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장에서 나와 바로 O.S.T.를 검색해본 경험이 있나? 이런 영화들은 노래로 기억되곤 한다. 액션, 스릴러, 애니메이션 등 다양한 장르의 작품들이 개성 강한 음악으로 승부수를 두지만, 그중에서도 감성 수치 높이는 영화와 명곡의 만남은 여운을 오래 남긴다. 환상 선곡으로 관객의 마음을 두근두근하게 만들었던 감성 만점 영화들을 한자리에 모았다.
덧. 영화와 노래를 언급할 때 빠질 수 없는 <겨울왕국>의 ‘렛 잇 고’(Let it Go)처럼, 영화와 함께 제작된 O.S.T. 음반이 유명한 경우는 포함하지 않았다. 여기 소개하는 것들은 기존 노래가 영화에 삽입된 경우다. 또 이 리스트에 넣으면 반칙인 장르, 음악영화 역시 제외했다는 사실을 미리 알린다.
유열의 음악앨범
♬ 콜드플레이 ‘픽스 유’(Fix you), 핑클 ‘영원한 사랑’, 루시드폴 ‘오, 사랑’ 등
제목답게 ‘음악 맛집’인 영화, <유열의 음악앨범> 속 미수(김고은)와 현우(정해인)는 세 번쯤 만나고 헤어진다. 서로의 앞에 당당히 나서지 못하는 이들의 사연은 각자의 상황에 걸맞은 음악을 만나 더 애틋해진다. 다시 만난 미수와 현우가 사랑을 싹 틔울 때 흐르는 핑클의 ‘영원한 사랑’, 현우의 감정이 최고조에 다다랐을 때 그를 다독이는 듯한 느낌을 전하는 루시드폴의 ‘오 사랑’, 관객의 가슴마저 벅차오르게 만드는 콜드플레이의 ‘픽스 유’까지. 모두 1994년부터 2005년까지의 가요, 팝송 등 300곡 정도의 플레이리스트를 놓고 스탭과 배우가 머리를 맞댄 끝에 선택한 음악들이다. 충분히 공감을 얻을만한 미수와 현우의 사연, 그의 맞춤형 신청곡 같은 노래들로 구성된 영화는 보이는 라디오 프로그램을 듣는 듯한 느낌을 전한다.
건축학개론
♬ 전람회 ‘기억의 습작’
<유열의 음악앨범> 이전에 <건축학개론>이 있었다. 건축학개론 수업에서 만난 음대생 서연(수지)에게 첫눈에 반한 승민(이제훈). 같은 동네에 산다는 걸 알게 된 두 사람은 함께 과제를 하며 서로에게 마음을 열어간다. 서울 시내가 내려다보이는 옥상. 서연은 승민에게 제 이어폰 한쪽을 내어준다. 그 순간 승민의 귓속을 가득 메운 전람회의 ‘기억의 습작’은 앞으로 그의 인생에서 영영 떨치지 못할 강렬한 기억이 된다. ‘기억의 습작’을 부른 김동률의 목소리가 극장 안을 가득 메운 순간, 관객 역시 저마다의 ‘기억의 습작’을 머릿속으로 떠올리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건축학개론>이 개봉한 2012년 거리 곳곳에선 18년 전 이 노래를 지겹도록 들을 수 있었다. 추억 속 노래의 힘이 이렇게 강하다.
클래식
♬ 자전거 탄 풍경 ‘너에게 난 나에게 넌’, 델리스파이스 ‘고백’, 김광석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음을’ 등
영화 속 한 장면을 떠올리는 것과 동시에 귓속에서 자동 재생되는 음악, 혹은 음악을 듣자마자 머릿속에 특정 장면이 연상되는 영화. 조승우와 손예진, 조인성의 20대 시절을 담은 영화 <클래식>이다. 과제 지옥 대학을 로맨스와 낭만의 장으로 착각하게 만들었던, 상민(조인성)과 주희(손예진)가 재킷을 쓰고 비를 피해 달리는 캠퍼스 신은 자전거 탄 풍경의 ‘너에게 난 나에게 넌’을 빼놓고 상상하기 어렵다. 델리스파이스의 다섯 번째 정규 앨범 타이틀곡이자 대표곡인 ‘고백’ 역시 <클래식>에 삽입되어 더 유명해졌다. 김광석의 명곡,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음을’은 지혜(손예진)와 준하(조승우)의 이별과 재회 장면에서 나지막이 울려 퍼진다. <클래식>은 영화 속 상황을 그대로 옮겨 적은듯한 음악들이 몰입도를 더 높인 작품이다.
접속
♬ 사라 본 ‘어 러버스 콘체르토’(A lover's concerto), 벨벳 언더그라운드 ‘페일 블루 아이즈’(Pale Blue Eyes)
앞서 소개한 영화들은 이 영화의 그늘에 있다. 영화만큼 삽입곡이 어마어마한 인기를 끈 영화로 <접속>을 빼놓을 수 없다. PC통신 접속을 통해 서로를 알아가던 수현(전도연)과 동현(한석규)을 이어준 음악, 벨벳 언더그라운드의 ‘패일 블루 아이즈’는 뒤늦게 한국에 소개돼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하지만 <접속>을 기억하게 만드는 음악은 따로 있었으니, 사라 본의 ‘어 러버스 콘체르토’다. 듣는 순간 당신을 종로 3가의 피카디리 극장 앞으로 소환할 음악. 한국 최초로 라이선스를 획득해 팝송을 실었던 <접속>의 O.S.T. 앨범은 70만 장 이상 판매되며 상업적으로도 성공을 거뒀다.
레옹
♬ 스팅 ‘셰이프 오브 마이 하트’(Shape of My Heart)
레옹(장 르노)이 떠난 후, 홀로 남은 마틸다(나탈리 포트만)는 그의 화분 속 식물을 넓은 땅에 옮겨 심는다. 그의 평안을 기리는 마틸다의 대사 위로 스팅의 ‘셰이프 오브 마이 하트’가 흐른다. <레옹>만의 쓸쓸한 정서와 여운이 배가 되는 음악이다. 현재까지도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고 있는 <레옹>은 개봉 당시에도 신드롬적인 인기를 끌었다. 배우와 감독의 인지도가 수직 상승했음은 물론, 명대사와 의상 등 영화를 이루는 각종 요소가 화제를 모았고, 음악도 예외는 없었다. <레옹>이 나오기 1년 전, 발표 당시 영국 싱글 차트 57위에 그쳤던 스팅의 ‘셰이프 오브 마이 하트’는 <레옹>을 통해 전 세계인의 귀에 각인되며 그의 대표곡으로 떠올랐다.
라붐
♬ 리처드 샌더슨 ‘리얼리티’(Reality)
영화에 관심 없는 사람도 한 번쯤은 봤을 레전드 명장면, <라붐>의 헤드폰 신이다. 친구들과 함께 디스코에 맞춰 춤을 추고 있었던 빅(소피 마르소). 마티유(알렉산드르 스텔링)가 그녀에게 헤드폰을 씌워준 순간, 빅은 단번에 마티유에게 마음을 뺏긴다. 모두가 정신없이 몸을 흔드는 파티장 한가운데에서 껴안고 춤을 추는 빅과 마티유. 수많은 이들은 배경일 뿐, 이 순간 빅의 세상에 존재하는 건 자신과 마티유뿐이다. 빅의 귓가에 울려 퍼지던 “꿈이 현실이 됐어요. 난 한밤중의 사랑을 꿈꾸고, 이 사랑은 완벽해 보여요”란 ‘리얼리티’의 가사와 함께 보면 더 완벽한 장면. <라붐>과 ‘리얼리티’는 소피 마르소의 어린 시절을 상징하는 영화와 음악이 됐다.
중경삼림
♬ 마마스 앤 파파스 ‘캘리포니아 드리밍’(California Dreaming), 왕정문 ‘몽중인’
뉴트로 열풍의 중심에 선 영화 <중경삼림>. 엽서로 인쇄하고 싶은 장면들, 한번 들으면 잊지 못할 명대사도 인상 깊지만, 역시 관객의 가슴을 쿵쾅쿵쾅 뛰게 만드는 건 이 영화의 음악이다. 경찰 633(양조위)이 모자를 벗으며 샐러드 가게에 들어서는 단조로운 장면이 명장면으로 남을 수 있었던 건 그 장면에서 함께 흘러나온 마마스 앤 파파스의 ‘캘리포니아 드리밍’ 덕분. ‘캘리포니아 드리밍’이 쩌렁쩌렁 울리는 가게에서 소리치듯 주문을 주고받던 경찰 633과 페이(왕정문)의 첫 대화 신 역시 잊을 수 없는 명장면이다. <중경삼림> 덕에 알려져 뒤늦게 주목받은 마마스 앤 파파스는 이미 은퇴한 상태였음에도 불구하고 1996년 내한 공연을 가지기도 했다. 주연 배우 왕정문이 직접 부른 ‘몽중인’도 빼놓을 수 없는 명곡. 경찰 633의 집에 자신의 물건을 들여놓으며 전 애인의 흔적을 지우던 페이를 비추던 장면과 엔딩 크레딧에 삽입된 곡이다. 원곡은 아일랜드 밴드 크랜베리스(The Cranberries)의 ‘드림스’(Dreams)으로, 왕정문이 그를 번안해 불렀다.
클로저
♬ 데미안 라이스 ‘더 블로워스 도터’(The Blower's Daughter)
사랑과 관계에 대한 냉소적인 질문을 던지는 <클로저> 역시 음악의 힘을 빼놓고 말할 수 없는 영화다. 데미안 라이스의 첫 앨범, <O>의 수록곡 ‘더 블로워스 도터’가 이 영화의 오프닝을 장식한다. 수많은 사람들 사이에서 서로를 발견한 앨리스(나탈리 포트만)과 댄(주드 로). 수없이 반복되는 노래 가사(I can’t take my eyes off you)처럼 그들은 서로에게서 눈을 떼지 못한다. 시퀀스가 마무리될 즘 이 영화의 첫 대사가 등장한다. “Hello, Stranger”(안녕, 낯선 사람). 서로에게 눈을 떼지 못했을 뿐, 진실한 마음은 보지 못하고 결국 친밀한 타인으로 남는 게 전부인 이들의 관계를 압축 요약한 장면이다. <클로저>의 공허하고 쓸쓸한 분위기를 배로 늘린 ‘더 블로워스 도터’는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았고, 그 덕에 데미안 라이스 역시 전 세계적으로 인지도를 높였다.
씨네플레이 유은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