칸영화제에 참석한 봉준호 감독, 송강호

세계적인 콤비, 이 말이 아깝지 않다. 봉준호 감독과 배우 송강호가 <기생충>으로 황금종려상을 수상하며 무대에 올랐으니까. 봉준호 감독은 지금까지 여섯 편의 장편 영화 중 네 편에서 송강호를 선택했고, 송강호 역시 그 작품들에서 결정적인 존재감을 남기며 궤적을 그려왔다. 그동안 봉준호, 송강호 콤비는 어떤 영화, 어떤 캐릭터를 선보였는지 정리해봤다.

※소리 필수, 웃음 주의


2003

<살인의 추억>

박두만

<살인의 추억> 박두만 역

‘봉송 콤비’는 <살인의 추억>에서 막을 올렸다. <살인의 추억>은 1980년대 화성 연쇄살인 사건을 무대로 옮긴 <날 보러 와요>를 재구성해 1980년대 대한민국을 조명했다. 송강호가 연기한 박두만은 화성 토박이 형사로, 직감과 강압 수사에 의존하는 형사다. 현장 감각이 뛰어나고 눈썰미가 좋으나, 형사의 권력을 휘두르는 근대적인 수사 방식이 단점이다. 그러나 서울에서 온 서태윤 형사와 함께 사건을 진행하면서 용의자가 아닌 진범을 잡으려고 노력한다.

봉준호와 송강호가 이 영화로 만난 건 천운이다. 두 사람은 1997년 <모텔 선인장> 촬영장에서 만났고(봉준호가 조감독이었다), 2000년에야 ‘디렉터스 컷’ 행사에서 재회했다. 송강호는 그 전날 우연찮게 <플란다스의 개>를 비디오로 봤고, 그래서 봉준호를 더욱 반겼다. 흥행 참패로 다소 의기소침했던 봉준호는 송강호의 인사에 힘을 얻어 훗날 <살인의 추억> 시나리오를 건네줬다. 그렇게 ’봉테일’과 미래의 국민배우가 의기투합해 <살인의 추억> 현장에 뛰어들었다.

강단 있는 형사가 마침내 ‘모르겠다’고 말하기까지.

박두만은 봉준호의 구성력과 송강호의 캐릭터 해석이 손을 맞잡아 탄생한 캐릭터다. “얘들 얼굴을, 딱 보다 보면은 어느 순간에 감이 딱 온다”는 인물이 눈을 똑바로 보는 용의자에게 “모르겠다…. 밥은 먹고 다니냐?”라고 뱉을 수밖에 없는 심리적 변화의 행적은 봉준호의 공이다. 반면 이 모든 과정에 몸을 맡긴 채 봉준호 특유의 ‘말맛’과 관객들이 공감할 수 있게끔 변화를 포착한 건 송강호의 성취였다.

<살인의 추억> 때부터 그랬는데, 봉준호 감독과 나는 말을 그렇게 많이 안 한다. 봉준호는 내가 어떻게 하나 볼 뿐이고, 나는 또 그렇게 내 마음대로 해도 되니까. (웃음)

씨네21 916호 [[송강호] 긴장과 이완으로 무장해제]


2006년

<괴물>

강두

<괴물> 강두 역

<괴물> 제작 소식은 이목을 집중시켰다. 한국 배경의 재난 영화(혹은 괴수물), 박해일과 변희봉과 배두나라는 호화 캐스팅, 그 방점을 찍은 건 <살인의 추억> 봉준호X송강호 콤비의 재림이란 점이었다. 특히 <괴물>은 봉준호가 고등학생 때 한강 다리에서 괴물을 봤다는 바이럴 마케팅으로 화제를 모았다(훗날 봉준호는 이 말이 대본이었다고 밝혔다).

송강호는 이번 영화에서 박강두 역을 맡았다. 한강에서 매점을 운영하는 희봉(변희봉)의 아들이자 딸 현서(고아성)를 홀로 키우고 있는 가장이다. 말이 가장이지, 평소에는 매점에서 잠만 자서 희봉에게 혼나는 다소 무책임한 헐렁이다. 그래도 현서만 보면 쪼르르 달려가는, 딸 사랑은 지극한 ‘딸바보’다. <괴물>은 괴물이 현서를 ’잡아먹는’ 걸 목격한 강두 가족이 현서의 문자를 받으면서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살인의 추억>이 그랬듯 강두는 일련의 사건 이후 바보 같은 한량에서 파수꾼 같은 인물로 거듭난다.

흥행에 성공한 <괴물>은 대중들에게 봉준호의 ‘한국적’, 송강호의 ‘소시민’ 이미지를 더 각인시켰다.

대중들이 생각하는 송강호의 ‘소시민적 이미지’는 <괴물>에서 비롯됐을 것이다. 이전에도 (<효자동 이발사> 같은) 그런 역할을 맡은 바 있지만 현대를 배경으로 실제 괴물과 공권력과 가짜 뉴스가 빚어낸 환상에 맞서는 강두의 모습은 누구라도 자신을 투영할 수밖에 없는, 진짜 소시민에 가까웠다. 물론 천만 관객을 돌파한 대중적인 인기 역시 그의 소시민 이미지를 더욱 오래가도록 도왔다.

봉준호는 처음부터 강두 역에 송강호를 점찍어두고 썼다. 그래서인지 <살인의 추억>의 빡빡하게 구성된 인물이 아닌, 좀 더 송강호의 연기 디테일에 많은 게 맡겨졌다. 송강호는 <괴물> 시나리오를 읽고 색이 빠져가는 노란 머리를 제안했고, 극중 폭넓게 변해가는 강두의 모습을 십분 살려냈다. 강두는 송강호의 또 하나의 대표 캐릭터가 됐다.

박강두라는 인물은 주류에 편입된 인물이라기보다는 이탈된 느낌인데, 그런 사람이 아주 현실적인 사건과 부딪힌다고 했을 때 어떻게 하면 이 현실적인 사건을 보이지 않는 생물체와 동떨어지지 않고 드라마적으로 융합시킬 것인가가 어려웠다. 상대가 사람이라면 반작용이 있는 거고 자연스럽게 연기도 묻어날 텐데, 이건 사람도 아니고 촬영할 때는 대상도 없으니까 감정 자체를 끝까지 끌고 가는 게 어려웠던 것 같다.

씨네21 562호 [<괴물>의 변희봉, 송강호, 박해일, 배두나, 고아성]

강호 선배에게 가장 고마운 건 카메라가 돌아갈 때는 그냥 ‘배우 송강호’ 그 자체라는 점이다. 그 어떤 일이 있어도 배우 송강호에게 눈곱만큼의 영향도 미치지 않는다.

씨네21 1000호 [스페셜1, 우리가 잘 아는 사람 같은 동시에 그 모든 패턴을 비껴가는]


2013년

<설국열차>

남궁민수

<설국열차> 남궁민수 역(왼쪽)

<괴물>이 ‘천만 감독’, ’천만 배우’라는 타이틀을 두 사람에게 쥐여주자, 둘은 약속이라도 한 듯 한숨 돌릴 시간을 가졌다. 봉준호는 <도쿄!>의 ‘흔들리는 도쿄’와 <마더>를 연출하며 자신만의 세계를 구축했다. 송강호는 한재림(<우아한 세계>), 이창동(<밀양>), 김지운(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 박찬욱(<박쥐>), 등 수많은 감독들의 작품에서 유례없이 빛나는 모습을 보였다.

두 사람이 다시 뭉친 영화는 <설국열차>였다. 크리스 에반스, 틸다 스윈튼, 존 허트 등 글로벌한 출연진 속에서 송강호는 남궁민수 역을 맡았다. 남궁민수는 열차의 보안 설계자였지만 모종의 이유로 열차 내 감옥칸에 수감된 크로놀(극중 마약 같은 물질) 중독자다. 성장 중심의 박두만, 박강두와 달리 남궁민수는 철저하게 자신의 잇속을 위해 움직이는 인물이란 게 달랐다. 하나 막바지에 치달을수록 왜 봉준호가 남궁민수를 송강호에게 맡겼는지 짐작할 수 있다.

<설국열차>에서만 볼 수 있는 송강호의 염소수염

<설국열차>는 기상 이변으로 문명사회가 무너진 근미래가 배경이다. 인물 구성도 보다 빼곡하다. 한국적인 배경에서 주역 캐릭터들이 성장하는 과정을 담은 봉준호의 전작과는 달랐다. 전체적으로 무겁고 다문화적인 영화에서 송강호는 특유의 경쾌한 대사 처리로 한국 관객들을, 이국적인 매력으로 외국 관개들을 끌어당겼다. 봉준호는 이번 작품에서도, 물론 영화 속 세계 때문이었지만 송강호에게 다시 한 번 추레한 비주얼을 덧씌웠다. 염소 수염의 송강호는 <설국열차>에서만 볼 수 있다.

송강호 선배는 어떤 작품이든 본인만의 해석법이 있다. 그걸 늘 존경했고 거기에 전율할 때가 있었다.

씨네21 916호 [[봉준호] 엔진을 움켜쥔 사나이]

나에게 봉준호는 영화적 동지이자 존경하는 감독이고, 사적으로는 친한 후배다.

씨네21 916호 [[송강호] 긴장과 이완으로 무장해제]


2019년

<기생충>

기택

<기생충> 기택 역(맨오른쪽)

두 사람은 <설국열차> 때처럼, 한 작품 건너고 <기생충>에서 만났다. 봉준호는 넷플릭스와 함께 <옥자>를 만들며 할리우드 시스템을 경험했고, 송강호는 그 사이에 <변호인>과 <택시운전사> 등으로 관객수 ’1억 명 돌파 배우’에 등극했다. 2018년 1월 봉준호가 차기작 <기생충>에 송강호와 재회한다 밝혔을 때, 그의 전작을 한 편이라도 본 관객이라면 <기생충>을 기대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같은 해 10월 공개된 <기생충> 스틸컷에서 송강호는 ‘봉준호의 송강호’답게 비루한 비주얼을 보여줬다. 백수 가족의 가장답게 뜬 머리나 기름져 보이는 피부, 그럼에도 그 미묘하게 못마땅한 표정. 눈길을 확 사로잡는 찰나의 연기가 담겨있었다. 송강호는 “모두가 주인공인 영화였고 봉준호 감독이 든든하게 이끌어주는 현장”이라 어느 때보다 편하고 재미있게 촬영했다며 봉준호의 존재감을 상기시켰다.

<기생충> 기택 역을 맡은 송강호

<기생충>은 4월 18일, 72회 칸영화제 경쟁부문으로 초청됐다. 켄 로치, 테렌스 멜릭, 쿠엔틴 타란티노 등 과거 황금종려상 수상자들이 경쟁상대였다. 일각에선 한국에선 기대작이지만 저 라인업에서 살아남을 수 있겠냐 했지만, 영화가 공개되고 평단의 호평이 이어지자 희망이 보였다. 5월 26일, <기생충>이 칸영화제 황금종려상을 거머쥐었다. 한국 영화 100주년에 한국 영화 최초의 황금종려상이 탄생한 것이다.

칸 영화제 첫 상영 이후 봉준호, 송강호, 최우식

그동안 ‘봉준호의 송강호’를 세 번이나 만났지만, <기생충>이 만들어낸 그들은 아직 만나지 못했다. 봉준호는 <기생충>을 “빈부격차 속 생존 몸부림”이라고 설명했다. 송강호의 기택은 그 생존의 몸부림을 어떻게 표현했을까. 오는 5월 30일 개봉할 <기생충>은 이것만으로 충분히 기다려진다.

“16년 동안 4편의 작품을 송강호 선배님과 함께 할 수 있어서 기쁘고, 영광이었다. 영화의 어떤 역할을 부탁드리기보다, 정신적으로 많이 의지했다”

“‘살인의 추억’이 2002년부터 촬영을 시작했으니, 거의 20년 동안 알고 지낸 것이나 다름없다. 인간적인 믿음도 있겠지만 봉 감독이 추구하는 작품의 세계와 비전이 감동적이고 감탄스러운 부분이 많다. 작업을 할 때 은근히 즐기면서 한다. 어떤 창의적인 것도 다 받아들일 것 같은 예술가로서 경지가 느껴졌다”

2019년 5월 26일 텐아시아 기사 [‘20년 동반자’ 봉준호X송강호, 조연출·단역 시절부터 황금종려상까지] 발췌


씨네플레이 성찬얼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