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치 에너미는 Arch(아치)+Enemy(적)의 합성어로, 숙적으로 해석할 수 있다. 히어로 코믹스에서는 흔히 어떤 캐릭터와 대립되는 성향을 갖고 있고 악연으로 엮여 있는 캐릭터를 가리켜 서로의 아치 에너미라고 부른다.
배트맨의 대표적인 아치 에너미가 조커이고, 슈퍼맨의 경우 렉스 루터, 캡틴 아메리카에겐 레드 스컬이 있다고 할 수 있는데. 이들은 길고 긴 히어로 코믹스의 역사만큼이나 오랜 시간 동안 서로를 괴롭히며 성장해 왔다.
1) 너는 내 존재의 이유... 배트맨과 조커의 인연과 악연 사이
배트맨의 아치 에너미가 조커라는 것은 굳이 히어로물의 팬이 아니더라도 다들 잘 알고 있는 사실이다. 조커는 배트맨을 사랑하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아니 그냥 사랑한다)로 집요하게 고담시를 누비며 배트맨을 괴롭혀 왔다.
절대적인 질서와 불살을 지키는 히어로 배트맨과, 일관성이라곤 없는 혼돈 그 자체 조커의 관계는 여러 가지 이슈에서 다양한 방법으로 다루어졌는데, 이 중에는 조커가 배트맨을 죽이는 이야기도 있다. 바로 ‘고잉 세인(Going Sane)’ 스토리라인.
조커의 폭탄에 배트맨이 쓰러지자 조커는 배트맨이 죽었다고 생각하게 되는데, 정작 배트맨이 죽어 버리자 조커는 살아갈 이유를 찾지 못해 우울증에 걸려 버린다. 거기에 트레이드 마크인 웃는 얼굴을 지을 수 없게 되고 악당 생활을 청산하기까지 한다.
하지만 배트맨은 살아 있었고, 일련의 과정을 거쳐 조커를 찾아 돌아온다. 배트맨과 마주하자마자 잊고 지냈던 조커로서의 인격이 살아 돌아오게 되고 다시 조커와 배트맨의 기나긴 악연이 시작된다는 이야기.
이 이슈를 보면 배트맨이 있기에 조커가 있고 조커가 있기에 배트맨이 있다는, 히어로가 있어서 빌런이 존재한다는 슬픈 모순점을 찾아볼 수 있다. 다른 히어로에게도 그렇겠지만 배트맨과 조커이기에 이런 아이러니가 더욱 적나라하게 드러났다고 할 수 있을 듯.
2) 슈퍼맨이 없었다면 위인이 되었을지도 모를 남자 렉스 루터
렉스 루터는 DC코믹스에 등장하는 빌런들 중에서도 가장 강력한 존재감을 차지하고 있는 캐릭터다. 뛰어난 신체능력이나 초능력 하나 없이, 타고난 두뇌와 자수성가로 이룩한 재력이 전부인데(사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이거면 된 거 아닌가 싶기도 하고) 강력한 파워 없이도 슈퍼맨을 관광 보내는 데 탁월한 재능을 발휘한다는 게 포인트.
DC코믹스의 극 초반 시절부터 슈퍼맨과 함께한 렉스 루터인지라 시간의 흐름에 따라 머리도 빠지고(...) 캐릭터 설정도 여러 번 변경됐지만, 철두철미한 계획에 의해 히어로들을 상상도 못한 곤경에 빠뜨려 왔다는 점만은 일관적이다.
조커와 비슷한 듯 보이지만 완전히 다른 캐릭터이기도 하다. 조커가 혼돈 악의 대표적인 캐릭터라면 렉스 루터는 질서 악의 대표주자 격으로, 자기가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잘 알고 있으며 거기에는 합당한 근거마저 있다. 이런 특성 때문에 ‘다크사이드 워’ 이슈에서는 새로운 슈퍼맨의 행보를 보여주기도 했으며 히어로로서 저스티스 리그의 일원으로 활동하기도 했다는 사실.
최근 영화에서는 수많은 DC 팬들의 공분을 불러일으킨 주범이기도 했다. 렉스 루터가 갖고 있는 존재감과 캐릭터 특성은 어디 두고 원작의 매력이 사라져 버렸다는 게 중론인데… 실제로 렉스 루터 역을 맡은 배우 제시 아이젠버그는 인터뷰에서 원작을 읽지 않았다고 말하기도 했으니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애초에 잭 스나이더 감독이 원작 기반의 영화를 만드는 데 관심이 없었던 것 같다.
3) 죽이고 싶은데 죽일 수 없는 사이, 아쿠아맨을 괴롭히는 블랙 만타
영화 <아쿠아맨>에서도 등장해 강렬한 포스를 보여줬던 캐릭터 '블랙 만타' 역시 별다른 초능력은 없는 평범한 인간이다. 하지만 아쿠아맨에게 있어서는 블랙 만타만큼 그를 괴롭힌 존재가 아예 없는 수준이고, 메라와의 사이에서 얻은 아들을 죽여 버린 적도 있어 철천지원수 그 이상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블랙 만타가 아쿠아맨에게 정도 이상의 증오를 품게 된 계기는 이슈마다 조금씩 다른데, 최초 설정에서는 도움을 외치는 자신을 발견하지 못하고 그냥 지나친 아쿠아맨을 죽이겠다고 결심하게 된 것이 시작이었다. 뉴 52 이후의 설정은 아쿠아맨이 블랙 만타의 아버지를 죽이는 바람에 아버지의 원수에게 복수하겠다는 일념을 품게 된 것이었고 영화에서도 이 설정을 차용했다.
아틀란티스인인 아쿠아맨과 호각으로 싸운다는 것만으로도 블랙 만타의 능력은 대단하다고 할 수 있는데… 성능이 탈과학급이기는 하지만 잠수 장비와 무기만으로도 같은 아틀란티스인 메라는 물론이고 아쿠아맨까지 죽일 수 있는 상황으로 끌고 갈 수 있는 강력함의 소유자다.
무자비하기 그지없는 것도 특징으로, 자기 손으로 아쿠아맨의 아들을 죽이고도 가족의 안부를 묻질 않나 본인의 자식에게도 막말을 서슴지 않는 모습을 보이질 않나 하여간 옆에 두기 너무 싫은 타입이라는 것은 확실해 보인다. 영화 쪽에서는 만타와의 대결이 메인 스토리라인은 아니었기 때문에 비중이 아주 크지는 않았지만, 다음 영화에서는 만타가 아쿠아맨을 괴롭히는 모습을 더 많이 만나볼 수 있을 듯.
4) 슈퍼솔져 혈청의 성공과 실패 사례, 캡틴 아메리카의 극명한 대조점 레드 스컬
마블코믹스의 터줏대감이자 대표 캐릭터 캡틴 아메리카와 오랜 악연을 자랑하는 캐릭터는 바로 레드 스컬이다. 국내에서는 흥행 성적이 그다지 좋지 못했지만, MCU 캡틴 아메리카의 기원에 대해 디테일하게 다룬 영화 <퍼스트 어벤저>에서의 첫 등장 이후 <어벤져스: 인피니티 워>에서 모습을 드러내기도 했던 레드 스컬.
기원 자체는 캡틴 아메리카와 같은데, 어스킨 박사가 만들어낸 슈퍼 솔저 혈청을 투여받은 요한 슈미트가 초인적인 능력을 갖게 된 점이 동일하다. 하지만 어스킨 박사는 앞서 요한 슈미트가 레드 스컬로 변모하는 과정을 목격한 후 혈청이 피험대상 내면의 성향까지 극대화하는 효과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혈청이 불안정해서이기도 했지만(그래서 레드 스컬은 얼굴이 말 그대로 '붉은 해골'처럼 녹아내려 버렸기도 하고), 악당을 탄생시켰다는 것 때문에 어스킨 박사는 다음 슈퍼 솔저를 고르는 기준으로 체력이나 외적 조건 대신 선량함과 정의로움을 높이 샀던 것이다. 같은 혈청에 의해 탄생한 히어로와 빌런이기 때문에… 레드 스컬은 캡틴 아메리카에게 형제라고 부른 적도 있다(물론 캡틴은 극혐했다).
하이드라로 대표되는 레드 스컬과 그의 조직은 캡틴 아메리카를 다양한 방식으로 괴롭혀 왔는데, 최근 가장 이슈가 되었던 캡틴 아메리카의 하이드라 합류 역시 레드 스컬의 음모였다. 코스믹 큐브라는 현실 조작이 가능한 물건을 통해 캡틴 아메리카를 조종한 것.
영화에서는 <퍼스트 어벤저>의 마지막 장면에서 태서랙트에 흡수된 듯했으나 사실은 소울 스톤이 잠들어 있던 행성 보르미르에서 저주를 받은 채 살아가고 있었다. 워낙 오랜만이었던 데다가 배우도 변경되었고(원래 배역을 맡은 휴고 위빙이 레드 스컬 가면 분장에 너무도 괴로워했다는 후일담이 있다), 영화 흥행 저조 탓도 있어 알아보는 관객이 그리 많지는 않았다는 게 비극이라면 비극이었다.
5) 안 그래도 고통받는 피터를 괴롭히는 악당 중 악당, 노먼 오스본
고통받고 불행에 빠져 사는 게 매력이 되어버린 불쌍한 캐릭터가 바로 스파이더맨이지만, 노먼 오스본의 경우에는 좀 더 문제가 복잡하다. 아들인 해리 오스본이 피터 파커와 오랜 친구인 데다가 그린 고블린이 아닌 노먼 자신으로서는 피터에 대해 애정도 있는 인물이기 때문.
처음에는 대기업 오스코프 사를 이끄는 사업가였지만, 연구소에 있던 고블린 혈청이 실험 중 사고로 오스본에게 영향을 끼치면서 이중인격을 지닌 최악의 악당으로 거듭나고 만다.
굴지의 대기업인 오스코프의 수장이란 점에서 재력은 물론이고 사업 수완과 정치력도 엄청난 수준인데, 고블린 혈청의 영향에 강철 수트와 글라이더까지 갖출 건 다 갖춘 캐릭터라고 할 수 있다. 사실 가질 건 다 가졌는데, 혈청 사고만 없었다면 피터의 중요한 조력자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코믹스에서는 스파이더맨의 여자친구였던 그웬 스테파니를 임신시킨 전력도 있으며(물론 이슈가 공개되자마자 엄청난 반론과 파란이 일었다) 시작부터 현재까지 꾸준히 등장해 스파이더맨에게 집착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스파이더맨의 빌런 팀 시니스터 식스의 멤버들이 흔히 다들 그렇긴 하지만, 스파이더맨의 소중한 존재들을 무자비하게 앗아간 이력 덕분에 가장 강력한 아치 에너미로서의 역할을 공고히 하고 있다.
소개한 캐릭터 외에도 서로를 괴롭히는 아치 에너미들은 무수히 많다. 형제임에도 불구하고(이복동생이지만...!) 끊임없이 토르를 괴롭히는 로키도 그렇고, 원더우먼을 집요하게 따라다니는 치타 역시 그렇다.
정의 구현과 세계 평화를 목표로 하는(물론 캐릭터마다 다양한 차이가 있다) 히어로들과, 그들과 극명하게 대비되는 빌런들의 이야기는 히어로 코믹스와 영화에서 다루어지며 단순한 선악구도가 아닌 다양한 양상을 보여주고 있는데.
아치 에너미로 등장하는 두 캐릭터의 갈등과 대립은 다채로운 양상을 나타내며 팬들을 즐겁게 해 준 바 있다. 슈퍼히어로 무비들이 대체로 일회성 빌런이 다수 등장하는 편이기는 하지만, 히어로 무비도 정점에 오른 만큼 아치 에너미들의 활용을 통해 좀 더 장기적이고 깊이 있는 서사를 보여줄 수 있기를 바라본다.
PNN 에디터 희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