <매트릭스>를 연출할 수 있는 기회가 됐다. 상상치도 못했던 독보적인 액션과 2000년대를 앞둔 세계에 관한 철학적인 메시지가 매끈하게 어우러진 <매트릭스>는 영화계 성공뿐만 아니라 문화 현상으로 잡았고, <반지의 제왕>과 함께 2000년대 초반 가장 뜨거운 3부작 영화로서 세계를 휩쓸었다.
<매트릭스> 시리즈의 조감독 제임스 맥티그의 <브이 포 벤데타>(2006)와 <닌자 어쌔신>(2009)의 제작자로 활동한 사이, 일본 만화 <마하 고고고>를 영화화 한 <스피드 레이서>(2008)를 연출하지만 흥행/비평 모두 완전히 실패했다. 이후에도 막대한 제작비가 투입된 SF <클라우드 아틀라스>(2012)와 <주피터 어센딩>(2015)를 내놓지만 결과는 점점 나빠지기만 했다. '워쇼스키 사단' 제임스 맥티그, 톰 티그베어, J. 마이클 스트러진스키 등이 합세한 넷플릭스의 시리즈 <센스 8>도 시즌 2에서 멈추고 말았다. 한편 래리가 2012년, 앤디가 2016년 성전환 사실을 밝히며 각자 라나, 릴리로 개명해 현재는 워쇼스키 자매로 불리고 있다.
조쉬 사프디
베니 사프디
뉴욕에서 나고 자란 사프디 형제는 영화 마니아인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어려서부터 습작을 만들었다. 두 사람은 보스턴대학교 동문이지만 처음부터 감독으로서 협업 체제를 시작하진 않았다. 2008년, 조쉬는 장편 <빼앗기는 것의 즐거움>을, 베니는 단편 <외로운 존의 지인들>을 발표했다. 이후 모든 작품의 시나리오와 편집을 함께 하는 로널드 브론스타인이 처음 참여한 <대디 롱 렉스>(2009)가 '사프디 형제'로 내놓은 첫 작품이다. 공동감독이긴 해도 크레딧을 찬찬히 뜯어보면 이야기는 조쉬가, 영화적인 형식은 베니가 담당하고 주로 담당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한때 미국에서 가장 촉망받는 고교 농구선수였던 레니 쿡에 대한 다큐멘터리 <레니 쿡>(2013)과 헤로인에 중독된 뉴욕의 홈리스였던 아리엘 홈즈의 과거를 영화로 만든 <헤븐 노우즈 왓>(2014)으로 미국 독립영화계에서 단연 눈에 띄는 감독으로 성장했다. 재작년 칸 영화제 경쟁부문에 초청된 <굿 타임>(2017)은 사프디 형제가 더 멀리 점핑했음을 알 수 있는 작품이었다. 형제의 개인적/영화적 고향인 뉴욕의 낮과 밤과 아침을 담아내는 숨막히는 호흡과 비주얼은 그들이 차세대 거장이 되리라는 기대를 확신으로 돌릴 만한 결과물이었다. 데이빗 핀처, 왕가위, 제임스 그레이, 봉준호 등과 작업한 명 촬영감독 다리우스 콘지의 카메라와 애덤 샌들러, 러키스 스탠필드, 이디나 멘젤, 폼 클레멘티프, 위켄드(!) 등의 연기가 더해진 신작 <언컷 젬스>가 후반 작업 중에 있다.
문동명 / 씨네플레이 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