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고은의 신작 <유열의 음악앨범>이 개봉 이후 쭉 박스오피스 1위 자리에 머물고 있다. 오랜 시간 만남과 헤어짐을 반복하며 성장하는 청춘 남녀의 사랑을 담은 로맨스. 김고은은 현실에 발 붙인 채 안정적인 삶을 살길 원하는 미수를 연기했다. 그녀의 초기 필모그래피에서 찾아볼 수 있는 피비린내 나는 캐릭터들과 정반대 지점에 선 캐릭터를 연기했다는 점이 인상 깊다. 데뷔부터 지금까지, 김고은은 미세하게라도 다른 장르와 캐릭터에 도전하며 연기의 폭을 넓혀왔다. 또래 배우들의 필모그래피에선 찾아보기 어려운 미개척지의 캐릭터에 도전해왔던 김고은. 장르 탐험가라고 불러도 좋을 그녀의 필모그래피 속 캐릭터들을 장르별로 구분해봤다.


멜로

<은교> 2012

한은교 역

은교가 ‘김고은을 위한 캐릭터’라는 사실에 동의하지 않는 자가 얼마나 될까. 몇 편의 단편영화가 경력의 전부였던 김고은은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한 <은교>의 은교 역에 캐스팅되며 단숨에 충무로가 주목하는 라이징 스타로 떠올랐다. 하얗고 가느다란 몸으로 이적요(박해일)의 집안 곳곳을 통통 뛰어다니며 제 흔적을 남기던 소녀. 햇살을 온몸으로 받으며 흔들의자에 기대앉아 낮잠을 청하던 은교의 모습은 곧바로 신인 김고은의 인장이 됐다. 맑고, 싱그럽고, 천진하면서도 도발적인 소설 속 은교의 입체적인 매력을 그대로 스크린에 살려내는 데 성공한 김고은은 그해 국내 시상식의 모든 신인상을 휩쓸며 충무로 중앙에 성큼 발을 디뎠다.


스릴러

<몬스터> 2014

복순 역

<은교>로 눈부신 데뷔를 치른 김고은의 차기작에 관심이 쏠린 건 당연한 일. <은교> 이후 1년 동안 학교생활에 전념하며 숨을 고른 김고은은 스릴러 <몬스터>를 차기작으로 선택했다. <몬스터>에서 연기한 복순은 은교와 정반대 지점에 선 캐릭터다. 약간 모자라지만 제대로 건드리면 큰일 나는 동네 미친 여자. 동생을 죽인 연쇄살인범 태수(이민기)에게 복수의 칼날을 가는 복순에게 포기란 없다. 본능 빼면 시체인 복순은 자신보다 훨씬 강한 상대에게 끝까지 맞서며 거침없이 욕을 쏟아내고 제 몸을 날린다. 말투부터 몸짓까지, 예사롭지 않은 복순으로 완벽히 변신한 김고은은 곧바로 은교의 굴레를 떨쳐내는 데 성공했다.


범죄 드라마

<차이나타운>, 2014

일영 역

우리가 처음 본 김고은의 차갑고 건조한 얼굴. <차이나타운>에서 김고은이 연기한 일영은 지하철 보관함 10번에 버려져있었단 이유로 ‘일영’이란 이름을 얻는다. 차이나타운의 지배자, 엄마(김혜수)의 손에 거둬진 일영이 살 수 있는 방법은 엄마에게 쓸모 있는 존재가 되는 거다. 착실히 제 몫을 다하던 일영이 변하기 시작한 건 차이나타운 바깥의 석현(박보검)을 만나고부터. 난생처음 사는 이유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한 일영은 자신이 원하는 세계가 엄마의 세계가 아닐 수도 있음을 깨닫는다. 비정하고 쓸쓸한 여성들의 누아르라는 점에서 주목을 받았던 <차이나타운>은 애초부터 김고은을 위해 쓰인 시나리오였다. 한준희 감독은 “처음 시나리오를 쓸 때부터 김고은이란 배우를 염두에 두고 썼다” “고은 씨는 모두를 설득할 수 있는 탁월한 재능을 지녔더라”라며 김고은에 대한 신뢰감을 밝힌 바 있다.


무협 액션

<협녀, 칼의 기억>, 2015

홍이 역

<차이나타운>보다 먼저 촬영했으나 개봉이 늦어진 <협녀, 칼의 기억> 역시 김고은의 대담한 선택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고려 말 ‘칼의 시대’, <협녀, 칼의 기억>은 왕이 되고자 하는 욕망에 의를 나눈 형제와 사랑하는 이를 배신한 유백(이병헌)과 그의 배신으로 눈을 잃고 복수를 다짐하는 월소(전도연), 죽은 아버지의 원수를 갚기 위해 복수만을 바라보며 살아온 홍이(김고은)의 이야기를 다룬다. 대중성과 거리가 먼 무협 장르를 택한 그녀의 신선한 도전만으로도 큰 의미를 지닌 작품. 이병헌과 전도연, 대선배들과 함께해도 지지 않는 그녀의 존재감을 확인할 수 있다.


법정물

<성난 변호사>, 2015

진선민 역

<성난 변호사>에서 김고은은 대한민국 최연소 타이틀을 단 여성 검사 진선민을 연기했다. 까칠함으로는 충무로 최고인 이선균과 호흡을 맞춘 작품. 때때로 이선균과 맞먹거나 그보다 더한 까칠함을 뽐내는 김고은의 색다른 매력을 확인할 수 있다. 법정물을 상상할 때 흔히 떠올릴 수 있는 캐릭터들과 같이, 김고은 역시 지적이고 당돌한 진선민을 통해 배우로서 이미지의 폭을 넓혔으나 연기력으로 호평을 얻는 데엔 실패했다. ‘아빠 옷을 입은 것 같다’는 등 그녀의 연기가 어색했다는 누리꾼들의 평이 쏟아졌고, 김고은은 한동안 연기력 논란에 시달려야 했다.


캠퍼스 로맨스

<치즈인더트랩>, 2016

홍설 역

방영 전 우려를 연기력으로 싹 날려버린 작품, 드라마 <치즈인더트랩>이다. 드라마 원작인 동명 웹툰이 워낙 두터운 팬층을 지니고 있었던 터라 캐스팅 때부터 떠들썩한 화제를 모았던 바. 원작 속 홍설과 닮지 않은 외모로 도마 위에 올랐던 김고은은 자연스러운 연기력으로 저만의 홍설을 탄생시키는 데 성공, 외모가 싱크로율의 전부가 아님을 입증했다. 김고은의 로맨스 장인 떡잎을 확인할 수 있었던 작품이기도 하다. 김고은은 이 작품으로 제52회 백상예술대상 TV부문 여자신인연기상을 수상했다.


가족 드라마

<계춘할망>, 2016

혜지 역

<계춘할망>에선 12년 만에 잃어버린 가족의 품에 안긴 소녀 혜지를 연기했다. 할머니 계춘(윤여정)은 그녀에게 온갖 사랑을 베풀지만, 말 못 할 사연을 품고 있는 혜지는 과한 친절이 불편하고 난감할 뿐이다. 경계심과 의심으로 똘똘 뭉쳐있던 소녀가 할머니의 커다란 사랑을 온 마음으로 받아들일 줄 아는 손녀가 되기까지의 과정. 관객의 눈물샘을 자극하는 건 모두의 할머니를 떠올리게 만드는 윤여정의 연기 덕이지만, 그 보듬음 덕에 치유되고 성장하는 혜지의 내면 변화를 섬세하게 짚어낸 김고은의 연기 연기 충분히 인상 깊다. 김고은은 <씨네21>과의 인터뷰를 통해 “할머니는 내게 소울메이트 같은 존재다. (할머니와 함께 살면서 느끼는) 감정선들이 <계춘할망>에서 보여준 흐름과 너무 비슷했다”라 밝히며 작품에 대한 애정을 밝히기도 했다.


판타지 로맨스

<도깨비>, 2016

지은탁 역

이제 그녀의 대표작이 된 작품. <도깨비>는 불멸의 삶을 끝내기 위해 인간 신부가 필요한 도깨비(공유)와 그의 앞에 도깨비 신부, 은탁(김고은)이 나타나며 벌어지는 일을 담은 판타지 로맨스다. 로맨틱 코미디의 대가 김은숙 작가와 히트작 메이커 이응복 감독이 뭉쳤다는 이유만으로도 방영 전부터 화제를 모은 작품. 그들의 새로운 뮤즈로 발탁된 김고은에게 세간의 관심이 쏠렸음은 물론이다. 그간 어두운 역을 주로 맡아왔던 터라 시청 전 대중들의 걱정이 많았던 것 역시 사실. 이 모든 부담을 딛고 김고은은 시청자들이 기대한 것 이상의 몫을 해내는 데 성공했다. 짓궂고 귀여운 모습에서부터 코믹 연기, 절절한 멜로까지 문제없는 김고은의 연기 스펙트럼을 입증한 작품. 모든 순간 찬란하게 빛나는 김고은을 만날 수 있는 작품이다.


청춘 드라마

<변산>, 2017

선미 역

6년 차 무명 래퍼 학수(박정민)가 고향 변산에 돌아오며 벌어지는 이야기. 이준익 감독의 <변산>에서 김고은은 학창시절 학수를 짝사랑했던 그의 동창, 선미 역으로 등장한다. 오랜만에 만난 두 사람 사이 지우고 싶었던 흑역사가 떠오르고, 그로부터 회피하고 싶은 학수는 그저 하루빨리 서울로 올라가고 싶어 한다. 과거의 자신과 정면으로 마주하고 화해하며 한 단계 성숙해지는 과정. 이준익 감독은 선미는 학수를 성숙의 과정으로 나아가게 하는 인물이라고 설명했다. 그녀가 던지는 따끔한 대사가 가슴에 콕 박힌 건 학수뿐만이 아니었을 것. “너는 정면을 안 봐, 값나가겐 살진 못해도 후지게 살진 말어”란 선미의 대사엔 <변산>이 말하고자 하는 핵심이 담겼다.


감성 로맨스

<유열의 음악앨범>, 2019

미수 역

정지우 감독은 김고은의 데뷔작과 최근작, <은교>와 <유열의 음악앨범>의 연출을 맡았다. 그는 김고은에 대해 “호기심으로 똘똘 뭉친 아이에서 어느새 고민 많은 어른이 됐다. 그 모습이 이번 영화에 너무 잘 어울릴 것 같았다”고 설명했다. 감독의 말처럼, <유열의 음악앨범>은 호기심 많던 학생 시절부터 고민 많은 어른이 되기까지의 미수의 10년을 녹여낸 김고은의 자연스러운 연기가 돋보이는 작품이다. 스마트폰도 SNS도 없었던 시절, 사랑의 타이밍을 우연과 필연에 기대는 90년대의 미수는 망설임과 기다림이 가득한 얼굴로 사랑을 표현한다. 긴 세월 동안 차곡차곡 쌓인 감정의 무게를 담아내는 김고은의 성숙한 얼굴을 만날 수 있는 작품. 드라마 <도깨비> <치즈인더트랩> 등 전작을 통해 선보였던 로맨스의 얼굴과 또 다른 색다른 매력을 펼쳐낸 작품이라는 점이 인상 깊다.


차기작

뮤지컬 영화 <영웅>

판타지 로맨스 드라마 <더 킹: 영원의 군주>

차기작 역시 기대할 수밖에 없는 대작들이다. 현재 준비하고 있는 작품은 윤제균 감독의 <영웅>. 안중근 의사의 삶을 다룬 동명의 뮤지컬을 원작으로 한 최초의 한국형 뮤지컬 영화다. 김고은은 명성황후의 죽음을 목격한 조선의 마지막 궁녀 설희를 연기한다. 일본의 주요 정보를 수집, 독립운동을 지원하는 강인한 캐릭터다. 2020년 방영 예정인 드라마 <더 킹: 영원의 군주>로도 시청자들을 찾을 예정이다. <도깨비>에서 호흡을 맞춘 바 있던 김은숙 작가의 신작. 평행세계인 대한민국과 대한제국을 배경으로, 차원의 문을 닫으려는 이과형 대한제국 황제 이곤과 누군가의 삶과 사랑을 지키려는 문과형 대한민국 형사 정태을이 두 세계를 넘나들며 벌어지는 일을 담는다. 김고은이 형사 정태을을 연기하고, 이민호가 황제 이곤을 연기한다.


씨네플레이 유은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