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이온 킹>(2019)

맡겨놓은 흥행을 되찾아가는 수준이었다. 여름 시즌 가장 큰 기대작으로 손꼽히던 디즈니의 실사화 <라이온 킹> 리메이크가 북미에서 첫 주 1억 9000만 달러가 넘는 수익을 올리며 <어벤져스: 엔드게임>에 이어 2019년 두 번째이자, 역대 8번째로 높은 오프닝 주말 흥행 기록을 세웠다. 시사 반응이 미지근했고, 앞선 <알라딘>이 너무 성공해 김빠진 사이다가 되진 않을까 하는 우려도 있었지만, 막상 뚜껑을 열자 이런 기우를 불식시키며 폭발적인 성과를 낳았다. 국내에서도 첫 주 200만 명이 넘는 양호한 성적을 올렸고, 중국에선 북미와 맞먹는 대박을 기록하며 전 세계적으로 첫 주에만 총 5억 달러가 넘는 흥행 수익을 달성했다. 비평적인 부분은 다소 엇갈렸지만, 관객들의 만족도는 높은 편이었다.

<라이온 킹>(2019)

실사화라고 하지만 동물들과 배경이 모두 CG로 구현됐기에 애니메이션에 가깝다. 그러나 스튜디오에서 모션 캡처를 진행한 방식 때문에 라이브 액션 필름으로 구분되었다. 기대작답게 캐스팅의 면면이 화려하기 그지없는데, 도널드 글로버와 비욘세, 세스 로건, 취웨텔 에지오프, 존 올리버, 키건 마이클 키 등의 이름값은 원작의 매튜 브로데릭, 제레미 아이언스, 네이단 레인, 로완 앳킨스, 우피 골드버그 등에 뒤지지 않는다. <정글북>으로 한차례 CG 동물을 잘 활용해 성공을 거뒀던 존 파브로가 메가폰을 잡았으며, 관록의 촬영감독 케일럽 디샤넬과 마크 리볼시 편집, 스필버그와 작업했던 제프 나단슨 각본 등 1급 스탭들이 투입됐다. 물론 앞선 <미녀와 야수>, <알라딘>처럼 원작의 음악을 맡았던 한스 짐머의 복귀도 당연한 수순이었다.

(왼쪽부터) 한스 짐머, 엘튼 존

<라이온 킹>(1994) 사운드트랙 표지

전설이 된 한스 짐머와 엘튼 존의 1994년 판 <라이온 킹> 음악

당시 한스 짐머는 1988년 <레인맨>으로 처음 할리우드에 입성해 곧바로 오스카 음악상 후보에 올라 주목받았고, <블랙 레인>과 <드라이빙 미스 데이지>, <그린카드>, <분노의 역류>와 <폭풍의 질주>, <델마와 루이스> 등 상업적이면서도 작품성 있는 영화들을 고르게 맡으며 차세대 영화음악가로 약진하던 중이었다. <라이온 킹>으로 오스카를 비롯한 각종 시상식들과 빌보드 차트를 동시에 석권하며 마침내 할리우드 정상에 올라선 그는 이를 계기로 자신이 꿈꿔왔던 전문화되고, 시스템적인 공동협업을 구현할 수 있는 스튜디오 미디어 벤처(현 리모트 콘트롤 프로덕션)를 설립해 할리우드 영화음악의 지형도를 바꾸게 된다. 그런 면에서 <라이온 킹>은 한스 짐머 경력에 있어 중요한 포인트를 남긴 작품이자 분수령이 되는 기점이기도 하다.

1994년 아카데미 수상 당시

<라이온 킹> 외에도 1994년 오스카 음악상 후보들은 쟁쟁했다. 짐머를 가장 위협하는 상대론 그 해 오스카 주요 부문을 휩쓸었던 <포레스트 검프>의 알란 실베스트리가 있었고, 훗날 <프라다>로 오스카를 거머쥐는 엘리웃 골든탈의 <뱀파이어와의 인터뷰>와 무려 첫 지명에 <쇼생크탈출>과 <작은 아씨들> 두 편을 후보에 올린(영화음악의 전설 알프레드 뉴먼의 아들인) 토마스 뉴먼도 있었다. 그에 반해 주제가상은 일방적이었다. 엘튼 존과 팀 라이스가 만든 노래들은 후보작 다섯 곡 가운데 세 곡을 올리는 기염을 토했으며, 90년 넘는 오스카 역사상 한 작품에서 세 곡이 후보로 오른 경우는 <미녀와 야수>, <라이온 킹>, <드림걸스>, <마법의 걸린 사랑> 단 네 편뿐이었다(결국 <마법에 걸린 사랑> 이후 한 작품에서 두 곡 이상 오르지 못하게 규정이 바뀌었다).

<라이온 킹>(1994)

<라이온 킹>(2019)

짐머의 고민 그리고 선택

‘엔터테인먼트 위클리’와 가진 인터뷰에서 “한스 짐머는 <라이온 킹> 리메이크에 참여하는 걸 주저했다”고 밝혔다. 보다 나은 걸 찾다가 자칫 작업 자체를 망칠 수 있을 거란 판단에서였다. 하지만 몇 년간 콘서트 투어에서 <라이온 킹>의 음악을 연주하며 생각이 바꿨다고 한다. 같은 음을 연주하더라도 연주자들의 감정이나 인간성에 따라 다르게 연주되기 때문에 전혀 다른 음악을 들려줄 수 있을 거라 확신한 것이다. 그래서 많이 바꾸지 않더라도 새 버전의 음악을 전달할 수 있을 거라 여겼다. 최근 자신과 <슈퍼 배드> 시리즈, <어메이징 스파이더맨 2>, <히든 피겨스> 등을 함께 한 퍼렐 윌리엄스를 공동 프로듀서로 끌어들이고, 아프리카의 특별한 연주자들과 함께 원작의 추억을 간직한 2019년식 <라이온 킹> 음악을 들려준다.

한스 짐머

사실 애니메이션 사운드트랙 사상 가장 많이 팔린 원작의 음악을 새로 고친다는 건 천하의 한스 짐머라도 쉽지 않을 선택이었을 것이다. 원작보다 30분 가까이 러닝 타임이 늘어났고, 실사화 과정에서 사람이 아닌 동물을 대상으로 삼고 있기에 <미녀와 야수>나 <알라딘>처럼 기존 뮤지컬의 색채를 고집할 수도 없는 노릇이며, 무엇보다 그 자신도 초창기 음악과 현재 스타일이 제법 많이 달라졌기 때문에 변형은 필수불가결한 선택이었다. 그럼에도 짐머는 최대한 원작 음악에 가깝게 복기하고자 노력했다. 엘튼 존의 노래들을 모두 가져왔고, 브로드웨이 뮤지컬 곡도 사용했으며, 스코어 역시 그 시절 짐머를 떠올리게 만드는 요소들로 가득하다. 하지만 새로운 <라이온 킹>의 음악을 기대했던 팬들에겐 다소 아쉬움으로 남을 듯하다.

<라이온 킹>(2019) 사운드트랙 표지

새롭진 않아도 여전히 강력한 2019년 판 <라이온 킹> 음악

새로운 게 없어 아쉽다고는 했지만, 2019년판 <라이온 킹> 음악 자체의 완성도는 당연히 빼어나다. 94년 원작과 비교해 묵중해지고 현재 짐머 스타일에 걸맞게 세련된 편곡은 실제 동물들에 가까운 모습들과 맞물리며 색다른 감정과 드라마를 부여한다. ‘BBC’ 고급 생태 다큐멘터리나 ‘내셔널 지오그래픽’의 동물 다큐에서처럼 모든 대사들을 빼고, 짐머의 음악과 영상만으로 스토리 진행이 될 정도로 이 스코어는 자연의 경이로움과 함께 셰익스피어식 처절한 투쟁과 복수, 회한과 사랑에 대해 탁월하게 묘사해냈다. 더 이상 말이 필요 없는 비욘세와 차일디쉬 감비노가 가세하고 퍼렐 윌리엄스가 손대고, 원작의 라보 M과 은퇴를 앞둔 엘튼 존과 팀 라이스가 복귀한 아티스트들의 지원도 든든하다.

도날드 글로버(차일디쉬 감비노)

비욘세

비욘세가 이 영화를 위해 만든 스피릿’(Spirit)은 원래 엔딩 크레딧 곡으로 쓰일 예정이었다. 그러나 짐머는 R&B와 가스펠이 적절히 섞인 이 노래를 들으며 영화의 이야기와 맞닿아있다고 생각했고, 보다 핵심적인 장면에서 사용되길 원해 현재의 위치로 바꿨다. 다만 기존의 엘튼 존이 만든 곡들과는 전혀 다른 스타일이라 영화상에서 유독 이질적으로 다가온다. 비욘세 대신 엔딩을 장식하는 건 엘튼 존의 트레이드마크와도 같은 신명나는 로큰롤 네버 투 레이트(Never Too Late)다. ‘스피릿’과 함께 이번 리메이크를 위해 새롭게 작곡된 유이(唯二)한 곡으로 아프리칸 코러스가 어우러져 강렬한 엔딩을 장식한다. 원작에선 없었던 더 토큰스의 히트곡 ‘더 라이온 슬립 투나잇(The Lion Sleeps Tonight)을 가져와 깨알 같은 개그를 선사하는 것도 인상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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