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구수 1억도 안되는 대한민국, 전 세계 영화 시장에 저력을 보여주고 있다. 북미, 중국, 일본, 영국에 이어 영화 시장 크기에서 5위를 차지했다. 무려 16억 달러의 매출을 기록했다 한다. 거기에 최근 칸 영화제의 <기생충> 황금종려상 수상이 겹치면서 한국 영화 또한 주목받고 있다. 문득 해외 관객들은 한국 영화 입문작으로 뭘 선택할까 궁금해서 찾아보니 북미 최다 커뮤니티 ‘레딧(Reddit)’에서 2015년 게시된 한국 영화 추천작을 발견했다. 해당 목록에는 무려 109편의 영화가 기재됐는데, 다소 의외이거나 되짚어 볼만한 영화 10편만 쏙쏙 골라 살펴보자.
이정도면 필견 영화!
박찬욱 이름에 강렬한 이미지를 떠올리는 사람들이 많다. 곰곰이 생각해보면 박찬욱의 영화는 서로의 이끌림에 모든 걸 던지는 인물이 중심에 있다. <박쥐>, <아가씨>, <리틀 드러머 걸> 등등. 이들같이 점잖은 세상에 점잖치 못한 사랑은 <싸이보그지만 괜찮아>에서 절정에 이른다. 정신병원에서 만난, 자신을 사이보그라 믿는 영군(임수정)과 남의 특징을 훔칠 수 있다는 망상을 가진 일순(정지훈)은 사랑에 빠진다. 정상적으로 살아가지 못하는 두 사람이지만, 서로를 위해 자신의 세계를 무너뜨리고 마침내 만난다. 사랑에 대한 아주 직설적인 동화이자 정상과 비정상에 대한 블랙코미디 <싸이보그지만 괜찮아>는 복합 장르를 선호하는 해외 관객들이 좋아할 만하다.
한국전쟁은 분명 비극이지만, 그 안에서 한국만의 정서로 그려내는 특별한 장면이 있다. <공동경비구역 JSA>를 비롯한 수많은 전쟁영화, 혹은 첩보영화들이 그 결실이다. 그중 <웰컴 투 동막골>은 비극적인 현대사를 한마을로 축소시키면서 화해의 여지를 짚어낸다. 비록 서툴게, 혹은 비현실적인 환상을 토대로 서로에게 있는 인간성을 발견하고 협력하는 내용은 해외 관객들에게도 통하는 듯하다. 어쩌면 한국 관객이 해외 사극 영화를 보면서 신기해하듯 한국전쟁의 군복과 인물상에 신기해했을지도.
앞선 <웰컴 투 동막골>과는 정반대로 한국전쟁의 비극을 한 형제의 일대기에 비춰 처절하게 묘사한 영화. 국내 영화로는 보기 드물게 대규모 전투 장면이 묘사됐고, 해당 시기에 일어난 일을 반영했기 때문에 국내에서도 천만 돌파에 성공한 흥행작으로 기억되고 있다. 엄밀히 따지자면 해외에서 만든 전쟁영화들이 당연히 더 고퀄리티이지만, 한국전쟁의 당사자들을 상징하는 인물들을 통해 한국전쟁을 묘사한 영화가 드물어 영화 덕후뿐만 아니라 밀리터리 덕후들도 주목하는 영화 중 하나.
이 리스트에서 꽤 많은 작품을 올린 감독이 있다. 곽재용이다. 그가 연출, 각본을 맡은 <엽기적인 그녀>, <클래식>, <내 여자친구를 소개합니다>, 그리고 각본을 쓴 <데이지>와 <중독>까지. 국내에서도 멜로 영화계에 한 획을 그었다는 평가를 맡는 감독답게 한국 영화 멜로 영화에 ‘입덕’ 작품 다수를 만든 것이다. 이 중에서도 가장 눈에 띄는 건 <중독>. 국내 관객들에게 자주 언급되는 영화는 아니나 할리우드 진출로 해외 관객들에게 친숙한 이병헌이 출연해 추천 작품으로 뽑힌 것이지 않을까. <데이지>는 홍콩의 유위강 감독이 연출했으나 국내 회사가 제작했고, 정우성, 이성재, 그리고 <엽기적인 그녀>의 전지현이 출연했으니 한국 멜로 영화 추천작으로 이름을 올렸다.
물론 해외에도 불량 청소년이 있다. 보통 ‘불리’(Bully)라고 부른다. 그렇지만 한국 고등학생들이나 ‘일진’을 그린 영화는 해외 관객들에게 색다를 것이다. 한국 특유의 교육 환경도 해외와 다르거니와 (나름 학생이라고) 교복을 입고 싸우는 것도 조폭, 갱스터를 떠올리게 하니까. <폭력써클>도 그런 맥락이 돋보인 게 아닌가 싶다. 싸움 실력은 출중하지만 육군사관학교 진학을 꿈꾸는 이상호(정경태)와 불량써클 TNT의 한종석(연제욱)의 싸움을 그린 이 영화는 국내에선 그렇게 유명한 편이 아니다. 학생이라기에 너무나도 폭력적인 액션들과 과격한 분위기는 한국 관객들에게 좀 비현실적으로 느껴졌을지 모른다. 이런 점이 해외 관객들에겐 더 매력적인 포인트로 보였다. 대충 껄렁거리며 비싼 차나 몰고 다니는 영화 속 불리와 달리 피 튀기면서 싸우는 일진(및 평범하고 싶은 고등학생)의 모습은 상당히 인상적이었을 터. 액션 장르에 함께 이름을 올린 <싸움의 기술>도 비슷한 맥락이었을 것이다.
시간이 갈수록 재평가되는 영화 <김씨 표류기>. 개봉 당시에는 큰 인기를 모으지 못했으나 지금은 국내와 해외 모두 필견의 영화로 소개되고 있다. 자살하려다 밤섬에 고립된 남자(정재영)와 SNS으로 다른 사람의 삶을 도용하는 히키코모리 여자(정려원)의 이야기를 다룬다. 단순히 코믹한 영화일 것 같지만, 어떤 교류도 없었던 두 남녀가 서로의 삶을 걱정하며 소통해가는 내용은 한번이라도 군중 속의 고독을 느껴본 사람들이 마음 시리게 공감할 수밖에 없다. 더불어 영화에 나오는 짜파게티를 먹어본 적 없는 해외 관객이라면 이 영화를 보고 도대체 이 음식은 무엇일까 관심을 가질 테니, 좋은 메시지도 전하고 한국식 인스턴트 음식도 소개하는 일석이조의 영화다.
<김복남 살인사건의 전말>은 어느 시골에서 인생을 착취당한 여자의 복수극이다. 한국적인 농촌 사회를 묘사하고 있으니 해외 관객들에게 어필할 수 있을까 싶지만, 해외도 사람이 실종되고 매매되는 일이 꽤 자주 일어나는 편이다(특히나 땅이 넓거나 치안이 좋지 않은 국가라면). 그래서 해외 관객들도 <김복남 살인사건의 전말>의 공포감을 쉽게 이해했을 것이다. <김복남 살인사건의 전말>은 폭력 수위가 높은 편이라 관객 사이에서 호불호가 갈렸고, 호평받은 걸 알아도 차마 못 본 관객도 있을 것이다. 이 점은 대체로 폭력 수위가 높은 영화도 쉽게 소화하는 해외 관객들에게 별다른 문제가 되지 않았을 것이다.
정말 모범적인 경찰이 모의훈련의 강도 역을 맡게 된다면? 일본 영화 <노는 시간은 끝나지 않는다>를 리메이크한 <바르게 산다>는 개봉 당시에도 신선한 웃음을 선사한다는 평가를 받았다. 연극계와 영화계를 오가며 허를 찌르는 타이밍과 말재간을 보여준 장진 감독이 각본을 쓴 덕분에 슬랩스틱이나 말장난이 아닌 캐릭터를 활용한 개그 감각으로 가득하다. 경찰을 대상으로 한 코미디 영화가 해외에도 많지만, 정도만이 보여주는 캐릭터와 정재영 특유의 진지한 코믹 연기가 시너지를 내면서 해외 관객들에게 호평을 받았다.
국내에서만큼 해외에서도 유명한 독립영화 <똥파리>. 배우 양익준이 연출과 주연을 도맡은 이 영화는 일수와 용역으로 먹고사는 깡패 상훈(양익준)과 아버지와 남동생을 데리고 가장 역할을 해야 하는 여고생 연희(김꽃비)의 만남과 교류를 그린다. 두 인물의 상황과 직업이 말해주듯 골목길과 반지하를 전전하며 대한민국 서민들의 면모와 전 세대로부터 대물림받는 트라우마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대한민국 사회가 배경이지만 사회 변방으로 내몰린 경험이 있다면 누구라도 공감할 지점을 짚고 위로해준다. 양익준의 찰진 욕설 연기 때문에 이 영화를 본 해외 관객들은 한국어를 몰라도 욕설만큼은 기막히게 알아들을 수 있다는 농담도 있다.
이 영화가 있을 거라고 상상한 분들이 몇 명이나 될까. 사람 마음이 그렇지 않은가, 만날 건강식을 먹다 보면 불량식품이 생각나는 그런. <내 사랑 싸가지>도 그런 부류로 보인다. 언급한 다른 영화들에 비하면 분명 지나치게 과장되고 유치하며 오글거린다. <내 사랑 싸가지>는 2000년대 한국 사회를 휩쓸었던 ‘인터넷 소설’ 문화가 고스란히 높아있고, 최근 찾기 힘든 코믹함과 로맨틱함으로 무장하고 있다. 어쩌면 이토록 ‘비현실적인 영화’라는 점이 <내 사랑 싸가지>가 이 리스트에서 갖는 메리트가 아닐까.
씨네플레이 성찬얼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