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출을 삼가고 집에서 보내는 시간이 부쩍 많아진 요즘. OTT 플랫폼 혹은 VOD를 통해 유명 영화를 관람하는 것에 권태를 느낀다면 이 글을 주목하시길. 신선한 스토리와 여러 시도가 돋보이는 감독들의 단편 영화를 보며 권태로움을 극복해 보는 것도 좋은 방법! 보석 상자나 다름없는 유튜브에서 컴팩트한 러닝타임으로 부담 없이, 짧고 굵게 무료로 집에서 즐길 수 있는 국내 단편 영화들을 소개한다.
선아(정유미)는 폴라로이드 작동법을 배우고 있다. 알려주는 사람은 열심히 설명을 해주고 있는데 어쩐지 선아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다. 짝사랑하고 있는 마음을 숨긴 채 몰래 떨리는 동공과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는 입술만 달싹일 뿐이다. 당시 신예였던 정유미의 수줍으면서도 섬세한 감정연기가 돋보이는 영화 <폴라로이드 작동법>. <최악의 하루> 김종관 감독의 연출작으로, 클로즈업을 활용한 연출과 스토리, 정유미의 연기력만으로 단편영화계의 전설로 남았다. 김종관 감독 유튜브 채널에서 볼 수 있으며, 특유의 감성을 엿볼 수 있는 또 다른 작품 <하코다테에서 안녕>도 추천한다. 단조롭고 담담한 목소리로 이별의 과정을 밟는 연인의 목소리가 여운을 남기는 작품으로, 안소희와 정준원이 내레이션을 맡았다.
<추격자>, <황해>, <곡성> 등 압도적인 몰입감을 선사하며 자신만의 스릴러 장르 세계를 구축한 감독 나홍진의 초기작. 영화는 재능 없는 한 남자가 무한한 열정으로 도미 요리를 하는 과정을 담았다. 과연 남자는 자신의 기대를 충족시킬 완벽한 도미 요리를 완성할 수 있을까. 그로테스크한 감각이 두드러지는 나홍진의 연출력을 확인할 수 있는 작품으로, 다소 잔인하다 느낄 수 있으니 플레이 버튼을 무심코 누르기 전에 주의하시길(도미를 요리할 뿐인데 너무 무섭고… 무서워요). 탄탄한 스토리로 제4회 미장센 단편영화제에서 ‘절대악몽’ 부문 최우수작품상을 수상했다.
친구와 방금 싸움을 한 소년 태구(엄태구). 그에게 미묘한 감정을 갖고 있는 석재(홍석재)는 다친 태구에게 연고를 전해 주려 했지만 왠지 쑥스럽기만 하다. 석재가 망설이고 있는 사이 발레복으로 갈아입은 태구. 석재는 충동적으로 태구에게 발레를 배우고 싶다 말한다. 태구가 석재의 자세를 봐주려던 찰나, 지혜(류혜영)가 발레를 배우고 싶다며 찾아온다. 태구가 지혜에게 마음을 보이자 석재는 지혜를 질투한다. <하트바이브레이터>는 <잉투기>, <가려진 시간> 엄태화 감독의 단편 영화로, 감독의 페르소나이자 친동생인 엄태구가 발레 하는 고등학생(…)이라는 엄청난 설정으로 등장한다. 엄태구가 섬뜩한 비밀을 안고 있는 노숙자로 출연한 전작 <유숙자>를 보고 관람한다면 그 괴리감이 꽤 클지도 모르겠다. 당시 단편 독립영화계를 휩쓸고 있었던 류혜영의 모습도 만나볼 수 있다. 류혜영은 이 작품으로 엄태화 감독과 인연을 맺어 <잉투기>로 첫 장편영화 데뷔를 치렀다.
한강에서 만나기로 한 친구가 나오지 않아 2시간 30분째 하릴없이 걷고 있는 한 남자(하진수). 마침 전화를 걸어온 친구에게 짜증을 내고 있는데 기타를 맨 남자가 다가와 담뱃불을 요구한다. 방금 담배도 꺼버렸고 자신도 불을 빌려 붙인 거라 거짓말한 남자는 다시 제 갈 길을 가려 하지만, 기타맨은 이것도 인연인데 자신이 만든 노래를 한 번만 듣고 가라 붙잡는다. 스틸컷을 보고 두 눈을 의심하셨다면, 맞다. <불 좀 주소>는 봉준호 감독의 주연작으로, 생뚱맞게 등장해 자신의 노래를 들어 달라 간청하는 기타맨을 연기했다. 어딘지 어색한 봉 감독님의 연기력에 웃음이 나오다가도 충격적인 전개에 정신이 번쩍 든다. <살인의 추억> 조명부 출신이었던 강대희 감독과의 인연으로 출연하게 됐다고.
<비치온더비치>, <밤치기>, <하트> 등 다수의 작품에서 연출과 주연을 모두 맡아온 재능 있는 감독 겸 배우 정가영. 남녀관계를 직설적인 대화를 통해 발칙하게 풀어나가며 개성 있는 스타일을 구축했다. 아슬아슬한 성적 긴장감이 아닌 정가영 만의 당돌함을 느낄 수 있는 또 다른 단편 추천작 <조인성을 좋아하세요.>. 제목을 유심히 보면 물음표나 느낌표도 아닌 마침표로 끝난다. 영제인 <Love Jo. Right Now.>에서는 배우 조인성을 좋아하라는 그의 단호함을 더 강하게 엿볼 수 있다. 내용은 간단하다. 차기작을 구상 중인 가영은 친구와의 통화에서 배우 조인성을 캐스팅하고 싶다 말한다. 이어지는 선배와의 통화. 류준열? 안 된다. 조인성을 캐스팅하고 싶다. 그리고 이어지는 영화의 마지막, 상상도 못한 이의 목소리가 휴대폰 너머 등장한다. 그게 누군지 궁금하다면 당장 아래 영상을 눌러 보시길.
2019년, 독립영화계에 샛별처럼 떠오른 두 여성 감독이 있었다. <벌새> 김보라 감독과 <메기> 이옥섭 감독이다. 그중, 이옥섭 감독과 배우 구교환이 합심해 만든 유튜브 채널 [2x9 HD]. 두 사람이 함께 작업한 단편 영화 6편을 무료로 볼 수 있다. 재기 발랄한 이야기, 눈길을 사로잡는 미장센, 특유의 건조한 코미디가 녹아든 매력적인 작품들로 무장해있다. 두 사람이 일군 영화적 세계를 단 번에 느껴보고 싶다면 단편 영화 <4학년 보경이>로 입문하길 추천한다. 30분마저 길게 느껴진다면 5분 남짓한 러닝타임에 천우희와 이주영이 주연을 맡은 <걸스 온 탑>도 좋다. <왜 독립영화 감독들은 DVD를 주지 않는가?>에서는 드라마 <하이바이, 마마!>에 출연 중인 고보결의 인상 깊은 일본인, 아니 한국인 연기를 만나볼 수 있다.
<두개의 빛: 릴루미노> 등
감독 허진호 / 출연 한지민, 박형식
31 min
<8월의 크리스마스>, <봄날은 간다>로 한국영화 르네상스 시대에 멜로 장르를 이끌었던 감독 허진호. 그가 삼성과 손잡아 제작한 단편영화 <두개의 빛: 릴루미노>다. 삼성전자 단편영화 프로젝트 중 하나로, 저시력 장애인들의 불편함을 해소하고자 만든 VR용 애플리케이션 ‘릴루미노’를 소재로 제작했다. 사진동호회를 찾아온 인수(박형식). 그는 시력을 잃어가고 있는 3년차 ‘초짜’ 장애인이다. 그는 그곳에서 시각장애인인 수영(한지민)을 만나고, 수영의 당당한 모습에 호감을 갖게 된다. <두개의 빛: 릴루미노>는 주연을 맡은 한지민과 박형식의 탁월한 시각장애인 연기와 소재를 다루는 허진호의 세심하고도 따스한 감성이 어우러지며 PPL용 영화임에도 대중들에게 좋은 평가를 받았다. 조회수 2444만을 돌파했으며, 허진호와 삼성이 콜라보한 또 다른 작품 <선물>도 해당 채널을 통해 관람할 수 있다.
씨네플레이 문선우 기자