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밭을 만들고 정원을 가꾸어 아름답게 가꾸어야 할 이 땅에 보기 흉한 소녀상을 전봇대처럼 많이 세우는 것은 위안부의 권익을 위한 것도 아니고 위안부의 명예를 위한 것도 아니다. 오로지 위안부를 정치적 앵벌이로 하여 대한민국의 이미지를 위안부의 나라로 인식되게 하는 해국행위를 뿐이다. 겨울이면 이 위안부 소녀들은 목도리와 스카프와 고급 담요로 치장된다. 이를 바라보는 여식 아이들은 “엄마, 나도 위안부 될래” “엄마 우리 할머니도 훌륭한 위안부였지?” 참으로 기막힌 정서가 자라난다. 대한민국 땅을 밟는 외국인들은 웬 한국에 위안부가 천지로 깔렸느냐며, 나이든 한국의 할머니들을 일본군 위안부 정도로 바라볼 수 있을 것이다.(《뚝섬 무지개》, p.509)
기억 안 하고 싶은 걸 기억해버리면 잠을 못 자.
또 마찬가지야.
자네한테 이런 얘기하고 나면 난 또 오늘 저녁에 잠 못 자.
잠 재웠던 걸 다시 깨우는 거나 똑같은 거여.
이 사진 속의 사람을 찾는 것도 중요하지만, 역행하는 거지.
난 그걸 내버려둔다는 게 이해가 안 돼.
우리 스스로가 이놈을 찾아다니면서 이놈 스스로를 증명한다는 것도 이해가 안 돼.
똑같은 거 아닌가 그럼?
그래 이놈이 막 가짜라고 하니까
‘아니야, 이 새끼야 나는 진짜야 이 새끼야, 내가 사람 찾아갖고 와서 증거로 들이댈게.’
바꿔서 얘기하면 지금 그 얘기 아닌가?
(당시 김○○ 씨의 죽음을 목격한 시민군 최진수 씨) : 그 눈, 관자놀이에 총을 대고……바로 쏘고 쓰러졌을 때……그때 그 눈을 봤던 것 같습니다. 23일 날 전날 강인했던 눈……그래서 아 그 친구가 이렇게 쓰러지는구나……그 친구 대신에 그러니까 제가 산 거죠……제가 먼저 나갔으니까 툇마루에서 먼저 발을 내딛었으면 제가 먼저 죽었을 텐데……그 생각만 저는 수십 년 동안 하고 삽니다.(말하는 내내 입술이 떨린다)
(당시 시민군 최영철 씨) 우리가 살아남았다는 것 그걸로서, 우리가 살아남은 자의 죄책감 때문에, 우리가 87년도까지 망월동 묘역 한 번을 못 갔어요……미안하고 죄스럽고 그래서……5·18 때문에 인생이 송두리째 바뀐 사람들이 광주에 많이 있어.……지금도 약을 안 먹으면 잠을 못 자는 사람들도 있고……나는 지금도 이발소 가면 머리를 내가 감아요……주인이 한번 물어보더라고 왜 그러냐고……아이, 그냥 내가 감는 게 편하고 그러니까 내가 감아요, 그러고 마는데……엎드려서 물만 이렇게 대도 무서우니까……눈 뜨고 엎드려서 내가 머리 감고 있어……아직도 기억은 생생하게 그대로 살아있으니까.
(인터뷰 중 걸려온 전화 속 친구) : 우리가 아파하는 만큼 그들은 안 아파해. 그런 얘기는 그만 하자 오월 얘기는 그만하자.
(당시 시민군 박인수 씨) : 나도 그러고 싶다……(깊은 한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