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이 시작된 지 벌써 열흘이 넘은 시점, 작년 최고의 영화 리스트에 빈번하게 이름을 올린 작품들 가운데 한국 극장가에 정식으로 개봉되지 않는 10개 영화를 추려 소개한다.


비탈리나 바렐라

Vitalina Varela

제목 '비탈리나 바렐라'는 영화의 주인공이자 이를 연기한 배우의 이름이다. 페드로 코스타는 전작 <호스 머니>(2014) 촬영 중에 우연히 카보베르데 출신의 중년 여성 비탈리나 바렐라를 만나 <호스 머니>에 출연시켰고, 그로부터 5년 후 그를 주인공으로 한 <비탈리나 바렐라>를 발표했다. (<호스 머니>에서 언급되기도 하는) 돈을 벌러온 리스본에서 남편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이미 장례식을 치른 뒤에야 도착할 수밖에 없었던 비탈리나 바렐라가 남편이 살던 집에서 그를 추모하면서 삶을 이어가는 모습이 페드로 코스타 특유의 스타일로 구현됐다.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도 빛을 잃지 않는 비탈리나 바렐라의 눈빛을 잊기 힘들다. 영화란 무릇 사람을 담아내는 예술이라는 명제를 곱씹게 하는 걸작.


언컷 젬스

Uncut Gems

사프디 형제의 새 영화 <언컷 젬스>는 전작 <굿타임>과 마찬가지로 곤경에 놓인 사내가 이를 해결하기 위해 뉴욕을 돌아다니는 과정을 따라간다. 결정적인 차이는 <굿타임>엔 로버트 패틴슨이, <언컷 젬스>엔 애덤 샌들러가 있다는 사실이다. 미국 소시민의 상징이라 불러도 손색이 없을 애덤 샌들러는 도박 중독으로 빚더미를 떠안고 채 뉴욕 여기저기를 동분서주 하는 보석상 하워드 역을 맡아 커리어 최고의 연기를 선보였다는 찬사를 받고 있다. 사프디 형제 작품의 주요 스탭진은 대동소이 한 가운데 데이빗 핀처의 <세븐>(1995), 미카엘 하네케의 <아무르>(2012), 봉준호의 <옥자>(2017) 등의 다리우스 콘지가 촬영감독을 맡아 비정한 도시 뉴욕에서 살아남으려는 남자의 안간힘을 담아냈다. 미국에선 지난 12월 중순에 개봉한 데 이어, 오는 1월 31일 넷플릭스를 통해 전세계에 공개될 예정이다.


라이트하우스

The Lighthouse

데뷔작 <더 위치>(2015)로 한정된 공간에서 펼쳐지는 오싹한 풍경을 아름답게 구현하는 남다른 재능을 자랑한 로버트 에거스의 신작. 신예 안야 테일러 조이를 만방에 알렸던 그는 윌렘 대포와 로버트 패틴슨을 캐스팅 해 거의 모든 순간을 두 배우의 힘으로 밀어붙였다. 미국 우상단 끄트머리에 위치한 지역 뉴 잉글랜드(<더 위치>의 배경이기도)에서 펼쳐지는 영화는 두 등대지기가 광기에 휩싸이는 과정을 풀어놓는다. 요즘 영화치고 드물게 35mm 필름을 사용해 1.19:1 화면비로 만든 이미지가 대번에 시선을 사로잡는다. 로버트 에거스의 전작 <더 위치>와 마찬가지로 극장 개봉 없이 2차 시장으로 직행 예정이다.


라스트 블랙 맨 인 샌프란시스코

The Last Black Man in San Francisco

작년 선댄스 영화제 감독상을 수상한 <라스트 블랙 맨 인 샌프란시스코>는 신인감독 조 탤봇의 데뷔작이다. 샌프란시스코에서 나고 자란 탤봇은 어릴 적부터 동네친구였던 지미 페일스의 자전적인 배경을 경유해, 젠트리피케이션으로 인해 값이 4백만 달러로 오른 빅토리아 양식의 생가를 되찾으려는 남자의 이야기를 그렸다. 지미 페일스가 직접 그 주인공을 연기했다. 샌프란시스코에서 영화를 만들기는 불가능할 거라고 판단한 탤봇과 페일스는 크라우드펀딩을 통해 7만5천 달러를 모았고, 샌프란시스코 출신의 흑인 배우 대니 글로버의 도움을 통해 프로젝트가 널리 알려져, 결국 브래드 피트의 제작사 '플랜 B'에서 제작하게 됐다.


수베니어

The Souvenir

작년 선댄스영화제를 통해 공개된 <수베니어> 역시 2019년 베스트 리스트에 가장 많이 이름을 올린 작품이다. 감독 조안나 호그가 영화 학교에 재학하던 시절의 경험담을 느슨하게 옮긴 <수베니어>는 부유한 집안 덕분에 별 걱정 없이 영화를 공부하던 여자와 입만 열면 허세와 허풍을 늘어놓는 남자의 소모적인 관계를 그린다. 제목 '수베니어'는 영화 속에서도 등장하는 18세기 프랑스 화가 장 오노레 프라고나르의 그림에서 따왔다. 배우 틸다 스윈튼과 그의 딸 오너 스윈튼 번이 주인공 줄리 모녀를 연기했는데, 올해 중 공개될 속편에서도 두 배우가 참여한다.


다이앤

Diane

<다이앤>은 프랑수아 트뤼포가 1966년 알프레드 히치콕을 인터뷰 하던 과정을 담은 다큐멘터리 <히치콕 트뤼포>(2015)를 발표한 바 있는 영화평론가 켄트 존스의 극영화 데뷔작이다. 언제나 자기는 뒷전으로 한 채 다른 사람들을 도우며 살아온 다이앤은 문득 저물어가는 자신의 삶을 깨닫는다. 뒤늦게 자아를 찾아나가는 이의 이야기처럼 손쉬운 휴머니즘보다는 꽤나 뼈아픈 회개의 시간들을 통과해야 한다. <존 말코비치 되기>(1999), <줄리 & 줄리아>(2009), <인턴>(2015) 등에 조/단역으로 출연한 배우 메리 케이 플레이스의 연기가 특히 주목 받았다.


애틀란틱스

Atlantique

작년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을 봉준호의 <기생충>이 받았다면, 그를 잇는 심사위원대상은 프랑스의 여성감독 마티 디옵의 장편 데뷔작 <애틀란틱스>의 차지였다. 73년간 이어진 칸 영화제의 경쟁부문에 오른 최초의 흑인 여성감독이라는 점에서 화제를 모았는데 결국 수상까지 이어진 것. 2009년 발표한 첫 단편 다큐멘터리 <아틀란티크>를 픽션으로 옮긴 <애틀란틱스>는, (마티 디옵의 뿌리인 세네갈의 수도) 다카르의 교외에서 몇 달째 임금을 받지 못한 채 거대 타워의 건설현장에서 일하다가 꿈을 위해 스페인으로 떠나는 배가 전복돼 죽었다는 소문이 도는 노동자들을 둘러싼 미스터리 로맨스다. 로맨스와 호러, 세네갈의 현실을 비판하는 목소리까지 어우러졌다. 칸 영화제 수상 이후 넷플릭스의 배급이 결정돼 현재 서비스 중이다.


라 플로르

La flor

808분. <라 플로르>의 러닝타임이다. 아르헨티나 출신의 감독 마리아노 이나스는 4시간 러닝타임의 장편 데뷔작 <기묘한 이야기들>(2008)을 발표한 뒤 10년 만에 13시간 28분에 달하는 두 번째 장편 <라 플로르>를 내놓아 전세계 시네필들의 열렬한 찬사를 이끌어냈다. <라 플로르>는 총 여섯 파트로 나뉘어져 있다. B급 영화, 스파이 영화, 실험 영화, 장 르누아르의 <시골에서의 하루>(1936)를 리메이크 한 흑백영화 등 서로 다른 스타일의 에피소드가 모였다. 그 안에서 4명의 주연배우는 때마다 다른 인물들을 연기한다.


히든 라이프

A Hidden Life

'과작'의 아이콘에서 어떤 감독들 못지 않게 부지런히 필모그래피를 확장하고 있는 시네아스트 테렌스 맬릭의 신작. 2016카톨릭 신자로서 2차 세계대전에서 나치를 위해 참전하기를 거부했던 오스트리아의 농부 프란츠 예거스타터의 삶을 영화로 옮겼다. <트리 오브 라이프>(2011) 이후 점점 자신만의 난해한 세계로 침잠하는 것 같았던 테렌스 맬릭이 <씬 레드 라인>(1998) 이후 21년 만에 2차 세계대전을 배경으로 삼아 시대가 할퀸 상처에도 무너지지 않는 사랑의 숭고함을 그렸다. <뉴 월드>(2005)부터 줄곧 테렌스 맬릭 영화의 찍어온 명장 엠마누엘 루베츠키가 아닌 카메라 오퍼레이터였던 요르그 비드머에게 촬영감독을 맡긴 첫 작품이다.


아폴로 11

Apollo 11

1969년 최초로 달에 발을 내딛은 아폴로 11호의 프로젝트를 기록한 다큐멘터리. 가장 큰 티렉스가 발견된 사건을 기록한 <다이노소어 13>(2014)를 연출한 바 있는 토드 더글라스 밀러는, 그 어떤 내레이션이나 인터뷰 없이 오로지 대중에게 공개되지 않는 푸티지들만 편집해 <아폴로 11>을 구성했다. 인류 초유 사건의 순간을 50년 전 자료화면이라기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깨끗한 이미지로 만나는 경험을 안겨준다. 북미에서는 지난 3월 초 개봉 당시 120개의 아이맥스관에서 상영됐다. 한 평론가는 <아폴로 11>의 스펙터클을 데이미언 셔젤의 닐 암스트롱 전기영화 <퍼스트 맨>과 비교해 훨씬 뛰어나다고 극찬했다.


씨네플레이 문동명 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