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에 대한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엄마 나도 위안부 될래"

영화 얘기를 시작하기 전에, 독자들에게 먼저 읽히고 싶은 몇 줄의 문장이 있다. 자신이 정치적으로 좌‧우 어디에 속한다고 생각하든, (얼마간의 심호흡을 하고) 가급적 인간이라면 대부분 가지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되는 ‘상식’에 준해, 이 문장들을 읽어봐줬으면 싶다.

꽃밭을 만들고 정원을 가꾸어 아름답게 가꾸어야 할 이 땅에 보기 흉한 소녀상을 전봇대처럼 많이 세우는 것은 위안부의 권익을 위한 것도 아니고 위안부의 명예를 위한 것도 아니다. 오로지 위안부를 정치적 앵벌이로 하여 대한민국의 이미지를 위안부의 나라로 인식되게 하는 해국행위를 뿐이다. 겨울이면 이 위안부 소녀들은 목도리와 스카프와 고급 담요로 치장된다. 이를 바라보는 여식 아이들은 “엄마, 나도 위안부 될래” “엄마 우리 할머니도 훌륭한 위안부였지?” 참으로 기막힌 정서가 자라난다. 대한민국 땅을 밟는 외국인들은 웬 한국에 위안부가 천지로 깔렸느냐며, 나이든 한국의 할머니들을 일본군 위안부 정도로 바라볼 수 있을 것이다.(뚝섬 무지개, p.509)

위안부 피해자들을 두고 “정치적 앵벌이”라느니 “고급 목도리와 스카프와 담요로 치장”한 소녀상이 우리 여식들에게 “엄마, 나도 위안부 될래” “엄마 우리 할머니도 훌륭한 위안부였지?”라는 반응을 불러일으킬 것이라느니 하는 저 끔찍한 말들의 주인, 그는 도대체 누구일까? 영화는 저 문장들의 주인이, 5·18 당시 찍힌 사진들에 대한 이른바 ‘기하학적 분석’(그는 마치 이 말이 분석의 과학성을 보증이라도 한다는 듯 기하학을 강조하지만, 정작 분석 내용은 얼굴 윤곽, 눈매, 골격, 면장갑 따위다)을 통해 ‘광수들’을 지명하는 장면과 함께 시작한다. 물론 그는 지만원이고 그 영화는 <김군>이다.

"역행하는 거지"

영화와 별 상관없는 저 문장들을 먼저 인용한 데에는 물론 의도가 있다. “인민군 원수 리을설이 지휘한 600명의 특수군이 광주 시민을 죽이고 군용 차량 공장을 부화뇌동하는 광주 양아치들을 몰고 다니면서 전형적인 게릴라 전투를 벌였다”. “그러므로 민주화 시위는 없었다”라고 서슴없이 말하고 다니는 이의 평소 사고 체계가 어떤 모양새인지 독자들에게 알려주고픈 마음도 없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보다는 이 영화가 애초부터 안고 가야 했던 어떤 위험 요소에 대해 말하고 싶었던 이유가 크다.

가령 이런 질문들이 떠오른다. 저런 정도의 정신을 가진(가지긴 했을까?)이의 언행에 일일이 대응하는 것이 필요할까? 아니 가능하기나 할까? (광적일 경우) 이데올로기란 원래 ‘틀리는 법’을 모르는 불사의 신념체계인 바, 제1 광수가 북한 특수군이 아니라 광주 시민이었음을 밝힌다 한들 지만원(들)이 수긍할 리 없고, 만에 하나 밝히지 못할 경우, 좋은 빌미 하나만 더해주는 꼴이 될 텐데 말이다. 가령 영화 속에서 김 군으로 제보되었던 전 시민군이 인터뷰 와중에 다소 격한 어조로 항의하는 점이 그와 같다.

기억 안 하고 싶은 걸 기억해버리면 잠을 못 자.

또 마찬가지야.

자네한테 이런 얘기하고 나면 난 또 오늘 저녁에 잠 못 자.

잠 재웠던 걸 다시 깨우는 거나 똑같은 거여.

이 사진 속의 사람을 찾는 것도 중요하지만, 역행하는 거지.

난 그걸 내버려둔다는 게 이해가 안 돼.

우리 스스로가 이놈을 찾아다니면서 이놈 스스로를 증명한다는 것도 이해가 안 돼.

똑같은 거 아닌가 그럼?

그래 이놈이 막 가짜라고 하니까

‘아니야, 이 새끼야 나는 진짜야 이 새끼야, 내가 사람 찾아갖고 와서 증거로 들이댈게.’

바꿔서 얘기하면 지금 그 얘기 아닌가?

다시 덧난 상처 속에서 말하므로 어눌하기 그지없지만, 저 항의의 참 요지는 이럴 것이다. 이미 공식적으로 민주화운동으로 명명되었고, 심지어 대통령이 헌법에 5·18정신을 기입할 것임을 공표하기조차 한 마당에, 저런 비상식적인 인사들의 도발에 일일이 응대한다는 것 자체가 당사자들로서는 상처고 모욕이 될 수 있다는 것.

"나도 그러고 싶다"

그러나 강상우 감독의 제1 광수 찾기는 시작되었고 영화는 진행된다. 감독은 제1 광수가 찍힌 몇 장의 사진을 들고 그의 행적을 추적해나간다(그래서 이 영화의 구조는 마치 <욕망>(1966)의 토마스가 몇 장의 필름들을 늘어놓고 살인 사건을 추리하는 장면을 연상케 한다). 그러나 아니나 다를까, 광수 1호를 찾으려는 감독의 노력은 점점 미궁에 빠지기 시작한다.

첫째 이유는 물론 세월 때문이다. 영화 속 인터뷰들이 진행되던 때는 이미 1980년으로부터 35년도 넘은 시점, 시민군들은 늙었고 그 때의 기억은 많이들 마모되어 있다. 게다가 당시 그들은 서로를 이름으로 불러본 적조차 없다. 이유는 그럴 필요도 없었고(상황이 다급했으므로), 그래서도 안 되었기(서로에게 위험했으므로) 때문이다. 그랬으니 매서운 눈매에 강단진 턱을 가졌고, 방석모와 마스크로 무장한 트럭 위의 한 사내를 알 리 없고, 설사 알았더라도 그를 누구라고 지명하기는 불가능하다.

러나 그것이 오로지 세월과 익명 때문이기만 했을까? 가령 이런 말들을 듣다 보면 어쩌면 그들은 그때의 기억으로부터 스스로를 방어하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든다.

(당시 김○○ 씨의 죽음을 목격한 시민군 최진수 씨) : 그 눈, 관자놀이에 총을 대고……바로 쏘고 쓰러졌을 때……그때 그 눈을 봤던 것 같습니다. 23일 날 전날 강인했던 눈……그래서 아 그 친구가 이렇게 쓰러지는구나……그 친구 대신에 그러니까 제가 산 거죠……제가 먼저 나갔으니까 툇마루에서 먼저 발을 내딛었으면 제가 먼저 죽었을 텐데……그 생각만 저는 수십 년 동안 하고 삽니다.(말하는 내내 입술이 떨린다)

(당시 시민군 최영철 씨) 우리가 살아남았다는 것 그걸로서, 우리가 살아남은 자의 죄책감 때문에, 우리가 87년도까지 망월동 묘역 한 번을 못 갔어요……미안하고 죄스럽고 그래서……5·18 때문에 인생이 송두리째 바뀐 사람들이 광주에 많이 있어.……지금도 약을 안 먹으면 잠을 못 자는 사람들도 있고……나는 지금도 이발소 가면 머리를 내가 감아요……주인이 한번 물어보더라고 왜 그러냐고……아이, 그냥 내가 감는 게 편하고 그러니까 내가 감아요, 그러고 마는데……엎드려서 물만 이렇게 대도 무서우니까……눈 뜨고 엎드려서 내가 머리 감고 있어……아직도 기억은 생생하게 그대로 살아있으니까.

(인터뷰 중 걸려온 전화 속 친구) : 우리가 아파하는 만큼 그들은 안 아파해. 그런 얘기는 그만 하자 오월 얘기는 그만하자.

(당시 시민군 박인수 씨) : 나도 그러고 싶다……(깊은 한숨)

기억은 고통으로부터 주체를 방어하려는 경향이 있다. 기억도 쾌락원칙의 지배를 받는 바, 이때의 쾌락원칙이 꼭 즐거운 기억의 보존만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고통스런 기억을 부분적으로 삭제하거나 왜곡시킴으로써 주체로 하여금 불쾌를 피하도록 하는 것, 그것도 기억이 행하는 방어 기제다. 그러니까 일종의 외상후 부분적 기억상실증 같은 것들……

영화에 등장하는 인터뷰이들이 사태를 정확히 기억해내지 못하는 이유는 아마도 그 기억이 너무 고통스러웠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그들이 자주 말을 더듬거나, 말 사이에 잦은 휴지와 단락이 생기거나, 한숨으로 다음 말을 대신한다거나 할 때가 많다는 사실도 마찬가지다. 지만원은 그들의 그런 말하기 방식을 두고 ‘횡설수설’이라고 표현하지만(그의 홈페이지 ‘시스템 클럽’에 실린 글 참조), 아마 타인의 고통에 대한 얼마간의 감수성이라도 가진 관객들이라면 바로 그 ‘말할 수 없는 고통 앞에서의 어눌함’이 (다큐멘터리임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를 오래 잊지 못하게 한다는 점에 동의할 것이다.

기억에 관한 한 이제 고전이 된 책 기억, 서사에서 오카 마리는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사건의 폭력을 현재형으로 하여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은 그러한 이유로 그 사건에 대해 이야기하는 말을 지닐 수 없는 것은 아닐까.” 만약 이 영화를 최소한의 인간애를 가지고 본 관객이라면 오카 마리의 이 말에 동의하지 않을 수 없을 줄 안다. 그들의 말보다는 차라리 그들의 침묵과 한숨과 떨리는 입술과 떨어뜨리는 시선 속에서 우리는 더 많은 말을 듣는다.

"김 군, 부재하는 현전"

그런 이유로, 김 군을 찾으려던 강상우 감독의 시도는 결국 실패로 끝났음에도 불구하고 영화가 실패하지는 않는다(지만원은 이 영화가 5·18 북한군 개입 사실을 계몽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고 비아냥거린다). 감독의 노력은, 상반되거나 미비하거나 모호한 증언들 속에서 다시 원점으로 돌아간다. 이강갑이 제1 광수인가? 그러나 그는 캘리버 기관총을 잡은 적도 없고, 오로지 한 장의 사진에서만 자신을 확인한다. 넝마주이 김 군이 제1 광수인가? 그러나 그는 5·18 이후 원지교 밑 천막에서 사라졌고, 다른 넝마주이들처럼 이제는 영영 행적을 알 수 없다. 최진수 씨가 죽음을 목격한 그 김모 씨가 제1 광수인가? 그러나 그의 시신은 공수단에 의해 파헤쳐졌고 어디에 묻혀 있는지 알 수 없다. 우리 앞에 제1 광수의 정체는 아직 드러나지 않았다.

그러나 김 군의 행방을 수소문하며 감독이 만난 많은 인터뷰이들로부터 우리는 많은 것들을 이미 들었다. 정확히는 그들이 말하고자 했으나 말하지 못한 것들, 말의 ‘잉여’로서의 표정과 침묵과 경련, 그것들로부터 더 많은 5·18을 들어버렸다. 우리가 들은 그 말의 요지는 이렇다. 5·18은 아직 진행 중이다. 김 군을 찾기 전까지 5·18은 끝난 것이 아니고, 양심 있는 자들은 그를 찾기 위해 더 많은 이야기들을 들어야 하리라. 광주를 기억한다는 일의 지난함에 대해, 그날의 기억이 아직도 광주시민들에게(그리고 우리들에게도, 심지어는 지만원들에게도) 안겨주고 있는 고통에 대해…….

영화 마지막 장면, 감독이 관객에게 요청하는 것도 그것인 듯하다. 불 꺼진 새벽, 구도청 건물의 모습이 롱테이크로 오래 시야에 들어온다. 그러고는 이내 누군가에 의해 하얀 철문이 열린다. 마치 우리더러 그 안으로 들어오라는 초대라도 되는 것처럼……. 이제 이 안으로 들어와 그 날들에 살아 있었던 김 군의 모습을 당신이 찾아보라고 권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아, 그 전 장면도 있다. 김 군일 수도 있고 김 군의 마지막을 목격한 목격자들일 수도 있는 세 사람이 모인다. 최진수, 최영철, 이강갑, 그들의 해후는 38년 만이다. 그러나 간단한 눈짓으로도 서로를 알아본다. 얼마 동안의 인사 후, 그들은 말없이 스크린을 응시한다. 강상우 감독은 이 장면으로 무슨 말을 하고 싶었던 걸까?

잘 모르겠다. 그러나 찾지 못했으나 분명히 존재했던 김 군이 그들을 다시 만나게 했다는 사실은 기억해야 한다. 부재하는 현전, 실체 없는 효과로서의 김 군, 그는 아직 어디 있는지 알 수 없지만, 오히려 존재하지 않음으로써 그 많은 증언들을 듣게 하고 38년 만에 세 동지들을 만나게 했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는 없을 듯하다.


저자 | 김형중

1968년 광주에서 태어나 전남대학교 영문학과를 졸업하고 동대학원 국문학과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2000년 문학동네신인상 평론 부문에 당선되어 문단에 나왔다. 평론집 《켄타우로스의 비평》 《변장한 유토피아》 《단 한 권의 책》 《살아 있는 시체들의 밤》 《후르비네크의 혀》 등과 에세이 《평론가 K는 광주에서만 살았다》가 있으며, 소천비평문학상(2008), 팔봉비평문학상(2017)을 수상했다. 현재 조선대학교 국문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