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4회 고야상 수상 현장

지난 1월 25일 펼쳐진 (스페인의 오스카라 할 수 있는) 제34회 고야상에서 화제가 된 건 단연 페드로 알모도바르의 <페인 앤 글로리>였다. 16개 부문에 후보로 올라 작품상과 감독상, 각본상, 편집상, 남우주연상과 여우조연상 등 7개를 휩쓸며 단연 2019년 스페인 최고의 영화가 되었다. 이 작품은 작년 칸 영화제에서도 높은 평가를 받았고, 안토니오 반데라스가 남우주연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만약 봉준호의 <기생충>만 없었다면 <페인 앤 글로리>는 더 좋은 결과를 얻었을지 모른다. 알모도바르의 자전적인 이야기를 펼쳐놓는 이 영화는 "첫 번째 대사는 내 삶으로부터 나오나, 곧 허구가 그 자리를 차지한다."는 감독의 말대로 자신을 재료로 삼고 있지만 그와는 별개로 노년을 마주한 창작자의 육체적 고통과 추억을 통해 창작적 계기를 되찾는 성찰을 담아낸 작품이다.

<페인 앤 글로리>

그간 알모도바르의 영화들에서 익숙하게 보여준 강한 여성상과 어머니에 대한 헌신과 애정, 성 정체성에 눈을 뜨는 유년시절, 이사에 대한 기억들이나 원색적이고 키치적인 표현 등이 두루두루 등장하며 고희를 넘긴 스페인 거장의 지난 영화 인생을 집대성한다. 그래서 이 영화는 알모도바르 영화의 총집편 같은 느낌마저 든다. 페드로 알모도바르 버전 <8과 ½>이라 말할 수 있는 이 작품의 음악은 1995년 <비밀의 꽃>부터 25년간 함께 한 알베르토 이글레시아스가 담당했다. 물론 이번 고야상에서도 그가 음악상을 수상한 건 당연한 결과. 그는 총 34회의 고야상 중 그 절반에 해당하는 17번 후보에 올랐고, 여태까지 가장 많은(11개) 고야상을 수상한 인물이다. 그 이력이 말해주듯 그는 스페인을 대표하는 최고의 영화음악가다.

스페인 최고의 영화음악가 알베르토 이글레시아스

알베르토 이글레시아스

1955년 스페인 산 세바스찬에서 태어나 바로셀로나와 파리에서 음악 공부를 한 알베르토 이글레시아스는 기타와 피아노, 작곡 등을 전공하고, 1980년대 초부터 영화음악에 뛰어들기 시작한다. 클래식 사운드에 확고한 뿌리를 두고 있지만, 후에 영화음악가가 된 하비에르 나바레테와 함께 일렉트릭 듀오를 결성한 바도 있고, 틈틈이 뛰어난 안무가인 나초 두아토와 그의 댄서 팀을 위해 여러 편의 발레곡을 작곡하며 콘서트용 음악 작곡에도 심혈을 기울였다. 또한 맘보나 탱고, 차차차, 보사노바와 같은 민속적인 라틴 색채와 리듬에 기저에 두고 다양한 스타일을 접목하며 특정 장르에 구애되지 않은 음악을 들려줘왔다. 그가 본격적으로 주목을 받기 시작한 건, 90년대 초 스페인 영화를 이끈 훌리오 메뎀과 페드로 알모도바르 감독과 협업하면서부터였다.

<붉은 다람쥐>와 <대지>, 그리고 <라이브 플래시>와 <내 어머니의 모든 것> 등 일련의 작품들이 스페인뿐만 아니라 국제적으로 성과를 얻게 되며, 알베르토 이글레시아스는 2000년대 중반 할리우드에 진출해 스페인 영화음악가들의 미국행 러시를 이끈 선두주자가 되었다. 올리버 스톤의 다큐 <커맨더>를 필두로 페르난도 메이렐레스의 할리우드 진출작 <콘스탄트 가드너>로 오스카 음악상에 깜짝 후보로 오르며 자신의 이름을 전 세계에 각인시켰고, 이후 <연을 쫓는 아이>로 다시 오스카 음악상에 지명되며 뒤늦게 주목받게 된다. 이후 스티븐 소더버그의 <체> 2부작, 토마스 알프레드슨의 <팅커, 테일러, 솔저, 스파이>, 리들리 스콧의 <엑소더스: 신들의 왕들>, 프랑스의 <더 몽크>나 <1월의 두 얼굴> 등의 음악을 맡으며 국제적인 행보도 놓치지 않고 있다.

25년간 알모도바르의 음악적 파트너

<내 어머니의 모든 것>, <그녀에게> 사운드트랙 표지

<귀향>, <브로큰 임브레이스> 사운드트랙 표지

<내가 사는 피부>, <페인 앤 글로리> 사운드트랙 표지

그럼에도 그의 진가가 발휘된 건 바로 페드로 알모도바르와 사반세기 동안 함께 해온 열 한 작품에서다. 이중 여섯 편(<내 어머니의 모든 것>, <그녀에게>, <귀향>, <브로큰 임브레이스>, <내가 사는 피부> 그리고 <페인 앤 글로리>)이 고야상 음악상을 휩쓸었다. 원색의 강렬한 색감 아래 펼쳐지는 성과 욕망, 종교와 가족에 대한 통속적인 멜로드라마에, 도발적인 상상력과 히치콕스러운 서스펜스를 슬쩍 얹어 부조리한 유희 정신을 즐기는 알모도바르의 독특한 스타일은 이글레시아스의 관능적이면서도 서늘하고, 때론 감동적인 스페인 고유의 정서를 담아낸 선율과 만나 상생과 조화를 이룬다. 섬세하고 풍부한 현악과 플라멩코의 정열적인 기타, 타건(打鍵)의 울림이 인상적인 피아노 그리고 효과적인 일렉트릭을 활용해 만들어내는 그의 스코어는 극적이며 매혹적이다.

확연히 다른 음악적 지향점을 가지고 있음에도 초기작을 함께 했던 베르나르도 보네치나 엔니오 모리꼬네, 류이치 사카모토를 거쳐 알베르토 이글레시아스로 이어지면서 꾸준히 일관된 분위기와 유사한 심상을 자아내는 건 알모도바르만이 가진 반동적인 기질과 특유의 컬트적인 정서가 짙게 베인 탓이 크다. 전복적이면서도 과격하고 황당하지만 따스한 시선이 느껴지는 감독의 메시지를 보듬어 안는 음악은 덜도 더도 않는 중용의 미덕을 지키며 여성적인 터치를 간직한다. 재즈와 라틴 색채, 클래시컬한 분위기가 뒤섞인 이글레시아스의 테마가 가진 인장(印章)은 상대적으로 약하지만, 알모도바르가 보여주고자 하는 주제와 이야기에 딱 맞춤 재단된 사운드를 선사한다. 여기에 특별히 감독이 직접 선곡한 삽입곡들은 스코어의 빈 지점을 완벽히 보완한다.

고통과 영광의 영화음악

<페인 앤 글로리>

데뷔 40년을 넘긴 노장이 반추하는 ‘고통과 영광’의 회고록인 만큼 이글레시아스의 음악 역시 25년간 함께 해온 세월을 총결산하는 의미를 지닌다. 서늘한 긴장감을 품은 채 비브라토와 피치카토를 구현하는 베테랑 바이올리니스트 토마스 보우스의 솔로 연주는 끊어질 듯 끊어지지 않는 노회한 육체의 격통을 섬세하게 묘사하고 있으며, 유령처럼 부유하는 아련한 클라리넷과 반짝이는 피아노는 찬란했던 과거 기억의 편린들을 소환하며 현재의 상처뿐인 영광을 위로해준다. 전복적이고 화려한 색채감이 줄어들며 명징하던 라틴 스타일도 다소 숨이 죽었지만, 잔향처럼 일렁이는 일렉트릭 효과가 새로운 창작욕과 의지를 일깨운다. 스코어 전반에 걸쳐 고즈넉한 인생 황혼기를 맞이하는 쓸쓸함과 우울함이 감지되는데 체념의 느낌보단 수용의 자세에 가깝다. 알베르토 이글레시아스는 <페인 앤 글로리>로 제8회 칸 사운드트랙 어워드를 수상했다.

삽입곡을 잘 쓰는 알모도바르답게 이번 작품에서도 여러 인상적인 노래가 영화 곳곳에서 흘러나온다. 오프닝의 빨래터에서 페넬로프 크루즈를 비롯한 아낙네들이 부르는 곡은 1962년 <달의 발코니>라는 스페인 고전 뮤지컬에서 안달루시아의 무용수이자 배우였던 롤라 플로레스가 부른 ‘A tu vera’고, 영상자료원에서 상영되는 말로 감독의 걸작(?) 영화 <맛>의 엔드 크레딧엔 알라스카 이 디나라마의 ‘Cómo pudiste hacerme esto a mi’가 슬쩍 소개된다. 알베르토가 말로가 쓴 글을 읽으며 무대 스크린에 상영되는 영화 <나이아가라>에선 마릴린 먼로가 ‘Kiss’를 짧게 부르며, 연극을 준비하며 에디트 피아프가 부른 ‘La vie en rose’를 그레이스 존스가 리메이크한 버전을 사용한다. 정식 공연에선 멕시코 란체라의 전설 차벨라 바르가스의 ‘La noche de mi amor’도 흘러나온다. 사운드트랙엔 유일하게 피노 도나지오가 작곡하고 미나가 부른 ‘Come sinfonia’만 수록돼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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