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사상 최고의 여성 전사 캐릭터로 손꼽히는 린다 해밀턴의 사라 코너가 <터미네이터> 초기작들의 적통을 이어받은.<터미네이터: 다크 페이트>로 돌아왔다. 사라 코너를 서포트 하는 또 다른 여성 캐릭터 그레이스(맥킨지 데이비스)와 대니(나탈리아 레이즈)까지 합세해 여성과 액션이라는 연결고리가 더 두드러진다. 2000년대를 수놓은 여성 액션 캐릭터들을 소개한다.


라라 크로포트

안젤리나 졸리

<툼 레이더> 1,2

(2001, 2003)

이미 <처음 만나는 자유>로 아카데미 조연상을 받았지만, 안젤리나 졸리가 세계적인 스타로 발돋움 하게 된 건 1996년 영국에서 발표된 게임 <툼 레이더>를 영화화 한 작품에서 주인공 라라 크로포트를 연기하면서부터다. 우선 싱크로율부터 합격. 구릿빛 피부와 도톰한 입술, 육감적인 몸매까지. 머리를 바짝 묶은 졸리는 라라의 현현 같았다. 다만 영화 자체는 좋은 평가를 받지 못했다. 이야기가 엉성한 건 물론, 라라 역시 쌍권총을 쏴대며 공중을 날아다니는 단순한 캐릭터로 그러졌다. 졸리는 <툼 레이더 2>로 당시 할리우드에서 가장 높은 출연료를 받는 여성 배우로 등극했다. 졸리는 툼 레이더를 촬영하면서 캄보디아의 실상을 목격한 이후 세계의 인권 문제에 대한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했다.


앨리스

밀라 요보비치

<레지던트 이블> 시리즈

(2002~2016)

<레지던트 이블>은 일본의 게임 <바이오 하자드>(미국판 제목이 '레지던트 이블')를 영화한 작품이다. 뤽 베송과 함께 <제5원소>와 <잔다르크>를 작업하면서 액션 스타의 이미지를 구축했던 밀라 요보비치가 주인공 앨리스 역에 캐스팅 됐다. 영화는 게임에서 기본적인 설정만 가져왔을 뿐 거의 완전히 다른 이야기를 펼치고 있는데, 요보비치가 연기한 앨리스 역시 원작 게임에선 등장하지 않은 캐릭터다. 아슬아슬한 빨간 드레스만 입은 채 좀비 소굴을 빠져나려고 애쓰지만, 세계 전역에 좀비 바이러스가 퍼지면서 쌍권총에 샷건에 기관총까지 차고 세상을 구한다. LA를 배경으로 하는 4편에 이르면 방탄조끼를 입고 일본도를 휘드르기까지 한다. <레지던트 이블> 시리즈는 SF 액션영화 치고 저예산으로 제작되어 상대적으로 높은 수익률을 기록하면서 6편이 제작돼 장수 시리즈의 명맥을 이어왔다.


셀렌

케이트 베킨세일

<언더월드> 시리즈

(2003~)

<언더월드>는 <레지던트 이블>과 접점이 많은 프랜차이즈다. 여성 전사 캐릭터를 원톱으로 내세워 그리 높지 않은 제작비로 준수한 흥행 성적을 거둬 십수 년간 시리즈가 이어지고 있다. <언더월드>의 주인공 셀렌은 <진주만>과 <세렌디피티> 등으로 한창 주가를 올리던 케이트 베킨세일이 연기했다. 액션과는 거리가 먼 이미지였기에 캐스팅에 놀라는 반응이 많았다. 늑대인간에게 부모를 잃은 줄 알았던 셀렌은 원로 뱀파이어 빅터의 보호 아래 늑대인간 사냥꾼 '데스 딜러'의 일원으로 성장한다. 우성 뱀파이어 유전자를 물려받아 월등한 전투력에 쌍권총으로 모두 명중시킬 만큼 테크닉도 뛰어난데, 시리즈를 거듭하며 뱀파이어임에도 불구하고 태양에 내성이 생기는 등 점차 무적화 된다. 베킨세일은 첫 번째 <언더월드> 다음에 출연한 <반헬싱>에선 뱀파이어와 싸우는 인간을 연기했다.


더 브라이드

우마 서먼

<킬 빌> 1,2

(2003, 2004)

블랙스플로테이션의 전설적인 여성 배우 팸 그리어를 위한 영화 <재키 브라운>을 발표한 쿠엔틴 타란티노는 6년 만에 신작 <킬 빌>을 내놓았다. 전작과 마찬가지로 <킬 빌> 역시 한 명의 여성 캐릭터를 원동 삼아 작동하는 영화다. 타란티노에게 국제적인 명성을 안긴 <펄프 픽션>에서 아이코닉한 이미지를 남긴 우마 서먼이 주인공 블랙 맘바/더 브라이드에 캐스팅 됐다. 브라이드는 한때 최고의 킬러였지만 보스인 빌이 아닌 다른 이와 결혼했다는 이유로 총을 맞고 4년 만에 혼수 상태에서 깨어나 복수를 다짐한다. 온갖 무술영화에 오마주를 바친 영화답게 정교한 액션들이 펼쳐지는데, 우마 서먼은 1편에선 사무라이 검으로 적들을 베어나가고, 2편에선 쿵푸로써 복수의 종착지를 향해 간다. <킬 빌>의 여정은 복수를 위한 길인 한편, 뱃속에 품고 얼굴 한번 보지 못한 딸을 품에 안기 위한 과정이기도 하다. 서먼의 존재는 비단 쭉쭉 뻗은 몸으로 무술을 소화하는 것뿐만 아니라, 피붙이를 향한 모성애를 담아내는 데에서도 빛을 발한다.


엘라스티 걸

홀리 헌터

<인크레더블> 1,2

(2004, 2018)

애니메이션과 히어로 무비 두 갈래에서 최고의 작품으로 손꼽히는 <인크레더블>은 작년 여름, 14년 만에 속편이 보태졌다. <인크레더블>의 테마가 가족이었다면, <인크레더블 2>는 여성이라는 키워드에 초점을 맞췄다. 할리우드는 물론 문화계 전반에 부는 페미니즘에 대한 뜨거운 반응을 반영이라도 하듯, 2편의 주인공은 엘라스티 걸이다. 가족 유니폼을 입고 악당을 무찔렀던 엘라스티 걸은 EG 로고가 박힌 자신의 유니폼을 입고 홀로 활약하면서 '강하고 똑똑한 여성'의 표상을 유감 없이 보여준다. 무지막지하게 힘만 센 미스터 인크레더블과 달리 엘라스티 걸은 마음껏 형태를 바꿀 수 있는 신체와 주변의 환경을 적극 활용하는 민첩한 대처 능력까지 갖췄다.


블랙 위도우

스칼렛 요한슨

<아이언 맨 2>, <캡틴 아메리카> 시리즈,

<어벤져스> 시리즈, <블랙 위도우>

(2010~)

블랙 위도우는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MCU)의 첫 여성 히어로다. <아일랜드>에서 1인2역과 액션을 소화한 바 있는 스칼렛 요한슨은 <아이언맨 2>를 통해 처음 MCU에 합류했다. <아이언맨 2>에선 아크로바틱 액션을 선보이면서 이목을 확 끌었지만, MCU 세계관이 방대해지면서 워낙 초능력을 발휘하는 캐릭터도 많아져 액션 히어로의 면모로는 점점 강점이 희미해지는 것도 사실이다. 오히려 캡틴 아메리카와 호크 아이, 헐크와의 감정을 나누는 순간에서 블랙 위도우의 존재가 더 의미 있어 보였다. 오랫동안 소문만 무성할 뿐 제작이 지지부진하다가 드디어 내년 공개될 블랙 위도우의 솔로 무비가 어떻게 판도를 바꿀지 지켜볼 수밖에.


힛 걸

클로이 모레츠

<킥 애스> 1,2

(2010, 2013)

<킥 애스: 영웅의 탄생>을 본 거의 모든 사람은, 킥 애스보다는 11살 짜리 힛걸에 대한 극찬을 늘어놓는다. 전형적인 히어로의 모습과 거리가 먼 평범하고 찌질한 모습을 지향했던 킥애스가 내내 허둥대는 와중, 그를 돕기 위해 나타나는 힛걸은 육두문자를 내뱉고 자기보다 훨씬 커다란 악당들의 팔다리를 망설이지 않고 잘라버린다. 애초에 B급 정서로 내세우는 영화이기에 느릿느릿 성장하는 모습을 보여줄 바에야 거침없이 상스러움을 밀어붙이는 편이 나았던 셈이랄까. 성룡의 스턴트팀과 3개월간 훈련하고, 모형이 아닌 실제 칼로 검술을 연마하는 등 어린 나이에 상당히 고된 과정을 거쳐 완성한 힛걸로 모레츠는 단숨에 할리우드가 가장 사랑하는 틴에이저 배우로 등극했다.


캣니스 에버딘

제니퍼 로렌스

<헝거 게임> 시리즈

(2012~2015)

<윈터스 본>으로 무명의 그림자를 완전히 벗어던진 제니퍼 로렌스는 <엑스맨>의 미스틱과 베스트셀러 판타지소설을 영화화 한 <헝거 게임>의 캣니스 에버딘 역을 맡으면서 스타덤을 증명했다. 아무래도 로렌스의 연기에 더 큰 재미를 느낄 수 있는 건 후자였다. 캣니스는 독재 국가에 살면서 동생을 구하기 위해 서바이벌 대회 '헝거 게임'에 참가하면서 점점 성장해 세상에 혁명의 불씨를 퍼트린다. 출중한 연기는 캣니스의 영웅적인 면모는 물론 피타와 사랑을 키워가는 절절한 눈빛까지 끌어안는다. 이 스펙트럼은 <실버라이닝 플레이북>에도 이어져, 로렌스는 최연소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의 주인공이 됐다.


퓨리오사

샤를리즈 테론

<매드 맥스: 분노의 도로>

(2015)

30년 만에 돌아온 <매드 맥스> 시리즈의 신작 <분노의 도로>는 시리즈의 오랜 주인공마저 압도하는 강력한 여성 캐릭터를 통해 성공을 거뒀다. 샤를리즈 테론이 연기한 퓨리오사다. 코믹스를 원작으로 한 히어로 영화 <이온 플럭스>에 출연한 바 있는 테론은, 머리를 밀고 눈가를 시커멓게 칠한 채 임모탄의 부인을 데리고 도망치는 퓨리오사의 절대적인 카리스마를 구현한다. 딱히 험상궂을 표정을 짓는다거나 고난이도의 액션을 선보이지도 않더라도 테론이 뿜어내는 아우라만으로 영화 속 여성들이 모래먼지 가득한 지옥도 시타델을 벗어날 수 있을 거란 확신을 심는다. <분노의 도로> 이후 테론의 필모그래피는 <헌츠맨: 윈터스 워> <분노의 질주: 더 익스트림> <아토믹 블론드> 등 액션영화의 비중이 크게 늘었다.


할리 퀸

마고 로비

<수어사이드 스쿼드>, <버즈 오브 프레이>

(2016~)

2016년 할로윈 당시 가장 많은 이들이 선택한 캐릭터는 바로 할리퀸이었다. 윌 스미스가 악역을 맡고, 자레드 레토가 히스 레저 이후 처음 조커를 연기한 <수어사이드 스쿼드>에 어마어마한 혹평이 쏟아졌지만, 할리퀸 역의 마고 로비에게만큼은 극찬 일색이었다. 정신과의사 자격으로 조커를 진단하다가 그와 사랑에 빠져 스스로 악인이자 광인의 길을 선택한 할리퀸의 유별난 캐릭터에 <울프 오브 월 스트리트>를 통해 세상을 깜짝 놀래킬 만한 아름다움을 보여준 로비는 더없이 완벽했다. 순수와 광기, 그리고 사랑스러움까지 공존하는 매력. <수어사이드 스쿼드>에서 인챈티리스 역을 맡은 카라 델레바인이 할리퀸을 맡을 예정이었다가 결국 변경됐다. 내년 개봉하는 할리퀸 솔로영화 <버즈 오브 프레이>를 통해 할리퀸과 마고 로비의 주가는 한층 더 상승할 것이다.


원더 우먼

갤 가돗

<배트맨 대 슈퍼맨: 저스티스의 시작>,

<저스티그 리그>, <원더 우먼> 시리즈

(2016~)

<배트맨 대 슈퍼맨: 저스티스의 최후>의 승자는 원더우먼이었다. 서로 각을 세우던 슈퍼맨과 배트맨은 캐릭터보다는 그 사이의 갈등만 도드라진 가운데, 홀연히 나타나 둠스데이를 무찌르는 데에 힘을 보태는 원더우먼의 존재는 그야말로 구원 같았다. 샤를리즈 테론에게 오스카를 안긴 <몬스터>의 패티 젠킨스 감독이 만들 <원더우먼>에게 자연히 관심이 쏠릴 수밖에. 배우 이전에 이스라엘 여군으로 복무했고 <분노의 질주> 시리즈에서 화려한 총기/드라이브 액션을 선보였던 갤 가돗은, 아마조네스 최고의 전사인 신이자 1차 세계대전이 한창인 인간계에서 원더우먼으로서 세상을 구하는 캐릭터의 정체성을 능히 아울렀다.


캡틴 마블

브리 라슨

<캡틴 마블>, <어벤져스: 엔드게임>

(2019~)

캡틴 마블은 MCU 영화에 등장하기 전부터 마블 세계관에서 가장 강력한 히어로라는 점이 널리 알려졌다. 그만큼 기대도 컸는데, <룸>으로 오스카 여우주연상을 거머쥔 브리 라슨이 캐스팅 됐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여기저기서 반대 의견이 터져 나왔다. 구구절절 꾸며대긴 해도 결국 "여성 히어로인데 예쁘지 않다"는 외모 지적이 주였다. 결과는 아주 성공적이었다. 90년대 중반 지구에 불시착해 닉 퓨리의 사뮤엘 L. 잭슨과 '건조하게' 임무를 수행하면서 우정을 쌓는 과정은 라슨 특유의 무표정과 맞물려 독특한 유머를 발산한다. 어떤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꼿꼿한 태도와 고된 트레이닝을 거쳐 구현한 전투력으로 똘똘 뭉친 캡틴 마블은 어벤져스의 차세대 리더로 손색이 없어 보인다.


씨네플레이 문동명 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